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Korean nobless oblige)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프랑스어로서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 즉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이말은 귀족의 역사가 긴 유렵사회에서 유래되었고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 유렵 사회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 경주 최부자
1926년 10월 경주에서는 신라시대 고분 하나가 발굴되고 있었다.
발굴 단원 중에 파란 눈의 신혼부부가 끼어 있었다.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 부처였다.
고고학에 관심 많은 황태자가 동양에 신혼여행 왔다가 경주에서 발굴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서 배를 타고 온 길이었다.
훗날 스웨덴 국왕이 된 황태자는 그 때 머물렀던 고분 근처 한 양반 집안의 사랑채를 잊을 수 없었다.
아담하고 운치있는 건물, 향긋한 내음의 법주(法酒),
금빛 나는 놋그릇에 담겨나온 정갈한 음식….
누군가 스웨덴을 방문했을 때 그는 물었다.
“경주 최씨네 사랑채에는 지금도 사람이 많은가요?”
▶ 경주 최부자 가문의 초석
때는 임진왜란 이 끝나고 흉흉한 사회분위기 속의 조선입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신 최진립 장군을 시작으로 경주 최부자 가문이 시작 되었습니다.
전란으로 일할수 있는 사람의 태반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전체 농업생산 기반이 무너져 내렸고 일할사람이 없어지자 땅도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부랑민, 즉 유민이 되어갔고. 이제 농사지울수도 없는 땅들은 그저 곡식 두어말하고 바꿔버리고 있었습니다.
최진립장군은 헐값으로 어마어마한 땅들을 나오는대로 사들입니다.
일단 많은 땅을 확보하고 난 후 최진립 장군은 그당시로는 새로운 농법을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앙법입니다.
이앙법을 실현 하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의 확충이 필요하지요.
최장군은 가진 재산으로 땅을 사들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사서 수로를 건설합니다.
이미 뉴딜정책을 경주지방에서 시행하였습니다.
▶경주 최씨네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꾼으로 내려온 집안이었다.
단지 부자였을 뿐 아니라
‘사방 백 리(약 40키로미터)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의 가훈을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실천에 옮겨 존경 받았다.
찾아오는 과객(손님)은 귀천(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 하라’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000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000석을 손님 접대에 썼다.
손님이 떠날 때면 과메기 한 손(두 마리)과 하루 분의 양식을 쥐어보냈다.
▶새로운 제도 도입을 통한 효율적인 경영관리를 하셨다.
소작인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는 경영방식을 도입하였다.
일정한 토지를 떼어 주어 일의 성과가 큰 사람에게 혜택을 부여하기도 하였으며,
공동 경작지를 두어 일꾼들이 공동의 행사나 필요한 일에 사용할 수 있게 하셨다.
더불어, 일은 마름을 없애고 소작인들과 직접계약을 하는 방식을 취하여
직접 계약을 하여 마름의 횡포를 없앴으며,
소작인 개개인의 특성과 형편을 살필수 있어
소작인과의 일체감이 증진되고 생산성 역시 매우 높아졌다.
▶사회보장 제도 효시 '비스마르크'보다 2세기는 앞서 실시하셨다.
한번은 화적패가 집안에 들어 재물과 인명에 큰 타격을 가한 후, 최부자네는 큰 각성을하게 됩니다.
"그 도적들은 남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이며, 소작인들이다. 그들이 배가 고파서 이웃집 담을 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보다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후 최부자네는 과부나 고아, 질병자와 같이 집에 우환이 있는 집안에 소작료를 면제해주거나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그리고 흉작에는 가산을 털어 구휼에 나셨습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보다 더욱 앞선 '사회보장제도'라 생각 됩니다.
▶나라가 어려울때 마다, 가진자의 솔선수범을 보여주셨다.
때는 병자호란이었습니다.
용골대의 위용에 눌려 지리멸렬하던 조선군...... 그리고 인조
임진왜란과 달리 의병도 활발하지 못한 병자호란인지라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합니다.
최진립 장군은 이미 노인이 되어있었지만 아들들에게 재산의 관리를 맏긴채 노구를 이끌고 결과가 뻔한 의병의 길로 다시 나섭니다.
최진립 장군은은 남한산성 외곽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나중에 최진립은 무관으로서는 최고의 칭호와 대우를 받으며 그의 사당을 경주 용산서원에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최부잣 집안의 후손들은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셨으며, 투옥 되시거나 옥사 하신 분이 계시며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하셨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모든 재산이 국가 인재를 위한 교육 사업(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에 투자 하셨습니다.
- 경주 최부자집 가훈 -
1. 진사(제일 낮은 벼슬.단순 명예직.)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
2. 재산은 1년에 1만석(약 5천 가마니)이상을 모으지 말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했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사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남들이 싼 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들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
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3년동안 비단옷을 입히지 마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어라.
-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中에서 -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최부자 : 최윤(왼쪽), 최준(오른쪽)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입니다.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요즘 우리 세대들은 어떠한가?
맹목적인 부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와 더불어 기업에서는 '기부 = 마케팅'이라는 생각으로
기업 이미지 제고와 홍보 효과를 위한 위선적인 나눔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즘 사람들은 수치화 된 돈을 통해서 능력의 잣대를 마련해 두었다.
능력이 유무를 연봉으로 치부해 버린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세상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큰 힘에는
그에 상응 하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
경주 최부자네 만석 재산은 사라졌지만,
300년의 긴 세월동안 남겨주신 그 분들의 정신은 이 시대에 이어갈 소중한 가치를 통해서
자신과 기업을 되돌아 보는 계기 되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