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무역으로 유입되던 서양 상품은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와 조선 후기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무관세 및 일본 화폐 사용권을 획득한 일본 상인들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그들은 영국산 면제품, 특히 옥양목을 들여와 쌀, 콩, 쇠가죽, 금 등을 헐값에 수입하는 중계 무역으로 폭리를 취하였다. 여기에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면서 청나라의 상인이 가세하자,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상인의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한편, 개항 초 개항장을 중심으로 사방 10리로 제한되었던 일본 상인의 활동 범위는 청나라 상인의 활동 범위 확장과 더불어 50리, 100리로 확대되다가 1890년대에 들어서는 그 제한마저 사라졌다.
그 결과 농촌의 직물 산업은 몰락하였고, 대장간을 비롯한 도시의 전문적 수공업 역시 수입 물품 앞에 무너졌다. 동시에 시전상인, 송상, 경강상인 등 전통적 상인들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외국 상인들의 서울 진입에 맞서 시전상인은 상점 문을 닫아걸고 저항하였고 시민들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청과 일본 상인은 소공동과 충무로에 각각의 집단 거류지를 형성하면서 상권을 넓혀 나갔다. 한때 수출입 상품의 내륙 유통을 담당하면서 호황을 누리던 보부상, 객주, 여각도 외국 상인의 내륙 진출로 타격을 입었다. 그 중 일부 국내 상인들은 상회사(商會社)를 조직하여 외국 상인과 경쟁하였지만 자본 규모가 작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한편, 식량 수출이 늘어나면서 쌀값이 치솟는 바람에 무려 27회의 방곡령이 내려질 정도로 국내 식량 사정은 나빠졌다. 어려워진 농민들을 상대로 일본 상인들은 입도선매(立稻先賣)를 가요하여 경제적 침략 강도를 높여 나갔다. 가뭄이 극심했던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방곡령을 내리자, 조일통상조약(朝日通商條約) 37조를 내세워 조선 조정을 위협한 일본은 오히려 11만원의 배상금을 받아내고 방곡령을 철회시킨 일도 있었다. 이렇듯 조정이 백성들을 보살피지 못하는 동안 몰락한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키거나 화적이 되어 부호나 탐관오리를 약탈하였다. 화적 중에는 거의벌왜(擧義伐倭)를 외치는 무리가 적지 않았는데, 일본 상인들의 수탈로 인한 피해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민씨(閔氏) 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관직 매매가 성행하였으니, 지방 수령 자리가 2만냥에 거래되는 실정이었다. 관직을 산 탐관오리들은 재산을 불리고 더 좋은 관직을 사기 위해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농민들은 민란으로 저항하였다. 특히, 극심한 가뭄이 들던 1888년 전국적 규모로 시작된 민란은 1894년까지 매년 계속되었다. 그러나 민란은 흥분한 농민들이 지방 관청 창고를 습격하거나 수령을 처단하는 식의 산발적이고 일시적인 불만 표출에 불과했다. 이러한 민란을 조직화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민중항쟁으로 발전시킨 것은 동학(東學)이었다.
경주 지방의 몰락 양반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에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에 에 반대하여 동학이라 부른 것으로, 성리학적 신분 질서에 반대하여 모든 사람은 하늘과 같이 소중하다는 인내천(人乃天)을 내거 반외세(反外勢), 반봉건(反封建) 사상이었다.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자 당황한 조정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그럼에도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포교로 교세는 삼남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청나라, 일본 상인의 침탈과 탐관오리의 봉건적 수탈이 곡창 지대인 삼남 지방에 집중되면서 반외세, 반봉건을 외치는 동학이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파급된 결과였다.
조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삼남 지방으로 확대되자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이 동학을 탄압하고 나섰다. 이에 맞서 동학교도 수천명이 전라도 삼례에 모여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하였다. 삼례 집회로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얻어 낸 동학의 지도자들은 서울로 올라가 국왕에게 동학을 인정해 달라는 복합 상소를 올렸다. 복합 상소가 조정의 탄압으로 해산되자 동학교도 수만명이 보은과 금구에 다시 모였다. 보은과 금구 집회에서는 북접(北接)이 주장하던 교조신원 외에도 남접(南接)이 주장하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구호가 추가되었다. 이로써 동학운동은 단순한 종교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조신원운동을 통해서 수만명의 농민을 동원할 수 있고,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농민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포접제(抱接制)라는 교단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동학은 교조신원운동을 거치면서 교세 확장과 동시에 농민들을 조직화하고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보은, 금구 집회에서 농민들의 불만이 동학을 통해 조직적으로 제시될 무렵,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조병갑은 저수지 만석보(萬石洑) 중축에 군민을 강제 동원하면서도 물세 7백석을 징수하고 부친의 공덕비 건립 비용으로 1천냥을 거두었다. 이에 전창혁(全昌奕) 등 농민 대표 40여명이 군수 조병갑을 찾아가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장형(杖刑)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에 격분한 고부의 접주(接主) 전봉준(全琫準)은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돌려 1천여명의 농민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했는데, 그곳에서 빼앗은 양곡 1400여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갑작스런 농민 봉기에 당황한 조정이 도망간 조병갑의 처벌과 시정을 약속하자 농민들은 자진 해산하였다.
1894년에 일어난 고부 농민들의 봉기는 특별한 대책 없이 조정의 시정 약속을 믿고 자진 해산했다는 점에서는 민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접제에 의해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고, 사발통문을 통해 농민들이 봉기한 목표를 밝혔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란과는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의 始發占이 되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고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시정을 약속하고 안핵사 이용태(李容泰)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민란이 진정되는 틈을 노려 주동자를 잡기 위해 각 마을을 뒤지며, 일반 농민들까지 동학교도로 몰아 무차별 탄압하였다. 이때 전봉준의 집이 불타고 그의 아버지 전창혁이 살해되었다. 탐관오리의 폭정에 저항한 민란을 조정의 권위에 도전한 폭동으로 몰아붙여 동학의 뿌리를 뽑겠다는 국가적 권력의 폭거였다.
이에 전봉준은 전라도 각지의 동학 접주에게 통문을 돌려 무창과 태인에서 무장봉기하였다. 고부의 백산에 집결한 8천여명의 농민들은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長所)를 설치하고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孫華中)과 김개남(金開南)을 선출하여 포고문을 발표하고 봉기의 목표를 분명히 하였다. 이로써 고부 농민들의 봉기는 대규모의 항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동학군은 황토현(黃土峴)에서 전라도 감영의 관군 8백여명을 맞아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고 정읍,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을 함락시켰다. 다급해진 조정은 전라 감사 김문현(金文鉉)을 파직하고 과잉 진압의 책임을 물어 안핵사 이용태를 유배시켰으며, 국왕 스스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시간을 벌기 위하 기만책을 쓴 것이다.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은 행군 도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여 병력이 줄어들게 되자 조정에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황룡촌전투(黃龍村戰鬪)에서 관군을 격파한 동학군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위기에 몰린 고종(高宗)의 비(妃) 민씨(閔氏)는 또 다시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동시에 농민군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기만술을 펼쳤다.
조선 조정으로부터 출병 요청을 받은 청은 3천여명의 군사를 아산에 상륙시켰고, 천진조약(天津條約)에 입각해서 파병 사실을 일본에 통보하였다.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청으로부터 빼앗을 기회를 노리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6천여명의 정예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이러한 일본군의 병력 규모와 상륙 위치를 잘 살펴보면 조선 관군을 도와 동학군을 진압하는 것보다도 수도를 장악하고 청과 전쟁을 벌이려는 일본의 속셈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한 이틀 뒤, 관군의 포격으로 전주성을 내준 전봉준은 김개남 등 강경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정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여 전주화약(全州和約)를 체결하였다. 청나라 군사와 일본군의 주둔 명분을 없애기 농번기를 맞이하여 농민들이 주축을 이룬 동학군의 입장을 반영한 선택이었다. 전주화약은 상승세를 타던 갑오농민항쟁의 기세를 누그러뜨림으로써 관군의 반격 기회를 제공한 치명적 오류로 평가된다. 그러나 조정이 끌어들인 외세가 이 땅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한 교육지책이었으며, 조정을 상대로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협상을 이끌어 낸 성과도 거두었다.
동학군은 조정을 상대로 폐정개혁안(弊政改正案) 12개조를 조건으로 화약(和約)을 맺었다.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의 처벌을 요구하는 조항은 과거 수많은 민란 때도 흔히들 제시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종전과 다른 몇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신분제 폐지', '과부의 재혼 허용', '토지의 평등 분배 경작'의 요구는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를 부정하는 주장이었다.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불만을 수용하여 '왜인과 통하는 자는 엄중히 징벌하자'는 주장도 담겨 있었다. 따라서 갑오농민항쟁은 단순한 민란이 아닌 봉건적 수탈과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반봉건 항쟁이었으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구하기 위한 반외세 항쟁이었다.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한다고는 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지킬지는 의심스러웠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전봉준은 "동학교도와 조정은 원한을 씻고 모든 행정에 협력한다."는 조항을 제일 처음에 제시하였다. 이 문구에는 조정이 동학을 합법화하고 전주화약을 맺는다는 뜻 말고도, 동학이 나라의 행정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조항에 입각해서 동학군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표면적으로는 전주화약에서 내건 요구 조건이 제대로 실행되는지를 감시하고 지방 통치기관에 협력하겠다는 명분으로 설치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지방의 치안과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집강소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농민들이 지방 정치를 시행하는 민중 자치기구였다. 남원, 운봉, 나주에서 집강소를 인정하지 않는 관군의 저항이 있었으나, 나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동학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서 사실상 전라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전주화약으로 동학군이 자진 해산하자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번 기회에 청나라의 군사력을 물리치고 조선에서의 지위를 굳힐 계획이었다. 동학군의 자진 해산과 더불어 조선과 청나라의 철군 요구로 군대 주둔의 명분이 없어진 일본은 병력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내정에 무력(武力)으로 개입하였다. 일본은 친청(親淸) 세력인 민씨 일파 대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허수아비로 내세워 김홍집(金弘集) 부일내각(附日內閣)을 수립하였다. 이어 내정 개혁을 요구사고 나섰다. 일본군의 계속적인 주둔과 청나라와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구실을 찾으려던 술책이었던 것이다.
이에 남접의 지도자 전봉준은 일본군 철수와 친일 정권 타도를 주장하며 9월 삼례에서 4천여명의 농민을 모아 재봉기하였다. 한때 동학 교주인 북접의 최시형은 무장봉기를 비난하였지만, 손병희(孫秉熙)가 가담하면서 남접과 북접의 연합작전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동학군의 수효는 5만명 이상으로 크게 불어났다. 동학군은 공주 일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는데, 우금치전투(牛金瀨脇速)에서 고지를 선점한 일본군을 포위하고 40여회의 맹렬한 돌격전(突擊戰)을 펼쳤으나 기관총과 박격포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 패퇴하고 말았다. 관군에게 쫓기던 전봉준은 원평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으나 동학군 3천여명이 전멸되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자, 부대를 해산시키고 순창에서 은신하던 중 관군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1895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設裁判所)에서 5차례에 걸쳐 재판을 받은 후 사형을 언도받았고, 3월 30일에 동지인 손화중(孫華仲), 김덕명(金德明), 최경선(崔景善) 등과 함께 교수형을 당하면서 혁명으로 일관된 삶을 마쳤다.
러시아의 급진적 마르크스 사상가이자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던 레닌(Vladimir Ilich Lenin)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노동자대회에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제출한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 관련 보고논문을 읽고 큰 관심을 보였다. 몽양의 보고논문은 갑오농민항쟁을 '양반 중심의 왕조체제를 마감하려는 계급투쟁이자 농민들의 정치적, 혁명적 요구'라고 파악하였다. 1922년 러시아는 혁명에 성공한 뒤 약소민족해방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심의 배경에는 갑오농민항쟁에서 자주적 민중혁명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봉건 세력인 관군과 외세인 일본군의 무력탄압으로 갑오농민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갑오농민항쟁에서 드러난 민중의 반봉건 정신은 갑오경장(甲午更張)에 상당 부분 수용되었으며, 반외세 정신은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