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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2. 만주 땅을 유랑하다 ⑸

대모달 |2011.09.11 06:03
조회 43 |추천 0

★ 독립군을 도와주다

 

양세봉은 조선에서 이미 벼농사를 지은 적이 있었기에 제법 농사 기술이 있었는데, 특히 물을 잘 보았다. 그는 원봉과 시봉을 데리고 물도랑을 파고 논두렁을 다듬으면서 경사도에 다라 한 뙈기씩 한 뙈기씩 논을 만들어 나갔다. 지주에게 소 한마리를 빌려 써래질을 하고 물을 댄 후 온 식구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였다. 모내기는 사흘 만에 끝났다.

 

이 마을엔 조선인이 운영하는 서당이 하나 있었다. 세봉은 동생들이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도록 정봉과 운도를 서당에 보내 글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학비를 현금으로 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어머니와 숙모가 다시 베를 짰지만, 이 마을에서는 광목이 잘 팔리지 않아 돈을 벌 수 없었다.

 

집에 현금이 없으니 일용품을 사는 일도 힘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시봉은 마을의 지주 김세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지주는 시봉이 동생 정봉을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먹고 자는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정봉의 학비도 대주겠다고 했다. 대신 정봉은 서당이 끝난 뒤에는 자기 집의 잔일을 도와야 한다고 했다. 정봉은 이 귀한 기회를 아주 소중히 여겨 매일 착실하게 공부했다.

 

시봉은 머슴으로 있으면서 이 집에서 일하는 김씨 아저씨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김씨 아저씨는 시봉의 착한 성품을 보고 딸 화순과 결혼시키고자 했다. 세봉의 어머니도 동의했다. 이렇게 언약했지만 그때 화순은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다.

 

시봉이 머슴살이를 시작한 그 이듬해에 불행하게도 화순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화순의 어머니는 시봉이 데릴사위로 들어왔으면 했지만 시봉은 동의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일한 덕분인지 연말이 되자, 지주는 시봉에게 10여원을 더 주었다. 시봉이 그 돈을 모두 장모에게 주자, 화순의 어머니는 매우 기뻐했다. 세봉이 군대 때문에 외지로 간 뒤 시봉과 화순은 간소하게나마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화수은 13세였고 시봉은 24세였다. 화순은 비록 나이가 어리고 몸이 약했지만 아주 얌전하고 예의가 발라 다른 가족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1922년 봄, 세봉은 지주에게서 소 한마리를 빌려 논을 갈았다. 논갈이를 끝내자 지주는 세봉더러 아예 소를 맡아 키워보라고 했다. 세봉은 평소에도 이 소를 이용하여 많은 잡일을 하는 데 썼다. 세봉의 집에 소가 한마리 있는 것을 보고 부자로 알았던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양씨 집 주인은 3일내에 군자금 30원을 기부하시오. 어긴다면 당신의 소를 죽일 것이오.’

 

대한독립단의 낙관이 찍힌 편지였다.

 

편지를 받은 원봉은 덜컥 겁이 났다. 돈을 내지 못하면 소가 죽게 될 판이었다. 독립군이 소를 죽이면 가산을 다 팔아도 소 값을 치를 수가 없었다. 그는 급히 논에서 물을 보고 있는 형을 찾아갔다.

 

세봉은 편지를 보고 나서 동생에게 “겁내지 마라.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설마 백성의 소를 함부로 잡겠냐?”고 말했다. 식구들은 큰 재앙이 닥친 것 같아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그런 가족에게 세봉은 “내일 내가 그들을 찾아가겠소. 별일 없을 것이오”라고 위안했다.

 

이튿날 세봉은 돈을 약간 가지고 먼저 홍묘자에 가서 신발 열 켤레와 양말 다섯 켤레를 산 후 자루에 넣어 걸머지고 삼도구로 가 대한독립단 의용군 병영을 찾았다.

 

보초를 서던 독립군 병사가 세봉을 의용군 총대장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김명봉(金鳴鳳) 총대장은 양세봉을 보고 “우리 병사가 돈을 받으러 갈 텐데 왜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오셨소?” 하고 물었다. 세봉은 “우선은 독립단에 조그만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무슨 연유로 우리보고 30원을 기부하라고 하는지 물으려고 왔습니다. 아마 우리 집에 소가 한마리 있는 것을 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사실 그 소는 우리 집 소가 아니라 빌려온 소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조국을 떠나 이곳으로 흘러온 우리가 고작 몇 년안에 어떻게 그리 빨리 돈을 모아서 소까지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김명봉 총대장은 대한독립단이 처한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의용군 병사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옷이 해져도 바꾸어 입을 옷이 없다고 했다. 더불어 양세봉의 가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며 정중히 사과했다.

 

양세봉은 김명봉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지식도 풍부하고 태도도 성실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김명봉은 양세봉에게 대한독립단에 가입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세봉은 집에 식솔이 많고 가장이어서 자기가 없으면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다. 성격이 명랑하고 말을 잘하며 두뇌가 명석하면서 애국심이 강해 보이는 양세봉이 돌아가는 것을 김명봉 총대장은 몹시 서운해했다. 세봉 역시 마땅히 독립단을 위해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은 있으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형편을 아쉬워하면서 가지고 있던 돈 10원을 몽땅 꺼내 김명봉에게 주면서 말했다.

 

“당신들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양세봉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비로소 가족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재순은 더욱 기뻐하며 단둘이 있게 되자 “거기 가니 무섭지 않던가요?” 하고 물었다. 세봉은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들도 조선 사람이오. 그들은 일본을 물리치려는 것이지 우리 백성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잖소?”라고 대답했다.

 

그해 여름에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소속된 독립군 병사 여덟 명이 찾아왔다. 마을에 들어서자 여덟 명의 독립군은 제일 먼저 양세봉의 집을 찾아왔다. 집에는 숙모와 두 며느리인 재순과 해원이 있었다. 그들 중 분대장인 정창하란 사람이 자기들을 촌장의 집에 데려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을 직접 촌장 집으로 데리고 가면 촌장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 숙모가 재순에게 촌장을 집으로 모셔오라고 했다.

 

촌장이 양세봉의 집으로 왔다. 정창하 분대장은 촌장에게 “오늘부터 모든 집안의 18세 이상 남자들은 대한통군부 군자금으로 1년에 1원 50전씩을 내야 하고, 동시에 한 가구당 매년 5원씩 내도록 하십시오”라고 요구했다.

 

촌장은 “당신들이 왜놈들과 싸우는데 우리 백성들도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건 압니다. 대한통군부의 군자금을 내겠습니다. 하지만 현금이 없는 가정은 어떻게 한답니까?”고 묻자 정창하는 “이렇게 하세요. 홍묘자에 작은 상점이 하나 있는데 주인이 서세명이란 사람으로 우리 독립군을 도와주고 잇지요. 돈이 없는 집은 우선 그 상점으로 찾아가 차용 증서를 써서 그곳에 놔두고 후에 돈이 생기면 그에게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이어 독립군 병사 한 명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일을 절대 소문내지 말라고 일러두시오. 만약 발설하는 사람이 있다면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겁니다”라고 말했다.

 

얘기가 끝나자, 촌장은 조금 형편이 나은 집으로 그들을 안내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잠을 잘 수 있게 해주었다.

 

저녁에 원봉과 어머니가 돌아오자 그들은 독립군이 왔다 간 사실을 말해 주었다. 세봉은 홍묘자에 볼일이 잇어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원봉은 집에 돈이 없으니 어찌해야 할 지 몰라 몹시 걱정했다.

 

이튿날 집에 돌아온 양세봉은 그 길로 마을에 머물고 있는 정창하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 집에는 남자가 셋 있으니 4원 50전에다 기부금 5원을 합하면 모두 9원 50전입니다. 하지만 지금 돈이 없으니 먼저 차용 증서를 쓰고 양곡을 판 후 서씨 상점에 가져다 주겠소.”

 

그러자 정창하도 흔쾌히 동의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독립군은 그 부근의 지리를 잘 아는 안내자를 부탁했다. 촌장은 양세봉에게 독립군의 길 안내를 부탁했고, 세봉은 그러겠노라 승낙했다.

 

양세봉은 독립군 병사들을 데리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환인현까지 안내했다. 저녁에는 정창하 등과 식사를 같이 했고 밤에도 함께 잠을 잤다. 세봉은 독립군의 생활이 아주 뜻있어 보였다. 그래서 통군부의 지역 대원이 되어 달라는 정창하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였다.

 

금구자에 돌아온 양세봉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한통군부의 주장을 선전하고 독립군을 도와 일할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독립군에 협조할 의향이 있는 마을 사람을 80명 가량 모을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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