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택의 작품 중 주진모 주연의 <사랑,2007>이란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역시 <통증>처럼 명절 때 개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목은 사랑인데 사랑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영화였다. 사랑을 하는 남자와 여자의 불운한 운명을 그리지만, 그 표현법은 80년대 신파영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 입장에서는 신파와 통속을 극한으로 몰고 가서 낡은 남성 판타지만 확인하고 돌아오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시간낭비 딱 그 수준이었다. 수동적인 여자와 보스의 여자를 탐하는 남자라는 진부한 설정은 영화 <친구>의 남성위주의 사회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곽경택의 초라한 단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그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다. 친구의 동어반복 딱 그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곽경택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그를 지지하는 이유는 그만의 묵직한 남성성과 신파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사랑을 혹은 남성성의 우위를 향해 치달리는 그의 영화는 분명 힘이 있다. 그가 보여주는 뚜렷한 장점의 매력을 잘 알기에 나도 이번에 또 극장을 찾아 <통증>을 보았다.
이번 영화 <통증>에는 사랑을 하는 이들의 심리변화에 적극 시간을 투자하는 곽경택을 만나볼 수 있다. 곽경택의 영화에서 사랑이란 남자가 큰일을 치루기 위해서는 피해야할 장애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큰 손실을 감내하고라도 피 흘려 지켜야 하는 비장한 것이었다. 이런 식이다 보니 여성의 감성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 수밖에 없는 게 곽경택의 영화였다. 헌데 <통증>에는 여성의 감성을 잘 돌보려는 그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차츰 정려원이 연기한 동현이라는 케릭터에 마음을 주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베드신은 놀랍고도 놀랍다. 360도 회전하며 로맨틱하게 빠져 들어가는 시퀀스라니. 달걀을 깨먹는 도순과 비빔밥을 먹는 동현의 달달한 대사와 클로즈업이라니. 이게 무슨 곽경택 영화야!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라면 이 예기치 않은 타이밍의 오그라짐을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야 하는 여자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남자 이야기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밀어붙이면서도 여성 케릭터에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얻어낸 달콤함의 매력은 강강강 더강으로 치닫던 곽경택 영화의 리듬에 강약강약의 아기자기함을 선물했다.
곽경택의 사랑이야기에 이렇게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이유는 강풀의 원안 덕분이다. 데뷔 직후 한 번도 남이 만든 이야기위에 연출을 하지 않았던 그가 이번에는 신파멜로의 제왕 강풀의 시나리오를 받아 들었다. 곽경택 특유의 폭력성과 마초성에 강풀이 만든 섬세한 감정표현이 삽입되면서 한층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는 두 사람의 감정이 악을 소탕하고, 남성성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게 된 것이다. 강풀은 특히 곽경택이 제일 취약했던 여성케릭터의 표현도 한층 능숙하게 해주었다. 개인적으로 두 배우의 연기도 장단을 잘 맞춰주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싫어하는 비호감 두 배우가 나오는 작품이라 이 작품이 꺼려졌었는데, <통증>은 배우궁합이 무척 잘 맞아떨어졌다. 이번 작품에서 권상우는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가장 어울리는 배역을 만났다. 그는 남성적인 강한 배역을 데뷔 이래 줄곧 맡아왔는데, 실망스런 모습만 보여줬다. 이번 작품은 혀 짧은 자해공갈단 역을 맡아 특유의 스타성으로 잘 소화했다. 정려원은 더욱 놀랍다.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곽경택이 만드는 마초세계에서 세기를 조절해야 할 중책을 맡았는데, 그녀가 맡은 동현은 다양한 표정연기로 사랑스럽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펑펑 울줄 아는 신파극과 로맨틱 코미디를 오갈 수 있는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배역 운이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잘 살릴 수 있는 감독이 곽경택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 아쉬운 소리를 좀 해야겠다. 영화를 본 누구나 느낄 수 있을 테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달콤한 대사들이 지나간 후에 둘 중 하나는 죽거나 거의 반신불수가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좋건 싫건 곽경택의 영화들을 모두 봐 온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감이 온다. 아무리 여성 케릭터의 비중이 올라가고, 상호 소통하는 연인의 관계가 아기자기해 졌다지만, 곽경택은 여전히 곽경택이다. 그가 풀어놓는 비극의 실마리들은 너무 뻔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극을 위한 준비를 해나간다. 난 영화 중반부터 생각했다. 아 제발 좀 해피엔딩 어떻게 안 되겠니... 굳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갈 필요가 있나... 곽경택은 비극의 카타르시스와 끝내 터져 나오는 신파의 힘을 믿는 감독이다. 그에게 어떤 시나리오를 가져다 줘도 그의 마무리는 장엄하고, 슬프고, 복장이 터지고, 위엄 있는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인위적 감정을 통해서만이 진심을 얻을 수 있다지만, 그 인위의 덩어리가 너무 커버리면 이야기에 힘이 딸린다. 이번 작품에도 행복의 정점을 찍고, 급격하게 비극의 소용돌이로 파고드는 주인공을 보면서 허탈한 맘을 감출 수 없었다. 곽경택의 <통증>이 가장 실패한 부분이 있다면 한 상 근사하게 차려놓고, 라스트 엔딩에서 한방에 엎어버린 데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비극 속에 임재범의 애절한 목소리가 빛나는 엔딩곡을 듣어 봤자 감동이 느껴질 턱이 없다. 그리고 도대체 왜 용산 철거 현장에 두 주인공을 마무리 시켰어야 했는지 그 이유도 한 번 묻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 영화 <친구>를 보면서 그가 구축한 남성중심의 세계에 고딩들이 푹 빠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 곽감독의 영화들은 친구2,3,4,5,6을 붙여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만큼 재탕 삼탕의 동어반복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통증은 통증1로 붙일 수 있다. 그것이 이번 곽경택의 영화에서 얻은 소득이다. 변화는 더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그가 곁눈질을 할 수도 있는 감독이라는 점은 다음 작품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 난 신파의 힘을 믿는 사람중에 하나다. 곽경택의 영화를 아쉬운 소리 해가면서도 계속 찾는 이유는 그가 진심을 다해 인물들의 사랑과 비극을 작품에 녹여내기 때문이다. 조금 더 기름칠을 하고,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좋은 시나리오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