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사랑, Incendies, 2010
비극은 인생이라는 건조대에 걸린 건어물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결코 거둬낼 수 없다. 말리고 말려 그 냄새가 다 사라졌다 싶다가도 어느새 코를 킁킁거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존재하는 제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완전히 잊혀 졌다고 믿었던 사실들도 마찬가지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았고, 비극은 멀지 않다. 역사에 대한 재검증은 쉬지 않고 일어나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달갑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법이라는데,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캐내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 역사의 먼지를 털어 내가 쟁취하는 앎은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당신의 가장 아픈 기억을 세세하게 끄집어내는 과정을 겪는다고 생각해보라. 난 중학교 2학년 때 끔찍하게 친구에게 맞은 적이 있는데, 이것을 완전히 사실대로 기억했다간 내 트라우마는 밤잠을 설치게 할 게 분명하다.
이 '비극에 대한 앎' 을 묻는 영화가 <그을린 사랑>이다. 레바논 내전을 모델로 극단적인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주고받는 폭력의 악순환이 만들어낸 비극을 다루고 있다. 무거운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완성도로 당신의 잠잠한 마음의 호수를 사대강 뒤집듯 난도질한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마치 소포클레스의 3대 비극을 짬뽕시켜 놓은 느낌을 받는데,(특히 지긋지긋한 오이디푸스는 여전히 끼어있다.) 그만큼 중동이라는 이질적인 공간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와 인간의 타락한 모습을 비추는 시선의 절절함이 이 영화를 신화적으로 보이게끔 한다. 중동이라는 공간은 우리의 삶과는 다른 곳처럼 느껴지는데, 캐나다 감독이 굳이 중동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선택했다는 데는 이런 낯선 곳에서 일어나는 역사가 우리의 삶에 침투했을 때의 극적인 감정변화를 포착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그을린>에서도 역시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저 먼 나라의 진실(역사)가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역사의 텍스트를 눈앞의 형형한 진실로 쟁취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극중 이론수학을 전공하는 잔느라는 인물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와 오빠의 행적을 찾아 나서는데, 그녀가 숨겨져 있던 진실에 접근하는 일 자체를 수학공식으로서 비유하려는 영화적 표현방법이 인상적이다. 잔느의 담당교수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오지. 영혼이 평화롭지 못하면 이론수학은 끝장이야.”라며 미지수를 모두 찾아내는 작업이 없이는 평화롭게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며 잔느를 이 공식의 소용돌이로 안내한다. 하지만 과연 미지수를 찾는다고 해서 평온할 수 있을까. 관객도 의문이고, 잔느도 마찬가지다. 미지수를 풀어냄으로 해서 또 다른 비극을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복잡한 명제를 수식을 푸는 것에 비유하다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레바논 내전은 핏줄과 종교의 싸움이다. 종교는 적과 동지를 명확하게 가르는 구분이 되고, 핏줄의 가치 따위는 안중에 없다. 타 종교의 남자를 사랑한 죄로 자신의 아이와 생이별하고, 그 아이는 세상에 대한 원망 속에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만든다.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산란하고, 어느새 종적을 감춘 듯 했던 분노가 다시 되살아나 잔존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존재가 과거의 축적 속에 이루어졌다는 당연한 논거는 그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어미니 역시 레바논을 떠나 캐나다에서 모든 걸 잊고 시작하고 싶었지만, 감춰두었던 과거는 다시 독사처럼 그녀의 발목을 물어버렸다. 감춰진 진실을 우연하게 마주한 후 그 충격으로 죽음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던 어머니는 이 비극을 끊고 싶었다. 그리고 고민한다. 무엇이 이 비극의 씨앗을 완전히 박멸할 수 있을지를.
이 영화가 지속적으로 얻고 싶었던 앎의 가치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명확하게 증명해내는 것이다. 과거를 모른척하고 마주하는 인생이란 그저 거짓된 껍데기를 보고 사는 것이다. 과거는 여전히 끈끈하게 당신을 역사와 연결시킨다. 그 속에서 이루어진 비극을 완전히 알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완전한 삶을 산다는 것. 그리고 앎을 통해 극복하지 못한 인생은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이 영화의 확고한 믿음이 마치 신화와 같았던 레바논 내전 속에 갈피를 못잡던 한 여자의 인생을 현실의 막 속으로 투영시키게 된다. 감정은 요동치고, 온몸이 떨려오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어쩌면 너무나 쉽게 사그라든다. 남은 자들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진실을 모두 알아버린 사람들의 얼굴이 아주 자세하게 클로즈업된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죽은 자의 편지 속에 담겨져 있다. “분노의 흐름을 끊는 약속”이다. 아주 무책임하게도 진실을 알아버린 인간의 상처는 보듬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아이들임에도 그저 꿋꿋하게 버텨주길 기도한다.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지 모른다.' '과거를 부정할지도 모른다.' '용서할 수 없다'는 가정은 용납되지 않는다. 1+1 =1이 되는 이 불가능한 수식의 증명은 오로지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끊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내 육신 하늘에 등을 보이고 죽지는 않겠노라. 과연 장대한 스케일로 종교와 수학 그리고 전쟁의 폭력과 비극의 씨앗을 사유하던 이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앉고 무덤속으로 들어간다. 앎의 대가를 받아들이고 가장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다. 조금만 참아주길. 그저 조금만 이해해주길. 이제 더 이상 분노하는 자 없길 기도하며 영화는 어둠을 드리운다. 분노의 끝을 본 우리들은 이 영화의 윤리적 태도에 끈끈한 지지를 보내며 극장 밖의 흐리멍텅한 빛을 바라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