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의 군사 지도자 연개소문에게 누이동생이 있었다.
중국 정부가 진행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가 한창 논란으로 떠올랐던 2003년~2006년 시기에 고구려사(高句麗史)에 관심을 두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주목하던 역사인물은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이 연개소문에 대해 김부식(金富軾)의『삼국사기(三國史記)』는 “연개소문은 흉포하고 무도한 인물이다. 연개소문이 전국을 호령하며 나라일을 제멋대로 하는데 말에 오르내릴때마다 항상 귀족이나 무장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을 삼았다”고 기록하여 그를 무자비한 독재자로 혹평하였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시초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통해 연개소문을 “우리 민족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극찬하였다.
연개소문은 642년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펼치는 영류태왕(榮留太王)에게 반기를 들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대막리지(大莫離支)라는 벼슬에 올라 고구려의 군사통수권과 외교권을 장악한 군인 출신의 재상이다. 그는 645년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수십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에 고구려의 모든 군대를 총지휘하여 전술과 전략을 감독했으며, 양만춘(梁萬春)의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로 패퇴하는 당군을 추격하여 요택(遼澤)에서 이세민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세민이 양만춘의 화살을 맞아 한쪽 눈을 잃게 되었다는 전설은 이 때에 생겨났다.
당나라는 655년과 659년 11월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쳐서 멸망시킨 이후에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했다. 하지만 백제 부흥군의 저항으로 신라는 군대를 돌릴 수 밖에 없었으며 고구려는 서북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의 공격을 물리쳤다. 당나라는 662년 음력 4월에 다시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며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번에는 연개소문이 직접 출전하여 사수전투(蛇水戰鬪)에서 방효태(龐孝泰)와 그의 아들 13명을 전사하게 하고 소정방(蘇定方)의 부대를 격퇴하여 20만의 당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처럼 당은 무려 4·5회에 걸쳐 국지전(局地戰) 혹은 전면전(全面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연개소문이 지키는 고구려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단지 수세적인 입장에서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정예군을 동원하여 지금의 베이징 지역까지 당나라의 영토를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왕으로 칭송받고 있는 태종 이세민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며 여당전쟁(麗唐戰爭)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끈 일세의 영걸이었다.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서 발견된 천남생묘지명(泉男生墓誌銘)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대인(東部大人)으로 대대로(大對盧)를 지낸 연태조(淵太祚)라고 하며『삼국사기』에는 아우인 연정토(淵淨土)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고구려의 군사요충지였던 옛 석성(石城) 소장루(梳壯樓)의 현판(縣板)과 비사성(卑沙城)의 비편(碑片), 건안성(建安城) 청석관(靑石關)의 비문(碑文)이 발굴됨으로써 연개소문에게 연정토 밑에 또 다른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글자가 대부분 닮아 없어지고, 남은 부분도 많이 훼손된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들 비문을 통해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淵秀英)이란 여무장(女武將)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들 금석문(金石文)에서 아직 훼손되지 않은 부분을 파악해보면 연수영은 당나라의 해군을 상대로 16회의 해상전투를 치르며 패배를 모르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의 신화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구당서(舊唐書)』는 이세민이 고구려를 향해 친정(親征)했을 때에, 장량(張亮)이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에 임명되어 당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으로서 4만 3천여명의 병사와 5백여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출발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장량의 당나라 수군이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전하는 문헌이 없다. 장량의 당나라 수군은 분명히 고구려의 영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육군에게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세민의 본군은 안시성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보급선마저 끊겨 악전고투를 하다가 끝내 퇴각했다. 그렇다면 장량의 함대는 분명히 고구려 수군에게 패배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제1차 여당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바다에 있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파견한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실패했던 이유는 바로 이순신(李舜臣)이 이끈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빼앗겨 보급선이 끊어진 데에 있었다. 제1차 여당전쟁 역시 장량 휘하의 당나라 수군이 고구려 수군에게 저지되어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세민의 본군은 부득이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이 전쟁에서 진정한 승리의 주역은 바로 고구려의 수군이었다.
당시 고구려의 수군 대장은 바로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인 연수영이었다. 당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이 여자가 대장으로 있는 고구려군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이 후세에 전해지면 그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으므로 중국의 사가들은 당 수군의 패배를 사서에 기록하지 않고 은폐하였다. 소위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것이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해 중국이 주변의 오랑캐들과 싸워 졌던 수치스러운 역사는 한사코 감추거나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서술 방법이었기에 연수영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것이다.
중국의 야사(野史)인『서곽잡록(西郭雜錄)』과『비망열기(備忘烈記)』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고 하는데, 이 책들은 현재 전하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먼저 여성으로서 해군 제독의 역할을 수행하며 전선(戰線)을 지휘하고 남자 장수 못지않은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던 연수영… 이제 그녀를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닌 역사적 실존인물로 부각시켜야 할 때가 이르렀다.
중국 정부가 이런 저런 역사공정을 통해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고 탈취하려는 이유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운동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에서 설득력이 높다. 중국이 범국가적 차원에서 고대사 왜곡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은 결국 소수민족들의 봉기로 중국이 다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나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처럼 분열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재의 중국 영토에 있었던 나라가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그 역사가 모두 중국사의 일부분이란 중국 역사학자들의 궤변은 역사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준 이하의 망발에 불과하다.
고구려(高句麗)만 두고 보자. 과연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던 지방정권’이었을까?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건국부터 서기 668년 망국까지 28대 임금 705년의 사직을 유지했다. 그 동안 중국 땅에는 후한(後漢)부터 당(唐)까지 무려 33개의 이른바 ‘황제국(皇帝國)’이 있었는데, 200년 이상 지탱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가장 오래 간 나라가 사직을 196년간 유지한 후한이요, 그 다음이 103년인 동진(東晉)이다.
심지어는 국왕이 아니라 ‘황제(皇帝)’가 1명뿐인 남북조시대의 동위(東魏)나, 겨우 7년만에 망한 후량(後梁) 같은 하루살이 제국도 수두룩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다는 삼국시대도 위(魏)·촉(蜀)·오(吳) 3국의 임금이 모두 11명에 60년밖에 가지 못했다. 또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도 20대 290년을 이어갔을 뿐이다. 당에 앞서 동진 이후 중국을 재통일하고 고구려를 치다가 망한 수(隨)도 겨우 3대 38년만에 망했다.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屬國)’으로 있던 705년 동안 중국에서는 33개 왕조의 흥망이 무성했으니,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본국(本國)’이 어찌 있단 말인가? 사실(史實)이 이러함에도 중국인들은 입만 열면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궤변에 망언을 계속하고 있으니 참으로 땃한 노릇이다. 중국의 부단한 역사왜곡과 우리 고대사 탈취 기도에 맞서는 길은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근래 들어 중국이 만리장성의 길이를 계속 늘이고 있는 것도 우리 나라의 고대사를 탈취하려는 역사공정의 연장이다. 그동안 만리장성은 하북성 진황도시의 산해관에서 감숙성 가욕관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런 통설을 뒤집고 만리장성 동단을 산해관이 아니라 압록강 하구인 요녕성 단동시의 호산성(虎山城)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호산성은 옛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중국은 호산성을 만리장성의 기점으로 만들기 위해 산성을 중국식으로 증축하고, 역사박물관을 신축하면서 기존의 고구려 시대 박작성 유적을 대거 훼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중국은 이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단동보다 훨씬 동쪽인 길림성 통화현에서 만리장성 유적을 발견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고구려의 초기 수도 졸본성과 국내성 코앞까지 만리장성이 늘어서 있었다는 황당무계한 헛소리다.
이뿐만이 아니다.『중국역사지도집』은 만리장성 동단을 한반도 내륙으로 그려놓았다. 또 웬만한 박물관 지도에도 만리장성 동단을 황해도로 그려놓고 있으니 이처럼 터무니없는 일도 없다. 중국이 이처럼 끊임없이 만리장성 동단을 늘이는 저의는 결국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의 영토였던 요서·요동·만주가 모두 중국의 고유 영토였고, 이 땅에 세워졌던 나라는 모두가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란 날조된 궤변과 망언을 강조하려는 데 있다. 중국의 우리 고대사 왜곡과 탈취 시도는 거의 편집증적이다. 고구려·발해사 왜곡도 모자라 이제는 고조선·부여사까지 중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고대문명 전체를 중국사의 일부로 둔갑시키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왜곡·날조의 밑바닥에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주변국은 모두 야만족이라는 오만방자한 중화사상과 역사패권주의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표출하는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에 대해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되겠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계속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길밖에는 없다. 영어교육에 기울이는 열성의 절반이라도 역사교육에 쏟아보라.
아직도 실증주의의 탈을 쓰고 일제식민사관과 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직 이병도사관(李丙燾史觀)만을 진리라 믿으며 여전히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이제 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매국사학자들이 강단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 황원갑 한국풍류사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