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돈암서원에서 내면을 돌아보다

꽃님이 |2011.10.03 19:07
조회 21 |추천 0
P {MARGIN-TOP: 2px; MARGIN-BOTTOM: 2px}

  


계백유적지에서 백제의 마지막 숨소리가 들린다. 개태사에서 고려시대의 서막이 열린다. 우리 역사 흐름에 빠질 수 없는 대소사가 논산처럼 빈번했던 곳이 더 있을까. 조선시대, 논산에서 일어난 흥망성쇠 위로 예학이라는 꽃이 핀다. 논산, 돈암서원에 가면 그 씨앗을 뿌린 주인공과 만날 수 있다.



 



[왼쪽]돈암서원 입구 홍살문, 이곳부터는 신분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한 왕조가 500년 이상 이어진 역사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중 조선의 유교는 500년을 지탱해준 대표적 기반이다” 돈암서원에 주재하는 해설사가 처음 알려준 내용이다. 이어서 유교가 조선 고유의 학문 예학으로 절정을 달한 곳이 논산이라고 설명한다.

서원, 무엇을 하는 곳일까? 해당 사림세력의 존속과 발전 그리고 후학양성을 위한 자치시설이다. 교육적인 측면에서 단순 비교하면 성균관은 나라에서 만든 국립대학, 향교는 지방대학, 서원은 사설학원 정도 되겠다. 서원은 선비가 주축으로 나서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학문을 다루는 당시 생활모습이 그대로 녹아있다. 건물과 추향제를 통해 옛 방식 그대로의 유교적 양식도 직접 볼 수 있다.

서원은 스승을 모시는 동시에 그의 교육철학을 후대까지 전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대부분 서원 위치는 스승의 연고지이다.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의 타계 3년 후 1634년(인조 12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창건됐다. 김장생의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해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 봉안, 제사공간을 만들고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췄다. 당시 서원 근처 ‘돈암’이라는 큰 바위에서 이름을 따왔다. 고종 임기에 홍수피해가 생겨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요즘 볼 수 있는 서원의 대부분은 대원군 서원철폐령(1871년) 뒤, 남은 것들이다. 그 중 돈암서원이 남은 이유는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 최고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원의 주변을 살펴보면 당시의 풍수지리, 음양오행을 고려한 위치 선정 기준을 알 수 있다. ‘입덕문’ 앞 연산천이 흐른다. 그 너머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두루 산세가 펼쳐져 있다. 산세의 왼쪽 끝, 태백에서 뻗은 차령산맥의 계룡산이 솟았다. 오른쪽 끝은 호남의 금강산으로 통하는 대둔산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산은 천호산이다. 예전에는 황산으로 불렸고 그 앞 둔덕 사이의 평야가 유명한 황산벌이다. 남쪽으로는 논산8경 중 하나인 탑정호가 있으며, 돈암서원의 서쪽은 야트막한 둔덕이 자리했다. 동쪽의 험준한 산세와 가까우면서 서쪽으로 퍼지는 평지의 시작점이 돈암서원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돈암서원은 전학후묘식 구조다. 전학후묘란, 경사진 곳에 서원 건물을 배치하는 전통적 형식으로 강당이 중심이며 그 뒤로 서당이 서는 기본 골격이다. 입덕문을 전면으로 강당과 그 뒤로 사당이 보인다. 초가을 햇빛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입덕문                                                        현종이 직접 하사한 현판
입덕문을 받치는 주춧돌이 눈길을 끈다. 3쌍의 주춧돌 중 첫 쌍은 사각형, 다음은 팔각형, 다음은 원형이다. 서원에서 학문을 닦아 모나지 않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라고 한다. ‘다듬어진 인격이 곧 아름다움이다’라는 유교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응도당 전면


응도당 옆면, 처마가 눈썹처럼 생겨 눈썹처마라고 불린다



[왼쪽]응도당 옆면 하부, 지면에 주춧돌을 세워 강당을 띄워 만들었다
[가운데]응도당 마루와 두꺼운 두 개의 대들보

 

[오른쪽]응도당 전면 상부, 봉황·용·코끼리가 조각된 익공과 익공 사이로 조선시대 특유의 무늬 연꽃이 조각됐다


입덕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특유의 분위기로 긴장하게 되는 건물이 있다. 응도당이다. 사람으로 치면 비범한 풍모, 위엄 있는 풍채다. 주춧돌, 기둥, 대들보, 지붕으로 이어지는 각 요소가 개별적으로 독특한 느낌을 전한다. 게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레 변한 목재의 인상적인 색감까지 더해져 한번 보면 잊을 수 없겠다.

돈암서원 건립 당시 서원 중심에는 응도당이 위치했다. 현재의 사당과 직각을 이룬 동향구조는 이전하면서 잡힌 배치다. 응도당은 별도의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3칸을 둘러 마루를 깔고, 뒤쪽은 쪽마루로 만들었다. 가까이 서보니 규모에 놀라고 천장과 지붕의 섬세한 모습에 두 번 놀란다. 기둥 위 이음새에 조각된 세 가지 동물이 눈에 띈다. 아래부터 봉황, 용, 코끼리를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응도당의 주춧돌 위 기둥엔 소금을 사용한 선조의 가공법이 사용돼 뒤틀림이 없고 썩지 않는다고 한다. 그 외에도 대들보, 처마 등이 고건축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소중한 자료로 활용된다.
 

 

장판각, 요즘으로 치면 인쇄소라고 할 수 있다. 김장생, 김집, 김계휘의 사계전서, 신독재 전서, 황강실기 등 문집과 왕실에서 하사한 벼루, 서적 등이 보관돼 있다. 우암 송시열은 죽기 직전, 장판각 내 목판 중 잘못된 글자가 고쳐졌는지 물어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왼쪽]장판각, 예학이 담긴 4천여 목판이 보관돼 있다. 


 


가운데 양성당, 양옆 동·서재는 유생이 생활하는 곳이다


현 돈암서원의 중심은 양성당이다. 김장생이 생전에 학문을 연구하던 강당이다. 서원 이건 당시, 대강당인 응도당을 옮길 수 없어, 양성당이 현 위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양성당 앞 원정비에는 돈암서원의 내력, 구조, 업적 등이 적혔다.

 

 


추향제가 진행되는 양성당 내부


추향제


양성당 뒤로 사당이 있다. 유교의 예가 더욱 강조된 예학 서원에 사당이 빠질 수 없다. 현재는 보수공사 중으로 그 모습을 살필 수 없다. 관계자에 의하면 올해까지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불어 추향제를 볼 수 있었다. 본래 사당 앞에서 진행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공사 중인 관계로 올해는 양성당에서 제례가 진행됐다.

 


[왼쪽]화려하지 않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와 예학의 향기로 가득하다
[오른쪽]천천히 주위를 걸으며 서원과 하늘의 어울림을 음미해보길 권한다


조선시대는 양반, 상민 등 계급이 나눠진 사회다. 그 중 선비가 자치적으로 조성한 서원임에도 분위기가 소박하고 요란한 치레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예학의 향기가 가득하다. 입덕문의 주춧돌처럼 내면을 다듬는 공간에 화려함은 도움이 되지 않았으리라. 문득 물질보다 정신을, 남보다 자신을 살피고 다듬는 것이 순서임을 잊고 지냈구나 싶다.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스마트관광팀 안정수 취재기자(ahn856@gmail.com)

 

 

Tip | 돈암서원 가는 방법



 * 서울 → 경부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IC → 연산 임리(24km)
 * 논산IC → 연무 → 1번국도 → 논산 → 돈암서원(20분 소요)
 * 서논산IC → 국도4번 → 부적면 → 국도1번 → 돈암서원(20분 소요)
 * 서대전IC → 국도4번 → 대태사역 → 국도1번 → 돈암서원(30분 소요)

 문화해설사 안내 : 10:00 ~16:00

   자세히보기 ▶ 

 


 

주변관광지


계백장군 유적지 

 

서기 660년 여름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5만 군사와 맞서 싸워 4번을 이겼으나 끝내 결사대와 장열히 최후를 맞은 계백이 묻힌 곳이다. 논산 4경으로 지정된 곳으로 계백 장군의 위패가 마련돼 제향이 이뤄지는 충장사와 그 옆으로 계백 장군 묘가 함께 있다. 그 주위로 백제군사박물관이 조성돼 백제문화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코스로 자리잡았다.


자세히보기 ▶ 


백제군사박물관 

 

백제군사박물관은 백제시대 유물은 물론 그 시대의 군사적 모습을 전시하는 등 백제의 군사 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민속놀이, 활쏘기 등 체험 행사를 진행, 생태학습장은 야생화, 나무, 곤충 등으로 숲 환경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조성했다.



자세히보기 ▶ 


개태사 

 

 

개태사는 후삼국을 통일한 후 태조 왕건이 지은 국찰이다. 현재는 옛터가 남았다. 마을 일대의 넓은 절터에 2개의 대형 석조와 건물지의 주초석, 석탑의 부재, 계산석 등 많은 석조 부재를 볼 수 있다. 승려 천여 명이 머물던 대규모의 사찰로, 당시 사용하던 가마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자세히보기 ▶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