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의 침공과 서희(徐熙)의 불전승첩(不戰勝捷)
고려는 성립 초부터 고구려 계승의지를 내세웠으며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서경(西京)을 중시하고 청천강 이북으로 세력 확대를 시도하여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뻗치던 거란(契丹)과 충돌하게 되었다.
거란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당나라 말의 혼란기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지도자의 등장으로 각 부족이 통일되면서 큰 세력을 이루었다. 거란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지역을 장악한 뒤, 947년에는 요(遼)를 세우고 중원 대륙을 장악하기 위해 송(宋)과 대립하였다.
고려는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을 처음부터 적대시했고 나중에 있을지도 모르는 거란의 침공에 대비해왔다. 요나라는 송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배후에 있는 견제세력을 없애기 위해 먼저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西女眞)을 굴복시키고 이어 발해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을 멸망시킨 후 993년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총지휘하는 80만 대군을 남하시켜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려 제6대 황제인 성종(成宗)은 내사시랑 서희(徐熙)를 중군사, 시중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북계(北界)로 나가 적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요장(遼將) 소손녕(蕭遜寧)은 봉산군(蓬山郡)을 점령한 이후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고려 황제에게 사자(使者)를 보내 항복하지 않으면 고려의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요나라에 떼어주고 화의를 맺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했는데, 요나라 군사들의 침공 목적이 영토 확장에 있지 않다고 판단한 서희와 이지백(李知白)이 할지론에 반대하면서 일단 요군(遼軍) 측과 담판을 벌여 그들의 의도를 알아내고 나서 항복을 하든지, 끝까지 싸우든지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손녕은 자신의 항복 요구에 고려 조정에서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자 군사를 몰아 청천강 남쪽의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했으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의 침착한 수성전(守城戰)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서희(徐熙)는 단신(單身)으로 적진에 들어가 요나라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외교적 협상을 벌였다. 소손녕이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며,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가 소유했다. 그런데 너희가 침식(侵蝕)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宋)과 사대(事大)하고 있어 우리가 이를 토벌하러 온 것이다. 지금 땅을 떼어 바치고 조공을 한다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자, 서희는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국호가 고려이며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우리 수도의 하나다. 만약 땅의 경계를 말하자면 요(遼)의 동경(東京)도 우리의 영토인데 어떻게 영토를 침식했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면서 "압록강 내외 역시 우리의 영토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몰래 들어와 살면서 교활하게 교통로를 막고 있기 때문에 육로로 통행하는 것이 해로로 통행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실정이다. 요나라가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면 성과 보루를 쌓아 요나라와 수교(修交)할 것이다."라고 요나라 측이 만족할만한 대안을 제시했다.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군을 철수시켰고, 고려는 요나라를 적대하지 않고 송나라와의 선린관계를 끊겠다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江東) 6주(州)를 확보하게 되었다. 요나라는 송나라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1004년에 전연(全淵)의 맹약(盟約)을 체결하여 한족(漢族) 왕조인 송나라를 조공국(朝貢國)으로 전락시켰다.
● 양규(楊規)의 교란작전(攪亂作戰)과 구주대첩(龜州大捷)
고려가 요나라와 화친한 뒤에도 비공식적으로 송(宋)과 계속 교류하고 서희가 획득한 강동 6주(興化鎭·龍州·通州·鐵州·龜州·郭州)를 군사적 거점으로 삼는데 불만을 품고 있던 요(遼)는 강조(康兆)가 정권을 엿보던 김치양(金致陽)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穆宗)을 폐위시킨 뒤 현종(顯宗)을 옹립하는 정변(政變)을 일으키자 이를 구실 삼아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번에는 1010년에 요황(遼皇) 성종(聖宗)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는데, 이수화(李守和), 양규(楊規) 등이 요군의 맹렬한 공격을 물리치며 흥화진을 굳게 지키자 성종은 흥화진을 그대로 둔 채 통주로 진격하여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의 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강조는 초전(初戰)에서 미리 준비한 검거(劍車)로 요나라의 기병부대를 격파하며 승세(勝勢)를 탔지만, 그 뒤 자만에 빠져 적군을 업신여기고 대비를 소흘히 하다가 야습(夜襲)을 받고 대패, 적의 포로가 되어 성종의 귀부(歸附) 제의를 거절하고 처형당했다.
이후 요군(遼軍)은 곽주를 점령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청천강 유역을 장악하고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무너뜨린 다음, 서경으로 쳐들어갔으나 강민첨(姜民瞻), 조원(趙元)의 완강한 저항에 막혔다. 이런 가운데, 흥화진(興化鎭)을 사수하고 있던 양규가 흩어진 군사 1천여명을 모아 곽주(郭州)를 공격, 요군 6천여명을 살상하고 성 안에 있던 백성 7천여명을 구출하여 통주로 이동하게 했다.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후방의 보급로가 막히고 고려군의 끈질긴 유격전(遊擊戰)으로 군사들이 지쳐 피로하게 되자 개경(開京)을 함락시켜 불리한 형세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이때 현종은 나주로 피하고 하공진(河拱辰)과 고영기(高英起)를 요군 진영에 보내 휴전교섭(休戰交涉)을 벌이게 했다. 요나라는 현종이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고 입조(入朝)한다는 조건으로 고려와 화약(和約)을 맺고 개경을 점령한지 10일만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요군이 서둘러 물러난 까닭은 고려군이 퇴로를 차단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규(楊規)는 무로대(無老代)에서 돌아가는 요군을 불의에 습격하여 적병 2천여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가던 민간인 3천여명을 구해냈다. 그는 다시 이수(梨樹)에서 접전을 벌이고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적병 2천 5백여명을 참살하고 여리참(余里站)에서 적병 1천여명을 무찔렀으며 애전(艾田)에서는 요군의 선봉부대를 궤멸시켰다. 양규의 분전(奮戰)은 요(遼)를 동북아시아 최강국으로 발전시킨 뛰어난 군주 성종(聖宗)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그러나 양규는 요군 대부대의 포위 공격으로 구주별장 김숙흥(金叔興)과 함께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곳곳에서 고려군의 요격을 받아 많은 병력과 무기를 잃은 요나라의 황제 성종은 압록강을 건너가던 중에 진사호부낭중 정성(鄭成)의 추격과 기습으로 다시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 후 요나라는 고려 황제의 입조와 강동 6주 반환을 즐기차게 요구했지만 고려 측이 이를 거부하자 수차례 소규모 침입을 시도하다가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제3차 요여전쟁(遼麗戰爭)이 발발한 것이다. 이에 고려 제8대 황제인 현종(顯宗)은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로,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영주(寧州)로 나가 적군을 막도록 했다.
강감찬은 흥화진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수공전술(水攻戰術)로 하천을 건너는 요군(遼軍)을 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흥화진전투(興化鎭戰鬪)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그러자 부원수 강민첨이 뒤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의 내구산(來口山)에서 요군을 격파하였고,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하해온 요군을 대동강 근방에서 다시 한번 섬멸하였다.
이렇듯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정월에 그는 자신의 직할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1백여리 떨어진 신은현(新恩縣)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이 거느린 고려의 군사 1만여명이 개경을 방비하고 있었으며, 소배압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개경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부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막상 개경 밖에 도착한 소배압의 군사들은 탈진한 상태에서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퇴군(退軍)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요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강감찬은 곳곳에 병력을 매복시켜 적군을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구주(龜州)에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의 주력부대가 되돌아가던 소배압의 요나라 군사들을 가로막고 대접전(大接戰)을 벌였다. 전투는 처음에 양군 진영에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형세로 전개되었지만 김종현의 응원군이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배압(蕭排押)은 병력을 수습하여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맹렬히 추격하여 요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고려사(高麗史) 강감찬전(姜邯贊傳)은 이 전투에서 패배한 요나라 군사 가운데 간신히 살아 돌아간 자가 적장 소배압을 비롯해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우리 민족의 역사상 길이 빛날 대승첩(大勝捷)이었다.
한(漢), 당(唐)에 이어 중화문명(中華文明)의 명맥을 이을 천자국(天子國)임을 자처하던 송(宋)이 요(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해마다 수십만 필의 비단과 은을 바치는 굴욕적인 전연의 맹약을 통해 평화를 구걸해 얻은 것과는 달리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요여전쟁(遼麗戰爭)에서 승리하여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고려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였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요나라는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서서히 약화되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021년에 만주지역의 철리국(哲利國)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청하는 표를 올렸고, 탐라국(耽羅國)과 유구국(琉球國), 흑수말갈(黑水靺鞨) 등도 고려에 조공사절을 보냈다. 그리고 송나라는 동양 최고의 군사강국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당당히 승리한 고려를 자신들과 대등한 황제국(皇帝國)으로 인정하게 된다. 송(宋), 요(遼), 고려 3개국 가운데 가장 국력이 약했던 나라는 고려였지만 이제 가장 발언권이 강한 나라로 바뀐 것이다.
고려가 세차례에 걸친 요나라와의 치열한 전쟁 끝에 지켜낸 압록강 유역은 그후 1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영역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원나라가 등장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자는 고려인의 희망은 어쩔 수 없이 멈추어지고 말았지만 고구려의 계승문제에서부터 시작해 27년간 지속되었던 요여전쟁(遼麗戰爭)에서의 승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저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고려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주권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 별무반(別武班) 창설과 여진(女眞) 정벌.
요(遼)의 침략을 물리치고 평화가 수립될 무렵, 새로이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한 세력이 여진족(女眞族)이었는데, 이들은 사국시대(四國時代)와 남북극시대(南北極時代)에는 읍루(揖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가 발해 멸망 후부터 여진이라 불리게 된 종족이다.
일찍이 여진(女眞)은 발해의 지배 밑에 있다가 발해가 망한 후에 고려와 요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겨왔다. 특히 문화 선진국인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고, 고려를 통하여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이들은 고려 조정에 말, 모피 등을 바치고 고려로부터 식량, 포목, 농기구, 병장기 등을 받아갔는데 이들 중에는 고려에 귀화해오거나 투항해 오는 자들이 많았다. 고려는 이들에게 가옥과 토지를 주어 생활근거를 마련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작위나 직계를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처럼 회유정책(懷柔政策)을 쓰는 한편 여진족을 야만인이라 하여 무력강경책(武力强勁策)도 병행하였다.
그러나 북만주의 완안부(完顔部)에서 추장(酋長)인 오아속(烏雅束)에 의한 여진족 통합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정세가 급변하였다. 통합운동의 여파는 고려에 복속하고 있는 여진족에게까지 미처 고려와도 험악한 관계가 되어 몇차례의 군사적인 충돌까지 있었다. 병력의 대부분이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는 고려군이 기병부대가 주 병력인 여진군(女眞軍)과의 싸움에 번번이 패배하게 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추밀원사(樞密院使) 윤관(尹瓘)의 건의로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항마군(降魔軍) 등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군사조직을 만들었다. 신기군과 신보군은 각기 귀족과 양민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병과 보병이었고, 항마군은 승려들로 조직된 의용군이었다. 고려에서는 별무반에 입대한 수십만의 군병(軍兵)을 훈련시켜 대규모 여진정벌계획을 수립하였다.
1107년 윤10월에 고려 조정에서는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 경비군관의 보고에 따라 선제공격을 결정하고 윤관(尹瓘)을 상원수,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여진 정벌을 단행했다. 윤관이 총지휘하는 정벌군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넘어 여진족의 본거지인 오늘의 연변(延邊)까지 진격하였으며, 1백여개가 넘는 여진의 촌락을 격파하고 1만여명이 넘는 여진족을 참살하거나 포로로 잡은 뒤 점령지역에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險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 등으로 추정되는 9성(城)을 쌓고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 9성은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반환 요청, 그리고 윤관의 정치적 입지의 약화 및 9성 유지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2년만에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그 후 여진의 세력은 날로 팽창하여 아골타(阿骨打)의 등장으로 금(金)을 건국하고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 송(宋)을 양자강(揚子江) 이남으로 쫓아냈다. 금나라의 초대 황제인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는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의 6대 자손이라는 사실이 금사(金史)에 기록돼 있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아골타가 신라 왕족의 성씨에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고 전한다. 훗날 1616년에 흥경(興京)에서 후금(後金)을 건국하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지도자 누르하치[奴爾哈齊]는 자신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정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조상인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청(淸)의 왕성(王姓)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금나라는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며 고려에 대하여 형제국의 관계를 요구하고 더 나아가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미개한 여진(女眞)이 세운 금나라에 대하여 사대(事大)의 예(禮)를 할 수 없다 하여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인종(仁宗) 때의 권신인 이자겸(李資謙)이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대외적인 평화관계의 유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금의 요구를 승낙하도록 했다. 이로 말미암아 금나라와의 군사적인 충돌은 없었으나 사실상 태조(太祖) 왕건(王建) 때부터 갈망하던 고려의 북진정책은 한풀 꺾이고 오히려 정권의 허약성만 드러내고 말았다.
한편, 고려는 북방민족과의 대립관계와는 대도적으로 송(宋)과는 비교적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요(遼)와의 전쟁 이후로는 주로 문화적, 경제적 교류관계에 그치게 되었다. 송나라는 요나라 및 금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정치적 입장을 내세워 중립을 고수하였다. 때문에 한때 송과 외교단절사태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문화와 경제부문에서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고려는 사신이나 상인들을 통한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통해 금, 은, 구리, 인삼, 잣 등의 원료품과 종이, 붓, 먹, 부채 등 문방과 사치품을 수출하고, 비단, 자기, 서적 향료, 악기 등 귀족들의 수요품을 수입하여 고려 귀족문화의 형성과 세련화를 꾀하였다. 가령 송판본(宋板本)은 고려 목판인쇄의 발달에, 송자(宋磁)와 고려청자(高麗靑姿)는 서로 그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청자는 서기 7세기 내지 10세기에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했으며 상감청자를 녹청자와 양길청자와 함께 발전시키고 유약 등을 연구하여 서기 12세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는 또 송과 교류하고 있던 대식국(大食國)과도 교류하게 되어, 아라비아 지역의 상선들이 개경의 해상문호인 예성항(禮成港)에 출입하면서 수은, 향료, 약재 등이 수입되었고, 당시의 예성항은 국제적인 무역항구로 번창하였다. 또 이를 계기로 고려가 세계에 '코리아(Kore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여명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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