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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22.고려의 정치와 사회

개마기사단 |2011.10.05 23:06
조회 102 |추천 0

● 중앙집권제 확립

고려의 정치제도는 광종(光宗)의 과단성 있는 개혁 이후 성종(成宗)대에 와서 중앙집권적이며 귀족적인 지배체제로 확립되었다. 중앙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제도를 참작한 정치기구를 마련하고 지방행정조직을 개편하였으며, 중앙과 지방에 군사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중앙통제적인 집권체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건국 초기 고려의 정치형태는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답습한 이른바 호족연합정권체제(豪族聯合政權體制)였으나 성종(成宗)대에 이르러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제도를 본받아 3성(省)6부(部)제와 중추원(中樞院), 3사(司) 등을 설치하고, 또한 고려 실정에 맞게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을 설치함으로써 고려 말기의 독특한 정치체제를 마련하였다.

3성은 국가정치기구의 중심으로서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尙書省)을 말한다. 3성의 재상을 재신(再臣)이라 하여 중추원(中樞院)의 추신(樞臣)과 합하여 재추(再樞)라 하였는데 이들 재, 추신은 의정을 맡는 동시에 도병마사와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에 모여 국방과 외교 등 국가의 중요 정책을 의결하였다. 그러나 행정의 기본적 기수는 상서(尙書) 6부로서 6부(使, 兵, 戶, 刑, 禮, 工部)는 모든 행정업무를 분담하여 아래로 백사(百司)를 통괄하고 위로는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중심기관이었다.

고려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과 함께 지방에 12목(牧)을 설치하는 등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방에는 호족들의 독자적인 세력이 엄존하고 있어서 중앙에서 외관(外官)을 파견하지 못하고, 다만 조세를 징수하는 금유(今有)와 징수된 조세를 중앙으로 호송하는 전운사(轉運使)를 전국에 패견하거나, 군사적 요지(四京, 安東, 登州)에 군사권을 가진 외관을 설치하여 지방호족들을 간접 통치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982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고려의 지방제도가 정비되었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성종(成宗) 때부터 목종(穆宗)을 거쳐 현종(顯宗)대에 확립되었는데, 1018년에 4도호(都護),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이 설치됨으로써 고려의 지방제도는 완성되었다.

중앙정부는 외관이 있는 주(州), 부(府), 군(郡), 현(縣)과 바로 명령을 하달하는 직편(直翩)관계에 있었으며, 그 결과 주현을 통해 지방을 통치하였는데, 주목(州牧)인 계수관(界首官)은 다만 공물의 진상이나 죄수의 감금 등 몇몇 한정된 기능에 국한하여 중앙기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어서 중앙권력이 지방에 미치는 힘이 약했다.

중기 이후에도 주목제(主牧制)에 대신하여 안찰사제(按察使制)가 중간기구로 등장하였으나 외관이 없는 속현(屬縣)은 여전히 그 옆의 주현을 통하여 간접지배를 받았다. 이는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에 미치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전국 각지에 신라 이래 존재하였던 천민집단의 특수 행정구역인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다.

고려는 후삼국의 분열대립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던 군사조직을 건국 초부터 북방민족과의 군사적 충돌로 인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정비하였다. 따라서 고려는 건국 직후에 지방호족들이 거느리던 사병(私兵)을 해체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중앙에 2군(軍) 6위(衛)와 지방에 주현군(州縣軍)을 설치하여 군사조직도 중앙집권화 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자전자수(自戰自守)를 할 수 있는 자위국방군체제를 확립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의 북방정책이 추진되었다. 중앙의 군사조직은 2군 6위제는 성종과 현종 때에 완성되었는데, 6위는 좌우위(左右衛)·신호위(神虎衛)·흥위위(興威衛)·금오위(金吾衛)·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를 말하며, 그 핵은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였다. 이들 3위는 수도 개경의 수비와 아울러 변방에 대한 방위지원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금오위는 경찰의 임무를, 친우위는 의장(儀丈)을, 감문위는 궁성 안팎의 수위(守衛)를 담당하였다. 2군은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을 말하는데 6위보다 우위에 있었다.

2군 6위에는 각기 정, 부 지휘관으로 상, 대장군이 존재하여 이들이 합좌기구인 중방(重房)에 모여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중방의 권력은 문신(文臣)들의 도당(都堂)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중앙정부의 통제하에 지방에 편성된 주현군은 도(道)와 계(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계는 국경지대의 군사지역으로서 행정단위인 진(鎭)마다 초군(秒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을 중심으로 한 정규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도의 주현군은 보승(保勝), 정용(精勇), 일품군(一品軍)으로 구성되었는데 보승군과 정용군은 치안, 방위의 역을 부담하였고, 일품군은 노동부대로서 공역에 동원되었다.

● 고려의 토지제도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와 경제는 항상 서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상호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제의 기초는 땅, 즉 토지였다.

고려 초기에 호족들이 지방에서 할거할 수 있었던 것은 각기 독자적인 군사력과 함께 경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조와 역대 황제는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정치제도의 정비와 함께 당시의 경제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던 기본적 생산형태인 토지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즉 고려왕조는 호족의 사병을 해체하고 전시과체제(田柴科體制)의 토지제도를 도입하여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함으로써, 명실공히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고려의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는 서기 940년 역분전(役分田)을 시작으로 975년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 997년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 1033년 한인전시과(閑人田柴科)를 거쳐 1076년에 경정전시과(硬定田柴科)로 완성되었다. 경정전시과는 모든 관리를 18등급으로 나누어 농지[田]와 임야[柴]를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즉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 문하시중(門下侍中) 등 최고위 관리들에게는 1과로서 전(田) 100결(結)과 시(柴) 50결을, 한인(閑人)과 잡류(雜類) 등에게는 18과로 전 17결을 주었다. 전시과체제하에서 현직관리의 생활보장책으로 지급되는 토지는 그의 사후 즉시 국가에 반납되었고, 토지지급의 실제내용은 경영, 관리와 관계없는 수조권(收租權)의 지급에 불과하여, 급전도감(給田都監)에서 그 지급과 환수업무를 관장하였다. 이에 비하여 군인이 지급받는 토지는 직무를 기준으로 분급되어 60세가 되면 적자(嫡子) 또는 적손(嫡孫)에게 직무와 함께 세습되었다.

전시과 이외에 중요한 것은 공음전(功蔭田)이었다. 이는 5품 이상의 고관에게 일정하게 주어져서 자손에게 세습하게 하였던 토지인데 이렇게 5품 이상 관리들에게 공음전을 지급하여 세습을 허락한 것은 문벌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1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무시험으로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음서제(蔭敍制)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고려가 귀족사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음전 이외에 왕실에 지급되는 내장전(內莊田), 사원에 지급되는 사원전(寺院田), 중앙 및 지방관청에 지급되는 공해전(公解田) 등이 있었고, 전국에 산재한 민전(民田)이 있었다.

토지소유에 대해서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있어 토지국유론이 있기도 했지만 민전은 조상 대대로 물려오는 일반 농민의 토지로서 사살상 매매, 증여, 상속 등이 자유로운 사적 소유지였다. 다만 일반농민은 조세 부담의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국고수조지(國庫收租地)였을 뿐이었다. 토지에는 국유토지 외에 국가가 임의로 처분할 수 없는 토지도 있으므로 토지국유는 왕토사상에 따른 하나의 의제(擬制)였을뿐 고려의 현실적인 토지소유관계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 산업생산과 무역

고려시대 생산활동의 주류는 농업이었고 기타 산업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다만 벼농사에 있어 종전에는 부종법(付種法)이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모판에서 모를 길러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移秧法)이 시작됐다고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가 언급한 것으로 보아 벼의 수확이 많이 늘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족사회가 형성되면서 귀족들의 사치생활을 위한 수요가 늘어나 수공업과 상업이 어느 정도 발달하였다.

수공업의 중심이 된 것은 관청수공업(官廳手工業)이었다. 고려의 관청수공업은 조정, 황실, 귀족의 수요에 따라 분류되고, 여기에 각종 공장(工匠)이 전속되었다. 이때의 관청수공업은 주로 무기와 사치품을 생산하였는데, 이는 빈번한 전쟁과 귀족들의 사치생활 때문이었다.

공장들은 도시에서 주로 주문생산에 종사하면서 일정 기간 관청수공업장에 동원되었다. 관청수공업장은 규모가 매우 크고 기술수준이 높은 수공업장이었는데, 중앙은 물론 지방관청에서도 병장기(兵仗器)와 관수품(官需品)을 생산하였으므로 지방 공장(工匠)도 동원하였다.

농촌사회에도 전문적 수공업자인 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농촌수공업의 중심은 역시 가내수공업이어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의류품과 관에 납부하기 위하 포(布) 등을 생산했다.

소(所)에서는 거주민이 집단적으로 수공업에 종사하여 상공품 및 별공품을 관에 납부하였는데 각 소에는 특유의 생산물이 있어서 그에 따라 명명되기도 했다(예컨대 金所, 銀所, 瓦所, 鹽所 등). 이밖에 불교가 발달한 고려시대에는 절을 중심으로 한 사원수공업(寺院手工業)이 발달하여 포, 기와, 소금, 술 등을 생산하였다. 사원수공업은 처음에 자체내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운영되었지만 차츰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민간에도 조달하였다.

고려는 무소유를 이상으로 하는 불교사회였으며 자급자족하였고 경제력도 영세하였으므로 상업은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관청의 수요를 조달하고 황실과 귀족의 생활용품을 공급하기 위한 시전상업(市癲商業)은 활기를 띠었다. 특히 수도인 개경에는 대규모 시전이 세워져 어용상업의 역할을 담당하여 뒷날 유명한 '개성상인(開城商人)'의 뿌리가 됐으며 그밖에 서경에도 시전상업이 발달하였다.

한편 지방상업은 비상설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농촌지방의 일정한 교통 중심지에 시장이 서고 주변의 1일 왕복거리에 있는 농민이 모여 물품을 교환하였는데 교환의 매개체는 주로 포물(布物)이었으며, 은병(銀甁)이 유통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의 예성항(禮成港)을 통한 송, 일본 및 대식국(大食國) 등과의 무역이 활발하였는데, 이것은 황실 및 귀족층의 수요품을 공급하기 위해서였고 특히 송나라 상인들이 고려에 가져오는 각종 비단, 자기, 약재, 의대, 악기 등은 대부분이 고려 귀족들의 생활용품을 충당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송나라 상인들은 중국의 생산품만을 고려에 수출하는 것이 아니라 서남아시아 지역의 생산품을 중개무역하기도 하였다. 요, 금과의 교역도 활발하지는 않았으나 전개되었다.

● 과거제도와 교육제도

고려의 관리등용은 주로 과거시험(科擧試驗)을 통하거나 음서제도(陰敍制度)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과거제(科擧制)가 처음 도입된 것은 준풍(峻豊) 9년이었는데, 그 목적은 당시 호족 출신의 개국공신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과거시험은 제술업(製述業), 명경업(明經業), 잡업(雜業)의 셋으로 나뉘었는데, 제술업은 시(詩), 부(賦), 송(頌), 책(策) 등의 문학으로, 명경업은 서(書), 역(易), 시(詩), 춘추(春秋) 등의 유교 경전으로 시험하였다. 이 양자는 모두 문신(文臣)을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특히 제술업이 중요시되었다. 이에 비해 잡업은 명법업(明法業), 명산업(明算業), 의업(醫業), 주금업(呪襟業), 지리업(地理業) 등 기술관 등용을 위한 시험이었는데 제술업이나 명경업에 비해 그 격이 떨어졌다. 이외에 승려들을 위한 승과(僧科)도 마련되었고 무과(武科)는 공양왕(恭讓王) 재위기에 비로소 설치되었다.

과거(科擧)의 응시자격은 양인(良人)에 한하였고, 천민(賤民)이나 승려(僧侶)의 자식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시되던 제술업의 경우에는 양인도 제외되고 일정한 신분층 이상에게만 그 자격이 주어져서 고려 사회가 귀족 중심의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과거시험은 3단계의 절차로 시행되었는데 향시(鄕試)와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거쳐 본시험인 동당감시(東堂監試)가 치뤄져 인재가 등용되었다. 과거의 시험관은 지공거(知貢擧)라 불렸는데, 지공거와 급제자(及第者)는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관계를 맺어 그 예(禮)가 부자(父子)와 같았다. 그 관계는 일생동안 계속되었으며 출세에도 큰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음서(陰敍)라 하였다. 즉 가문에 기준을 두어 7품 이상 고급 관리의 자제 중 1명에게 무시험으로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특례를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고려 사회는 귀족들의 강력한 뒷받침 위에 형성되었다.

이처럼 고려의 과거제도가 관리등용제도였으므로 자연히 교육제도는 과거시험을 위한 관리양성에 치중되었다.

학교는 이미 태조(太祖) 때부터 개경(開京)과 서경(西京)에 세워져 있었고, 성종(成宗) 재위 11년에 이르러 일종의 종합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설치되어 교육제도의 기반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국자감은 국자학(國子學)·태학(大學)·사문학(四文學) 등의 유학부 외에 서학(西學)·산학(算學)·율학(律學) 등의 잡학부가 추가되어 다양한 전문분야로 나뉘었고, 인종(仁宗) 때에는 경사(京師) 6학(學)으로 갖추어졌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 이른바 유학부 단과대학에서는 역(易), 시(試), 서(書) 예(禮), 춘추(春秋)와 효경(孝經), 논어(論語)를 위주로 하여 시무책(時務策), 산학(算學)을 아울러 가르쳤으며, 그 입학은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제, 태학은 7품 이상, 그리고 사문학은 7품 이상의 자제에 한해 허용하였다. 율학, 서학, 산학 등 이른바 기술대학부 단과대학에서는 해당 실무를 주로 가르쳤는데 8품 이하의 자제 및 서인(庶人)이 입학하였다.

성종 때까지 지방교육기관은 정비되지 않았으나 성종은 지방의 자제들을 상경시켜 공부하도록 하였고, 후에는 경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博士) 등을 지방에 파견하여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다가 인종 때에 경사 6학이 정비되면서 지방에도 향학(鄕學)을 세워 지방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한편 국자감을 중심으로 한 관학은 관학자의 자질 부족과 설비확충 미비 등으로 다소 침체되었다. 따라서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 관학에 대한 사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리던 최충(崔沖)이 세운 구재학당(九齋學堂)이 그 시초였다. 당시의 유명한 사학은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외에 홍문공도(弘文公徒), 광헌공도(匡憲公徒), 남산도(南山徒), 서원도(西園徒) 등 11도가 있어 문헌공도와 함께 12공도라 하였다. 12공도의 창설자는 대부분 전직고관이거나 당대의 대학자로서 과거시험의 지공거인 경우가 많았다. 사학이 발달하면서 당시의 귀족 자제들은 관학인 국자감보다 사학은 12도로 몰려들었고 이로부터 학벌(學閥)이라는 새로운 파벌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사학이 발달하게 되자 고려의 황제는 관학진흥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예종(睿宗) 재위 4년(서기 1109년)에 여택재(麗澤齋)·대빙재(待聘齋)·경덕재(經德齋)·구인재(求仁齋)·복응재(服膺齋)·양정재(養正齋)·강예재(講藝齋) 등 7재를 두었고, 예종 재위 14년에는 그 재정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장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궁내에 청연각(淸嚥閣)과 보문각(寶文閣) 같은 학문연구소를 두어 도서수집과 경문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인종도 예종의 뜻을 이어 경사 6학과 향학의 제도를 세워 고려의 관학기관을 정비하였다. 이를 통하여 김인존(金仁存), 김부식(金富軾), 윤언이(尹彦頤), 정지상(鄭知常) 등 대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사회신분제도

고려는 신분사회로서 신분이 모든 사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기준이었고, 개인의 능력보다도 그 신분과 가문이 더 중요시되는 계급사회였다. 따라서 귀족, 양인, 천민 등의 신분질서가 엄격히 구분되고 또한 유지되었다.

고려의 최고 신분계층은 귀족이었다. 귀족은 자동적으로 정부의 요직에 오르고, 이에 상응하는 경제력을 소유하며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이들 귀족은 고려 초기 호족세력에 그 뿌리가 있었는데, 역대 왕조의 중앙집권화정책에 의해 중앙관료가 되어 내려오면서 특권신분으로 고정되엇다. 이들 귀족은 문벌과 가문을 중요시하고 또한 보존하기 위하여 그들 상호간에 혼인관계를 맺었다. 일반적으로 혼인은 엄격한 일부일처제로 여성이 존중받았으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귀족들은 혼인을 통해 지위상승을 노렸고 특히 황실과의 통혼을 열망하여 자신들의 문벌을 높이고 그에 수반되는 권력과 지위를 얻으려 하였다. 이렇게 왕실의 외척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던 대표적인 귀족가문이 안산(安山) 김씨(金氏)와 경원(慶源) 이씨(李氏)였다.

고려시대에도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이 양반(兩班)을 구성하였다. 문반과 무반은 관제편성상 동열이나 실제로는 커다란 차별이 있어서 문반이 우대되고 무반은 천대받았다. 고려 전기의 귀족은 모두 문반이었다.

지배계층의 영역에 들면서도 실제로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중간적인 보조역할을 담당했던 존재가 있었는데, 이들 중간계층은 고려 초기의 군소 호족이 변화한 것으로서 중앙 각 관청의 말단행정 실무자인 서리와 지방행정 담당자인 향리, 그리고 상비적 정규군은 하급장교와 궁중의 남반(南班)을 포함한 광범위한 부류였다.

고려사회의 기본적인 구성원은 양인(良人)이었다. 이들은 비록 피지배계층으로 하부계층에 속하였으나, 주로 농경생산에 종사하는 중요한 존재였다. 고려의 양인은 백정이라고 불렸고 이들이 경작하는 토지가 민전이었다. 민전의 수확량 중 1/10은 조세로서 국가에 바쳐졌고, 자신의 토지가 소규모이거나 없는 경우에는 귀족들의 토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량의 1/2을 지대로 떼어주어야 했다. 이밖에 백정은 공부(貢賦), 역역(力役)을 부담하여 국가재정의 원천이 되고 국가존립의 밑받침이 되었다.

최하 신분인 천민은 노비를 비롯한 향(鄕), 소(所), 부곡(部曲)인 진척(津尺), 화척(火尺), 역민(驛民) 등이었다. 노비는 신분적으로 주종관계에 의하여 소유주에게 예속되어 있을뿐 아니라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 되어서 법제적인 천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향, 소, 부곡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양인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더욱이 진척, 역민은 조선시대의 신양역천(身良役賤) 계층에 비유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크게 보아 역시 천민이었다.

지배계층의 생활은 곤란하였기 때문에 각종 구제기관이 설립되었다. 제위보(濟危寶)는 일정한 재화를 원금으로 하여 그 이식(利息)으로 구빈(救貧)을 하였으며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은 병든 빈민을 구호, 요양하였고 혜민국(惠民局)은 약국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밖에 평시에 양곡을 저축했다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의창(義倉)이 있었고, 물가를 조절하는 상평창(裳平倉)이 설치되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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