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선 5백여척을 격침시키고 7만여명의 적병을 살상한 대승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장산군도해전(長山群島海戰)은 다음날 새벽 접전한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연수영이 뱃머리를 돌리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연수영은 함대를 이끌고 상하가 이끄는 당군 우군 함대의 우익을 돌파하여 그 후미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이미 세워둔 작전계획대로 내장산해협의 협수로로 들어갔다. 작전상 후퇴였다. 못 당하는 척 후퇴하면서 당군 전함들을 협수로로 유인했던 것이다. 장량의 작전은 넓은 전역(戰域)에서 차륜전법(車輪戰法)으로 물량공세를 퍼부어 고구려 수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구려 수군의 전함들이 퇴각하는 것을 보자 장량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전력의 약세를 빠른 기동력으로 보완하겠다? 우리를 좁은 해협으로 유인하여 각개격파(各個擊破)를 하자는 것이겠지. 흥! 네년이 영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년에게 살 길이 열릴 줄 아느냐? 어림없다! 너희가 언제까지,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는가 보자!”
장량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연수영의 유인작전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었다. 장량은 장수들에게 여전히 1백척 단위로 고구려 수군 함대를 추격하도록 했다.
그런데 나흘째가 되자 장량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추격전을 벌이기는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고구려 수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타격은커녕 지난 사흘간의 접전에서 벌써 2백척 가까운 전함이 깨지고 군사도 2만명 가까이 잃었기 때문이었다.
초지일관 공세를 퍼붓고 싶어도 군사들의 사기가 밑바닥까지 무겁게 가라앉아버렸으니 압도적인 물량을 앞세운 차륜전법을 더는 밀고나갈 수가 없었다.
나흘째 되던 8월 21일, 장량은 다시 작전계획을 바꾸었다. 부총관 상하의 우군 함대를 멀리 우회시켜 고구려 수군의 배후로 보낸 것이었다. 물론 협공을 하기 위해서였다. 수로 양쪽을 틀어막고 항아리 속의 자라를 잡듯이 고구려군을 격파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수영은 그런 상황까지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을 지키듯이 협수로 안에서 단단히 수비만 할뿐 맞서 싸우러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안에서 지키고만 있다가 적선이 달려들면 한 척 두 척 때려잡을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답답한 것은 장량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황제의 칙사가 이곳 바다까지 쫓아와서 군량을 독촉했다. 감군(監軍)에 이어 칙사까지 왔으니 상전이 둘이나 늘어난 셈이었다.
물론 고구려군도 장수나 사졸이나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고 전의를 다졌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결국은 지게 된다는 사실을 장병 모두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이틀이 지났다. 8월 23일, 이번에는 장량이 고구려의 전함들을 유인하기 위해 짐짓 퇴각하는 척했다. 아무래도 좁은 해협에서는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고구려 수군을 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내보내는 함선마다 차례차례 수장당하고 돌아오지 않으니 다시 넓은 바다로 끌어내어 포위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장량은 함대를 이끌고 다시 외해로 나갔다. 그리고 고구려 수군이 쫓아 나오기를 기다렸다.
연수영은 급할 것이 없었다. 장량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재충전의 기회로 활용했다.
“추격하지 마라! 함대는 그대로 현 위치를 지켜라! 이 기회에 교대로 쉰다!”
그렇게 방어태세만 갖춘 채 협수로 안에서 이틀을 그대로 보냈다. 그동안 군사들은 교대로 휴식을 취하고, 부상자들을 돌보는 한편 다음 전투에 대비했다.
8월 26일, 초조해진 장량은 연수영의 함대가 밖으로 쫓아 나오지 않자 돌격대를 보내 싸움을 걸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더러운 작전’을 구사한다. 함대와 병력 일부를 인근 섬들로 보내 고구려 백성 수백명을 인질로 잡아왔다. 그리고 공격하는 군선의 뱃전에 화살받이로 내세웠다. 그 모습을 본 고구려군 병사들의 눈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비겁한 당괴(唐傀) 놈들!”
“더러운 서토의 똥싸개 새끼들!”
장졸들은 저마다 분개하여 주먹을 휘두르며 욕을 퍼부었다.
“장량, 저 놈이 기어코 군인으로서의 명예마저 던져 버리는구나! 좋다. 모두 협수로에서 나가 서토 오랑캐 놈들을 들이받아라!”
연수영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후군장 안고가 놀라는 표정으로 묻는다.
“우리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우리가 지면 모두 죽게 마련이다!”
연수영은 마침내 함대를 이끌고 협수로 밖으로 나갔다.
고구려 수군이 협수로를 빠져나오자 이틀 동안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장량은 펄쩍 뛸 듯이 기뻐했다.
“괘씸한 년! 망할 년! 드디어 기어 나오는구나! 으흐흐흐……”
고구려의 전함 2백여척이 해협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장량은 참고 참았던 공격 명령을 내렸다.
“총공격하라!”
이미 장사진(長蛇陣)을 펼친 채 고구려 수군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당 수군은 속도를 높여 다가오면서 점점 포위망을 좁혔다. 적군이 장사진을 펴자 연수영의 함대는 첨자진(尖字陳)을 치고 돌격 태세를 갖추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뱀을 잡으려면 머리부터 때려야 한다. 연수영은 적의 지휘부, 즉 장량의 대장선인 누선부터 잡아야겠다고 작정했다.
“적진 한가운데로 정면돌파하라! 우리가 여기서 죽더라도 장량을 반드시 죽이고 죽어야 한다.”
연수영의 대장선에서 돌격을 신호하는 군기(軍旗)가 나부끼자 모청호의 돌격대를 태운 협선 20여척과 강철우의 전위대를 태운 20여척이 좌우에서 옹위하며 적진의 중앙부만을 노리고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누선의 지휘소인 누각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장량은 마침내 고구려 수군이 완전히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하면서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전군은 적선들을 완전히 포위 섬멸하라!”
당군의 전함에서 포차(砲車)와 연궁(軟弓)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돌덩이와 화살을 날려댔다. 고구려 수군의 전함으로 육중한 돌덩이와 화살이 비오듯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무려 7만이 넘는 대병력에 8백여척 정도의 군선에서 연이어 방포와 사격을 퍼부어대니 고구려 수군의 전력도 만만치 않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 수군은 이미 생사를 초월한 심정으로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연수영은 매서운 눈빛으로 아랫입술을 굳게 다문 채 전방을 주시했다. 저 앞에 수십척의 호위선에 둘러싸인 거대한 누선이 보였다. 그 배의 누각에서 붉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는 장수를 본 순간 그녀는 그 자가 바로 당 수군의 총사령관인 장량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다부진 결의로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오늘 반드시 장량 네 놈의 목을 베고야 말겠다!”
고구려 수군의 협선들이 이물을 앞으로 하고 돌진하므로 방패수들이 이물 쪽에서 겹겹으로 장벽을 쳤다. 팔 힘 좋은 궁수들이 방패수 뒤에 몸을 숨기고 쉴 새 없이 맥궁(貊弓)의 시위를 당겼다. 미처 뱃머리를 돌리지 못한 적선들은 그대로 당파전술로 들이받으며 계속 돌진했다.
“도선하라!”
마침내 장량의 누선과 뱃전을 마주 댄 연수영은 큰소리로 도선(渡船)을 명령한다. 누선이 워낙 컸기 때문에 뱃전을 마주 대고 널빤지를 걸치고 건너 갈 수는 없었다. 밧줄사다리가 달린 쇠갈고리를 던져 뱃전으로 기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연수영의 그림자와도 같은 친위대 12낭자군이 그녀의 앞뒤를 둘러싸고 적선으로 올라갔다.
사실이지 고구려 수군에게 남은 전법은 백병전밖에 없었다. 이제 화살도 돌덩이도 바닥을 드러냈으니 적선에 올라가 백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장이 목숨 걸고 적군의 대장선인 장량의 누선에 오르는 모습을 본 돌격장 모청호와 전위장 강철우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황급히 부하들을 이끌고 누선에 올라갔다.
“군주를 호위하라!”
모청호와 강철우가 이구동성으로 부하들에게 소리치며 연수영의 뒤를 따랐다. 연수영이 이번 싸움에 목숨을 건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적선에 도선하는 모습은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누선의 갑판에 오른 연수영은 쌍예검(雙銳劍)을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당군 병사들을 베고 찔렀다. 심지어는 적병의 장창을 빼앗아 누각의 입구를 막고 있는 당군 비장(裨將)에게 던져서 급소를 관통시켜 죽이기도 했다. 연수영의 맹렬한 용전분투에 힘을 얻은 고구려군 병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장량의 누선에서 치열한 단병접전(短兵接戰)을 벌였다. 이미 연수영의 칼날과 갑옷 및 투구는 온통 적병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방금 지옥에서 빠져나온 아수라(阿修羅)나 나찰녀(羅刹女)와도 같았다.
연수영이 부상을 당한 것은 누각으로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대총관 장량의 호위대가 고구려의 돌격대 병사들이 누각을 오르는 모습을 보자 집중사격을 가했고, 그 눈먼 화살 한 대가 연수영의 왼쪽 어깨에 깊이 박혔던 것이다. 연수영은 그 충격으로 갑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 자리에서 화살을 뽑아 던진 뒤 다시 누각의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모청호와 강철우, 10여명의 낭자군이 그녀를 바짝 뒤따랐다.
그렇게 누선의 이층으로 올라갔을 때 한 무리의 당군 장졸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내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쇠를 무 자르듯 하는 연수영의 칼날이 무지개를 그리자 앞장섰던 당장(唐將) 하나가 선혈(鮮血)을 뿌리며 쓰러졌다. 그 뒤에서 장검(長劍)을 치켜들고 달려들던 장수는 모청호가 내지른 장창(長槍)에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렸다. 그러자 나머지 당군 장수와 병사들은 정신없이 뒤돌아서서 달아났다. 그 사이에 경호병들에 둘러싸여 다른 계단을 통해 갑판으로 내려온 장량은 쾌속선으로 갈아타고 잽싸게 후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연수영과 그녀의 부하 장수들은 누선을 완전히 장악하자 장량의 장수기와 군기부터 전리품으로 챙겼다. 그리고 포로가 된 당군들을 통해 알아보니 연수영과 모청호가 죽인 두 명의 적장은 하급 장수가 아니라 거물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부총관 좌난당과 유영행이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반쯤은 승리를 거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은 그것으로 다가 아니었다. 잠시 뒤에 전령선이 급보를 전하기를 좌군 대장 장운형이 적의 우군 함대 주장인 상하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었다.
연수영과 장수들은 한 덩어리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렸다. 상하와 좌난당·유영행 등 사령관급 당군 장수들의 수급(首級)은 전에 해양도해전(海陽島海戰)의 경우와 같이 대선 돛대에 높이 매달았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우리가 이겼다!”
위기일발로 목숨을 구한 장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은 배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주했다. 연수영은 함대를 휘몰아 묘도열도의 대흠도까지 당군을 추격하여 적선을 격침시키면서 보름간에 걸친 이번 혈전을 마무리지었다.
이것이 서기 645년 8월 15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장산군도해전의 전말이다. 뒷날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에서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건안성전투(建安城戰鬪)와 더불어 고구려의 3대 승전(勝戰)으로 꼽히는 장산군도해전에서 연수영의 함대는 적군 12만명 가운데 7만여명을 살상하고, 장량 함대의 거의 절반인 5백여척의 전함을 격침하거나 불태우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전에 없이 격렬한 전투였던 만큼 아군의 피해도 컸다. 용맹스러운 장수인 전위장 강철우가 적군의 쇠뇌에 가슴이 꿰뚫려 죽었다. 후위장 고대수도 적선에 오르다가 적병들의 집중공격을 받고 바다에 떨어져 전사했다. 이렇게 아까운 장수 두 명과 정예군 3천여명이 전사하고 5천여명이 부상당했으며, 대선 약 40척과 중·협선 약 1백척을 잃었던 것이다. 낭자군 가운데서도 문정옥·연미여 등 희생자가 나왔다. 연수영과 장병들은 전우들의 죽음에 하나같이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 해전의 여파는 컸다. 이번 싸움의 승리로 고구려 수군은 장산군도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비사성 진공의 전진기지 역할을 할 광록도를 탈환했다. 이번 장산군도해전의 패배로 당 수군은 제해권을 잃고 보급로를 고구려군에게 빼앗겼으며, 태종은 결국 안시성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장태왕은 장산군도대첩의 보고를 받자 연수영의 직급을 제5품관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 군주(軍主)에서 제4품관 태대사자(太大使者) 원수(元帥)로 올려주었다. 수군이든 육군이든 고구려군에서는 대원수 이하 최고의 계급에 오른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첩을 이끈 연수영의 휘하 장수들도 모두 한 계급씩 특별히 올려주고, 전공을 세운 군사들에게도 일일이 은자와 비단을 상급으로 내려 용감하게 싸워 이긴 공로를 치하했다.
기지로 귀환한 연수영은 이번 전투의 전몰장병을 위해 성대하고 엄숙한 진혼제(鎭魂祭)를 베풀어주었다. 그러고 나고 소 돼지 잡고, 떡 치고, 술을 빚어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언제 싸움터에 나가서 죽을지 모르는 소중한 부하들이니 위로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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