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1-10-04]
올해 초 해외 근무를 마치고 7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외교관 ㄱ씨는 “이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편한 나라가 됐다”고 극찬했다. 그는 “선진국에서는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인 신용카드 발급을 창구 방문 즉시 할 수 있고, 인터넷 선도 전화 한 통이면 즉시 개통된다. 야식도 24시간 내내 주문 30분 내에 배달되는 나라가 어디 있나. 외교관들이 점점 더 해외 근무 대신 국내 근무를 선호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장면도 있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오토바이 피자배달원 두 명이 잇따라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사고는 오래 기다리기 싫어하는 손님들의 재촉과 지나친 경쟁에 내몰린 모 피자업체가 내건 ‘30분 배달제’ 때문에 일어났다는 지적이 나왔다. 고용노동부는 2005년부터 2011년 7월까지 음식·숙박 업종에서 발생한 오토바이 사고 사상자가 7772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오토바이 배달원 사상자는 2005년 이래 해마다 증가해왔다.
지난달 28일 퇴근시간을 넘긴 오후 8시쯤, 서울 테헤란로에 있는 한 건물의 사무실들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이래 줄곧 회원국 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소비자에게 편리한 한국사회의 이면에는 생산자들이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그림자가 있다. 강한 노동강도는 세계 최장의 노동과 겹쳐지며 산업재해 사망률 상위권 국가의 오명을 한국에 안겼다. 거의 매일 잔업·특근을 해야 하고 세계에서 가장 짧은 편인 열흘 미만의 휴가도 한꺼번에 다 쓰는 ‘간 큰 사람’이 없다. 영국 BBC 방송이 8월5일 ‘아시아의 일 중독자들에게 휴가를 가라고 설득할 것인가?’라는 해외토픽 기사에서 “한국인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일을 많이 하지만 생산성은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연간 평균 휴가도 11일 정도로 짧고 그마저도 나눠서 간다”고 전했을 정도이다. 한국인들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0년 기준 2193시간으로 OECD 국가 중 1위이다. 근로시간은 단순히 사무실 내에 있는 시간만 계산한 것으로 퇴근 후 회식시간이 업무의 연장임을 생각한다면 한국인들의 근로시간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인들은 수면시간도 짧아서 2009년 OECD 국가 통계에서 회원국 중 가장 짧은 7시간49분을 잤다. 가장 많이 자는 프랑스인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8시간50분이었다.
많이 일하고 조금 쉬는 것, 좋게 말해 ‘근면’은 한국인들이 어릴 때부터 몸에 배는 덕목이다. 6년간의 영국생활을 마치고 재정착한 강영규씨(41)는 10살, 7살난 두 자녀가 매일 영국생활을 그리워하며 울면서 잠이 드는 모습을 봐야 한다. 영국시절아이들이 하루 6시간 학교에 있으며 뛰어노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지만 한국에서는 학교 마치고 학원까지 다녀오면 오후 7시30분이 넘는다. 숙제까지 마치자면 밤 늦도록 불을 끌 수가 없다. 지난해 말 여성가족부가 밝힌대로 한국 청소년의 평일 평균 수면시간(7시간32분)은 미국(8시간47분), 영국(8시간36분)보다 짧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과로’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건 속에서 최근 솔선수범을 보인 이가 있으니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그는 지난 7월 장관 중에서는 처음으로 ‘유연근무제’를 신청했다. 유연근무제는 정부가 내수 진작과 삶의 질 제고를 위해 공무원 사회에 도입했다. 하지만 지난 두 달간 박 장관은 오전 8시 출근은 하고 있어도, 오후 5시 퇴근은 거의 지킬 수 없었다고 한다. 박 장관과 함께 유연근무제에 동참한 공무원들 상당수는 결과적으로 한 시간 더 일하게 된 셈이다. 근무시간 줄이기는 고용노동부 장관까지 지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직접 나서도 개선이 쉽지 않은 문제인 모양이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지난 2003~2005년 한국, 일본, 미국, 독일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일에 대한 태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거의 모든 질문에 일관되게 일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 가령 ‘실직이 이혼보다 고통스러울까’라는 질문에 한국인 65%, 미국인 41%, 독일인 40%, 일본인 36%가 ‘그렇다’고 답했다. 일이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 공포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 기업들이 목표달성을 위해 법정 노동시간을 지키지 않고 잔업을 강요하고 성장의 열매를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이제 ‘내 자리를 원하는 산업예비군들이 널려있다’는 불안감으로 대체됐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기꺼이 더 일한다. 얼마나 더 열심히 뛰어야 발 뻗고 잘 수 있을까. 모두들 함께 ‘과로’함으로써 만든 쳇바퀴는 우리를 예전보다 더욱 빨리 달리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정시 출·퇴근, 주5일제, 휴가 제대로 쓰기 등의 구호는 지금처럼 무한경쟁이 내면화된 한국사회 내에서 뿌리내리기 어렵게 돼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많은데 어떻게 ‘더 놀자’는 얘기를 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더 놀아야 한다’. 지표들은 경제성장이 더 이상 일자리 증가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점을 입증한다. 삶의 질뿐만 아니라 고용창출을 위해서라도 노동시간 단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ㄱ 외교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반년쯤 한국에서 지내보니, 그 사이 본부 근무가 너무 힘들어졌구나 하는 점을 깨달았다. 우리가 소비자로서 배달원들에게 24시간 음식 배달을 기대하는 만큼 나 역시 국민들로부터 초인적인 근무태도를 요구받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소비자로 더 편한 만큼 어느 대목에선 나 역시 생산자로서 그만큼 더 피곤해진다는 발상. 그 안에 연대가 싹틀 수 있는 해답이 있는 것 아닐까.
<경향신문 손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