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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31.임진왜란(壬辰倭亂), 조선의 상처뿐인 승리

개마기사단 |2011.10.12 19:32
조회 195 |추천 0

사림파의 집권은 분당으로 이어저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이 와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선조(宣祖)와 지배층은 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했다. 이는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조선 사대부체제의 한계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은 의병대장을 배출한 북인들의 지권이 그나라 조선 사대부사회에 최소한의 자정 기능이 남아있음을 말해주었다. 광해군(光海君)을 옹립한 북인들은 전후 복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과도한 정적 숙청과 폐모사건 등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킨 결과, 반대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

사림파(士林派)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이황(李滉)이었다. 그는 스물일곱살이던 1527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해 부정자(副正子), 정언(正言),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삭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잃고 자주 사직했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되던 해에 낙동강 상류인 토계(兎溪)의 양진암(養眞庵)을 지어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호를 퇴계(退溪)라 개칭했는데, 명종(明宗)이 여러번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아 명종으로 하여금 "현자는 불러도 오지 않으니 이를 한탄하노라."라는 시를 쓰게도 했다.

퇴계는 정작 경직에 있을 때보다 외직에 있을 때 사림파의 세력 확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만든 것이 그것이다. 즉 주희(朱熹)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쫓아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모시기 위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해 성사시켰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쳤다. 성학십도는 성리학을 열장의 그림과 함게 쉽게 설명한 책으로서, 국왕이 성리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술한 책이었다. 어린 국왕이 성리학을 배워야 할 만큼, 이제 성리학은 조선에서 국왕을 포함해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사상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집약된다. 그의 이기이원론은 주희의 이기론과 그 사상이나 구조가 같은 것이었다. 주희의 성리학은 퇴계보다 서른다섯살 아래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이르러 조선화하게 된다. 퇴계가 조선의 성리학을 주희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주리론(主理論)적 이기이원론을 주창했다면, 율곡은 이를 한 단계 발전시킨 주기론(主氣論)적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의 차이는 정치적 철학에 있어서의 야당과 여당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퇴계의 주리론이 재야 사림의 자리에서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이념이었다면, 율곡의 주리론은 정권을 잡은 집권 사림의 자리에서 현실을 바라본 정치이념으로서 현실에 대한 구체적 개혁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퇴계와 율곡은 둘 다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정치인이지만,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은 달랐다. 퇴계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마지막 정쟁을 벌이는 과도기의 정치인이었고, 율곡은 사림파가 지난한 정치 투쟁 끝에 훈구파를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 시기의 정치인이었다. 이전의 사림이 재야나 야당이었다면, 율곡이 활동하던 시기의 사림은 집권당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퇴계에게 이(理)와 기(氣),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각각 이상과 현실의 반영이었다. 즉 정치세계에서 이와 사단이 사림파라면, 기와 칠정은 훈구파였다. 사화시대의 정치인이었던 퇴계에게 현실은 부정한 훈구파가 장악하고 있는 기(氣)의 시대였다. 사화를 통해 지고한 이상[理]이 저열한 현실[氣]에 좌절하는 것을 본 퇴계에게 기는 이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신사봉공(臣事奉貢)해야 했던 남송의 비참한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중국 민족의 중세적 세계관이 주희가 정립한 성리학이었듯이, 부패한 훈구파에게 사림파가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나온 조선 사림파의 세계관이 퇴계의 이기이원론이었다. 이민족의 억압과 훈구파의 억압이라는 서로 유사한 정치적 상황이 공간과 시대를 뛰어넘어 주희와 퇴계를 같은 이기이원론으로 이끈 것이다.

그러나 사림이 집권세력이 된 변화된 사회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아야 했던 율곡은 달랐다. 일단 집권한 이상,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현실 긍정의 토대 위에 개혁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므로 율곡에게 현실과 이상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체였다. 율곡의 이기일원론, 나아가 율곡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 퇴계의 사상과 달랐던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림파가 재야나 야당이었을 때는 훈구파에 대한 부정의 논리만으로 충분했지만, 일단 집권한 이상 부정의 논리만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는 없었다. 집권한 사림파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과 그 실천 방안이었다. 사림파가 집권한 선조 때는 국내외적으로 난제가 충첩된 시기였다. 사림파의 영수 율곡은 역사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경장(更張)으로 시기구분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를 대대적 개혁이 필요한 경장기(更張期)로 보았다.

그러나 사림파는 집권 후 이런 역사적 과제를 실천하지 못하고 분열하고 말았다. 사림의 분열은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세계관의 차이 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으며, 이는 당쟁(黨爭)으로 이어졌다. 즉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 사화(士禍)라면, 사림파 내부의 분열이 바로 당쟁이었다. 사화의 시기가 가고 당쟁의 시기가 온 것이다.

● 당쟁의 시작

사림파가 갈라진 계기는 이조의 5품직인 이조전랑(吏曹銓郞)이라는 관직 때문이었다. 이조전랑이 사림파 분열의 계기가 된 것은 인사 문제를 운용하는 조선의 특이한 제도와 방식 때문이다. 조선은 삼정승이 아니라 이조판서에게 인사권이 있었다. 이런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삼사(三司) 관리의 추천권을 이조판서가 아닌 이조전랑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조전랑에게 삼사 추천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준 것은 삼사의 업무 특성 때문이다. 삼사는 청요직(淸要職)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모든 관료들의 비위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사정(司正)부서였다. 삼사의 인사권이 재상이나 이조판서에게 있으면 자기 사람을 심어서 권력을 전횡할 우려가 있어 이조전랑에게 준 것이었다. 이런 제도적 장치가 있었기에 삼사는 정승이나 판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마음껏 감찰과 탄핵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이조전랑이 소신껏 삼사 관리를 추천할 수 있도록 조선은 전랑 전임자에게 후임자 추천권을 주었다. 이를 전랑자천제(銓郞自薦制)라고 한다. 한번 전랑이 되면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대부분 판서와 재상 자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조전랑은 과거에 급제한 사대부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선조(宣祖) 재위 7년(서기 1574년) 이조전랑 오건(吳健)이 이임하면서 김효원(金孝元)을 그 자리에 추천했다. 김효원은 퇴계의 문인으로서 명망이 있었으므로 그가 추천된 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분위기였다.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의겸(沈義謙)이 "김효원이 한때 윤원형의 식객(食客)이었다."며 반대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김효원의 부임을 막지는 못했다. 그런데 김효원의 뒤를 이어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의 물망에 오르자 김효원이 "이조의 벼슬이 어찌 외척집 물건이냐?"라고 반대하면서 사림은 둘로 나누어져 분쟁하게 되었다.

김효원은 심의겸, 충겸 형제를 외척이라고 공격했지만 사림의 처지에서 심씨 형제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인순왕후는 수렴청정 1년만에 17세의 선조에게 친정을 맡긴 후,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또한 김효원이 윤원형의 사위라는 이유로 이조민(李肇敏)과 가까이 지낸 데 비해, 심의겸은 훈구파에 맞서 사림파를 등용했다.

김효원과 심의겸이 싸우게 되자 당대의 많은 사대부들은 그 옳고 그름을 놓고 논쟁하게 되었다. 대체로 젊은 사대부들이 김효원을 지지했고, 노장 사대부들은 심의겸을 지지했다. 이 논쟁이 계기가 되어 사림은 둘로 갈렸고, 이 때가 선조 재위 8년(서기 1575년)으로 을해당론(乙亥黨論)이 벌어진 것이다.

김효원을 지지하던 인물들은 김우옹(金宇顒), 유성룡(柳成龍), 허엽(許曄), 이산해(李山海), 정유길(鄭惟吉) 등이었다. 이들은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의 건천동(乾川洞)에 있다는 이유로 동인(東人)이라 불렸다.

심의겸을 지지하던 인물들은 김계휘(金繼輝),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 구사맹(具思孟), 신응시(辛應時) 등이었는데, 이들은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의 정릉방(貞陵坊)에 있다는 이유로 서인(西人)이라 불렸다.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된 분당이 3백년 이상을 끌며 상대 당을 살육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줄은, 당시로서는 두 당사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포함해 아무도 몰랐다.

● 율곡의 조제론(調劑論)과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을해당론(乙亥黨論) 4년 전인 선조(宣祖) 재위 4년(서기 1571년),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은 사망 직전 유차(遺箚)를 올려 벼슬아치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붕당(朋黨)을 만들고 있다면서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서 나중에 반드시 나라의 고치기 어려운 환란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계했다. 이 유차는 사림파의 영수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되었는데, 율곡은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느냐?"면서 '이는 임금과 신하를 갈라놓으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을해당론으로 붕당이 현실화하자 율곡은 자신의 통찰력 부족을 자인하면서 당론 조제(調劑)를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율곡이 볼 때 동인과 서인은 서로 갈라져 다투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사림을 결집시켰던 것은 부패한 훈구파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사림파가 정권을 잡았으니 부패한 정치를 혁신하고 깨끗한 도덕정치, 이상정치를 펼칠 때라고 그는 생각했다. 부패한 정치 밑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내는 위민정치(爲民政治)를 펼칠 호기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사림들이 이런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당쟁으로 일관하자, 율곡은 두 당을 합당시키기 위한 당론 조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한때 사림의 영수였던 율곡의 당론 조제를 젊은 동인들은 서인 편을 드는 것으로 판단했다. 율곡은 동인과 서인간의 당쟁을 중재하려 한다는 이유로 동인들의 표적이 되어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은 후까지 동인들과 그 갈래인 남인들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율곡은 서인과 동인의 정쟁을 완화시키기 위해 김효원(金孝元)을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심의겸(沈義謙)을 경기도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보냈다. 그러나 동인들은 이조판서 정대년(鄭大年)을 중심으로 "경흥은 오랑캐 땅과 가까워 선비가 기거할 곳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대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경흥은 오랑캐 땅과 가까워 선비가 기거할 곳이 아니다.'라는 동인들의 반발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진 사실은 조선 지배층의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경지대를 국방의 요지가 아닌 오랑캐들이 가까이 있어 선비들이 기거할 수 없는 더러운 땅으로 바라보는 데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수난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은 이미 그 싹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양측 모두 그르다는 양비론(兩批論)이 아니라 양측 모두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을 펴면서, 동인 강경파 이발과 서인 강경파 정철에게 여러번 편지를 보내, 마음을 합쳐 나라 일에 힘쓰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동인들로부터 현상으로 본질을 호도한다는 비판을 받았을 뿐이다. 동인들은 율곡이 자신들 편을 들지 않는 것 자체가 서인 편을 드는 것이라 의심하면서, 양시론에 대해 "천하에 어찌 두가지 모두 옳고, 두가지 모두 그른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따졌다. 율곡은 '무왕(武王)과 백이숙제(佰夷淑齊)의 일은 둘 다 옳고, 춘추시대의 전쟁은 둘 다 그른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동인들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율곡은 자연히 서인이 되어 갔다.

선조 재위 16년(서기 1583년) 경원부(慶源府)의 번호(藩胡) 이탕개(泥湯介)가 국경을 침범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했다가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껴 병조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막상 선조는 어의(御醫)를 보냈으나 동인들은 이를 율곡의 방자함으로 돌려 탄핵했다. 동인 허봉(許封)이 율곡을 탄핵하자 선조는 도리어 허봉을 귀양 보냈다. 그러자 송응개(宋應漑)가 다시 율곡을 탄핵했고, 그 역시 귀양 가자 박근원(朴謹元)이 뒤를 이어 탄핵했다. 세 신하가 잇달아 귀양 간 일이 1583년 계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고 부른다.

동인들은 율곡을 서인이라며 공격했으나 정작 율곡 자신은 당시 사대부들의 과제가 당쟁이 아니라 개혁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농민들은 농업 생산력을 꾸준히 증가시켰으나 훈구파의 토지 지배가 강화되면서 농민 생활은 오히려 붕괴되고 있었다. 율곡은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경장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비록 그의 행장에만 기록되어 있지만 이탕개가 이끄는 여진족의 침공에 당황하는 조선 군사력의 현실을 체험하고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으며, 도탄에 빠진 농민경제를 살리기 위해 경제사(經濟司) 설치를 주장했고, 공납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공물 대신 쌀로 받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주장했다.

이런 율곡이 1584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것은 비단 대학자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당쟁 조제와 현실 개혁에 주력하던 대정치인의 죽음이기도 했다. 율곡의 사망은 조정의 축을 동인으로 기울게 했고, 동인들은 집권당이 되었다.

그러자 서인 가운데 동인으로 당적을 바꾸는 사람도 나타났다. 정여립(鄭汝立)이 그런 인물이었다. 선조 재위 3년(서기 1570년) 문과에 급제한 정여립은 당초 율곡과 성혼(成渾)의 제자였다가 율곡 사후 동인으로 당적을 옮겼다. 동인 집권이 계속되자 선조는 동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1589년 발생한 정여립 모반사건을 이용한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그 사실 여부부터가 많은 논란이 있다. 정여립은 선조의 배척을 받자 낙향한 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향사례(鄕射禮)를 명목으로 군사 훈련한 것으로 모반의 혐의를 받지만 정작 그의 대동계는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동원 요청에 의해 왜구를 물리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비밀조직이 아니라 사실상의 승인된 조직이었다. 그 세력의 본거지가 전라도였음에도 고변한 곳이 황해도였다는 점도 이 사건의 의도적 조작을 의심케 하는 재료다. 동인에게 원한이 있는 서인의 모사 송익필(宋翼弼)이 조부의 고향인 황해도에서 향인(鄕人)들을 시켜 고변하게 했다는 것이다.

고변 당시 정승이었던 동인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鄭彦信)은 고변이 당치 않다며 고변자를 처벌하려 했으나 서인 대사헌 홍성민(洪聖民)이 저지해 실패했고, 동인들이 정여립과 짜고 자신을 축출하려 한다고 의심한 선조가 철저한 진상조사를 명령해 사건이 확대되었다. 의금부에서 체포하려 하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도망갔다가 진상이 의심스러운 자살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아들 정옥남(鄭玉男)은 체포되었다.

동인들은 서인 측의 정치공작이라 사건의 진위를 의심했으나, 서인들은 이를 동인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을 수단으로 이용했다. 선조가 노수신과 정언신 등 동인 위관(委官)을 파직하고 서인 정철로 바꾸면서 이 사건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이발(李撥), 최영경(崔永慶), 정개청(鄭介淸), 백유양(白惟讓) 등이 사건 와중에 사망했으며, 이발의 팔순 노모와 열상이 채 안된 어린 아들까지 국문을 받다가 희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호남 일대 사대부 100여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등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율곡 사후 빼앗겼던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인들의 집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세자건저(世子建儲) 문제 때문이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朴氏)가 자식을 낳지 못함에 따라 후궁 소생 중에서 세자를 세워야 했는데, 대부분의 신하들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에게 뜻을 두고 있었던 반면, 한창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던 선조는 그녀의 둘째 아들 신성군(信城君)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1591년 세자건저 문제가 대신들 사이의 현안이 되었을 때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유성룡 등 동인은 물론 좌의정 정철과 대사헌 이해수 등 서인들도 모두 광해군의 세자건저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인들의 합의를 깨고 정청에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서인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자,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는 크게 화를 냈다.

서인과 선조 사이를 갈라놓는 데 성공한 동인들은 연일 정철과 또 다른 서인 영수 성혼을 공격했다. 정여립 모반사건 때 이발, 최영경, 정개청 등 동인들을 죽인 장본인은 위관 정철이고, 배후에서 이를 조종한 인물은 성혼이란 의심 때문이었다. 결국 정철은 강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고 정권은 다시 동인에게로 넘어갔다.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서인에 대한 처벌 수위 문제로 다시 둘러 갈렸다. 서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주장한 이산해 등 강경파가 북인이 되었고, 관대한 처벌을 주장한 유성룡 등 온건파가 남인이 되었다. 이산해의 집이 서울 강북이었기 때문에 북인(北人)이라 불렀고, 온건파의 영수 유성룡이 영남 출신인데다 우성전(禹性傳)이 남산 밑에 살았기 때문에 남인(南人)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 또 남인과 북인으로 갈려 파쟁을 일삼고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바로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는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20만 대군을 조선에 출병시키다.

정여립 사건의 여파로 정개청(鄭介淸)이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최영경(崔永慶)이 옥사한 590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은 일본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이듬해, 즉 임란(壬亂) 1년 전에 귀국한 이들은 어전회의에서,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혀 그러한 조짐이 없다.'고 상반된 보고를 했다. 김성일이라고 장님이 아닌 이상 일본의 침략 조짐을 못 보았을 까닭이 없겠지만, 그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야당인 서인들이 세자건저(世子建儲) 문제로 야기된 정쟁을 중단하기 위해 전쟁 가능성을 내세우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동인들로서는 서인들을 공격할 수 있는 이 호기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침략 위협이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온 국력을 기울여 초당적으로 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집권 사림파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동인들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려 싸우는 동안, 일본 열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포의(布衣)에서 일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율곡이 사망한 해인 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에야쓰를 형식상 자신의 부하로 삼음으로써 열도 통일의 길에 성큼 다가섰다. 이어 사국(四國)을 정벌하고 1587년에는 오다하라[小田原]를 정복하고 아울러 오우(奧羽)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를 무릎꿇게 함으로써 전국 통일을 완수했다.

히데요시는 귀순해 온 다이묘[大名]들에게는 옛 영토를 그대로 주고, 끝까지 저항한 다이묘들에게서 그 영토를 빼앗거나 삭감해 자신이 2백만석의 직할지와 주요 금은 광산을 독점했다. 비록 일본 황제의 존재를 인정해 간바꾸[關白]와 다조오다이진[太政大臣]의 자격으로 각지의 다이묘들을 다스리기는 했으나 황제는 명목뿐으로 제사를 모시는 사제나 다름 없었고, 히데요시가 사실상 일본의 국왕이었다. 그가 일본 황제에게 7천석의 영토를 기증한 것은 사실상 영토를 하사한 것으로서, 당시 황제보다 간바꾸인 그가 상위에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의 특성상 일본 열도를 천하라고 부른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천하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明), 나아가 인도 지역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에 그 수가 늘어난 무사들에게 지급해야 할 영토가 부족하자,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해 나누어줄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외전쟁은 무사들의 불평불만을 밖으로 돌리는 동시에 히데요시 자신의 친위군을 육성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영주인 다이묘 출신이 아니라 보잘것 없는 천민으로 태어난 그에게는 대대로 내려오는 자신의 친위군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내부적으로 무사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외부적으로는 세계 제패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본을 통일하자마자 조선 정벌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와는 동떨어진 변방국가일 뿐이었다. 중국의 시각으로 볼 때, 지정학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의 경우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반드시 우호적인 정권이 수립되어야 할 나라였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조공을 해오기만 하면 굳이 내정에 간섭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다. 일본 국내 정세의 변화는 중국의 정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이 통일된 군사력으로 조선과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것은, 그 계획의 성패 여부를 떠나 동아시아 정세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는 사태였다. 말하자만 존재하지 않던 국가 하나가 갑자기 동아시아 정세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셈이었다.

더욱이 이 때는 중국 정세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진족에게서 통일적 기운이 감지되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한 부족장에 지나지 않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여타 여진족 부족을 통일한 때가 1588년이었다. 북방 주변민족의 통일의 여파는 중원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었고 만주 지역의 정세는 한반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잇었으니,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체가 전운에 휩싸일 조짐이었다.

흔히 일본이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을 침략해 온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 전선(戰線)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파병할 부대를 선정하는 등 전쟁을 위한 준비작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려달라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겐소[玄蘇]를 사신으로 보내 정명가도를 요구하자, 조헌(趙憲)이 철부(鐵斧)를 들고 옥천에서 상경하여 대궐문 밖에서 사흘 동안 꿇어앉아 일본 사신을 斬首하고 전쟁에 대비할 것을 청한 때가, 임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이었다. 물론 조헌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선조(宣祖)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당했다.

정명가도 요구가 거부되자 일본은 나고야[名古屋]에서 원정군을 조직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번대 1만 8천여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번대 2만 8천여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쓰는 제3번대 1만 1천여명 등 모두 9번대 병력 15만 8천 7천명이었고, 그 외에 구키 요사타카[大內義隆],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등이 인솔하는 수군 9천명 등을 포함해 20여만명이었다. 히데요시는 나고야에 10만명, 교토[京都]에 3만명의 군사를 두어 일본 본토의 정권을 지키게 한 다음, 1592년 4월 14일 조선으로의 출진을 명했다.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번대는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부산포로 향했다. 부산진첨사 정발(鄭撥),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新) 등이 아무런 저항도 겪지 않고 육지에 상륙한 왜적(倭敵)의 대군을 맞아 결사항전(決死抗戰)을 펼치다가 전사하는 등 전쟁은 처음부터 일본군의 우세로 흘렀다. 유키나가의 제1번대는 그 뒤 조선군의 별다른 저항 없이 경상도 일대를 유린했다.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 조경(趙儆)을 우방어사,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機)를 조방장으로 삼아 방어전(防禦戰)을 펼치게 했으나, 기본적은 군사체제가 무너진 조선으로서는 전투 다운 전투 한번 치를 만한 제대로 된 병력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이일은 상주(尙州)에서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군사를 모두 잃고 도주했으며, 조경도 황간(黃澗)에서 일본군과 맞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敗戰)하고 말았다.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충청도에서 모은 8천여명의 군사로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치른 일전(一戰)에 조정은 희망을 걸었으나, 신립 역시 대패하고 달천강(達川江)에 투신 자결하고 말았다.

제1번대의 부산 상륙 소식을 들은 기요마사의 제2번대는 경상좌도로 북상했으며, 나가마사가 인솔하는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를 거쳐 경상우도를 따라 올라와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청주 방면으로 향하는 등 일본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조선 강역을 공략했다.

신립이 패사(敗死)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정 중신들은 도성 사수의 결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宣祖)는 이미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이원익을 평안도 도순찰사, 최흥원을 황해도 도순찰사로 임명해 몽진(蒙塵)을 위한 사전 포석을 깔아놓고 있었다. 과연 선조는 4월 29일 밤,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선조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성을 버린 것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조선 사대부체제의 한계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분개한 백성들은 노비문서를 맡고 있는 장예원(掌隸院)과 형조(刑曺)에 불을 질렀다. 이는 사대부들이 자행한 그간의 신분차별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것이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지배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선조의 어가(御駕)가 개성의 남문루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이 어가의 진행을 가로막고 시위를 벌인 사실은, 국왕조차 백성들의 조롱감이 되었음을 뜻했다.

개성으로 후퇴했던 선조 일행은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行在所)를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대신들이 저군(儲君)을 세워 인심을 위무하자고 청하자, 선조는 하는 수 없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왜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평양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향했다. 백성들의 봉기에 놀란 선조는 파천의 결정자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를 파천 주창자로 둔갑시키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파천을 적극 반대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는 등 희생양을 만들어 빠져 나가려 했다.

그리고 평산에 이르러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요동내부한 국가와 백성을 버리고 소수의 비빈(妃嬪)들만을 대동한 채 요동으로 들어가, 명나라의 신하로서 살겠다는 계획이었다. 요동내부책은 조선이 일본과 결탁해 명나라를 침략하려는 계책으로 의심한 명나라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했으나, 이는 조선 지배층의 의식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선조는 광해군 외에도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을 함경도로, 셋째 아들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보내 군사를 모으게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두 왕자를 생포해 왜군에게 인도함으로써 조선 지배층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6월 유니카가가 평양을 점령하고, 기요마사가 함경감사 유영립(柳永立)을 생포함으로써 조선은 멸망 위기에 처했다. 위기의 조선을 구한 것은 뜻밖에도 조선 백성들 자신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을 점령한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재야 유생과 농민들이 주축이 된 의병대(義兵隊)가 봉기한 것이었다. 여기에 사대부들에게 천대받던 승려들이 의승군(義僧軍)으로 가세하고, 7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한산도(閑山島)에서 승전(勝戰)함으로써 역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 의병들의 항쟁과 조선 수군의 연전연승(連戰連勝).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최종 목적은 명나라 정복이었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선결과제는 바로 조선을 멸망시키는 일이었다. 왜군의 조선 침략 작전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고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서 군수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상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작전 계획은 의병부대의 유격전(遊擊戰)과 조선 삼도수군 연합선단(朝鮮三道水軍聯合船團)의 분전으로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보급로가 끊기는 등 처음부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의병항쟁(義兵抗爭)은 양반에서 천민까지 계급의 차이가 없이 광범위하게 참여했지만, 의병대장은 주로 문반(文班) 출신의 전직 관원이나 유생들로서 지방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성장한 지역이나,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해 주변 지역으로 군세(軍勢)를 확대시켜 나갔다.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곽재우(郭再祐)는 현풍의 유생 출신으로서 사재를 털어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모집한 다음, 의령(宜寧), 합천(陜川), 창녕(昌寧) 등 경상우도 지역을 거의 수복했다.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인홍(鄭仁弘)은 성주(星州), 합천, 함안(咸安) 등지를 지켜냈으며, 김면(金沔), 조종도(趙宗道) 등은 거창(居昌), 고령(古寧)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해 왜군을 물리쳤고, 경상좌도의 권응수(權應銖)는 영천(靈川)과 예천(醴泉), 문경(聞慶) 등지에서 각각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

호남의 고경명(高敬命)은 여러 의병들의 추대로 담양(潭陽)에서 의병대장이 되어 임금이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향하려다가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마주쳐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 아들 인후(因厚)와 함께 전사했다. 김천일(金千鎰)도 나주(羅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행재소가 있는 평안도로 향하던 중 강화에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충청도에서는 조헌(趙憲)이 의병을 모집하여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과 합세해 청주성을 회복하고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황해도에서는 전 이조참의 이정암(李廷馣)이 의병들을 거느리고 연안성을 빼앗으려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왜군을 물리쳐 인근의 여러 읍을 회복시켰고, 이로써 양호(兩湖)의 해상 교통을 의주(義州)의 행재소와 연결시킬 수 있었다. 함경도에서는 정문부(鄭文孚)가 길주(吉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을 격파하고 함경도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이 때의 의병 중에서 특색 있는 군사들은 의승군(義僧軍)이었다. 묘향산(妙香山)의 노승 휴정(休靜)이 의승군을 조직했으며, 이외에도 금강산의 유정(惟政), 호남의 처영(處英), 해서의 의엄(義嚴) 등 휴정의 문도(門徒)들이 승군을 일으켜 호응했다.

의병들이 전투에서 항상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사실상 정규군의 역할을 대신해 파죽지세로 달리던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朴弘),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이 통솔하고 있었다. 이 중 왜군의 최초 상륙 지역이었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의 함대는 왜군의 집중 공격으로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이순신은 5월 초 원균의 지원 요청으로 전함과 병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옥포(玉浦)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 5월 말부터 6월 초에는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및 경상우수영의 함대와 합세하여 사천(泗川), 당포(唐浦), 당항포(唐項浦)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 측은 당초 부산에서 한반도의 서남해안을 돌아 육해병진(陸海竝進) 작전을 펼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육상으로 전라도를 공략하여 조선 수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한편, 수군의 총역량을 전라도에 집결시켜 반격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이에 5월 초의 용인전투(龍仁戰鬪)에서 1천 6백여명의 적은 병력으로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 김수(金殊) 등이 이끄는 하삼도 연합군(下三道聯合軍) 6만명을 대파하는 기염을 토했던 일본 최고의 맹장(猛將) 와키사카 야쓰하루[脇坂安治]가 73척의 군선과 1만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서남해안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억기, 원균과 더불어 52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출정,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해 있던 왜군 선단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陳)을 펼쳐 적선들을 포위하였다. 이 전투에서 왜군은 군선 62척을 잃고 병사 5천 8백여명이 전사, 혹은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으니 곧 임란삼대첩(壬亂三大捷)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다. 이 승전(勝戰)은 의병들의 활약과 함께 불리했던 전쟁 초반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순신의 함대 때문에 해로를 통한 군수물자 조달이 어려워지자 일본은 육로로 북상길을 뚫기 위해 서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인 진주성(晉州城)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진주성의 군민(軍民) 3천 8백여명은 진주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의 지휘 아래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하세가와 히데가쓰[谷川秀一] 등이 이끄는 왜군 2만여명을 상대로 필사적인 수성전(守城戰)을 펼쳐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군의 대병력을 물리친 대승(大勝)인 1592년 10월의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였다.

1592년 12월에는 명나라의 동정제독(東征提督) 이여송(李如松)이 4만 3천여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여송의 군대는 이듬해 정월, 순변사 이일(李鎰) 및 별장 김응서(金應瑞)가 이끄는 조선 관군 및 유정이 이끄는 의승군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을 쫓아내고 평양성을 수복함으로써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평양성 탈환에 자신감을 얻은 이여송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에서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에게 참패를 당함으로써 기세가 꺾여 남진(南進)을 중지했다. 그러나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이끄는 조선 관군은 1593년 2월,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을 치고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왜군 3만여명과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1만여명이 넘는 왜군이 살상당했고, 적장 히데이에도 부상을 입었으니 곧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제1차 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와 더불어 임란삼대첩(壬亂三大捷)으로 일컬어지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이다.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예기가 꺾인 왜군은 휴전(休戰)을 제의하였으며, 명(明)도 이를 받아들여 왜군은 1593년 4월 서울을 버리고 경상도 해안일대로 물러났다. 그러나 명과 일본간의 화의담판은 피차 승리를 자처하는 가운데 3년간 끌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그 사이 일본군은 경상대 연해지방에서 왜성(倭城)을 쌓고 방어시설을 갖추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일본의 정유재란(丁酉再亂) 도발과 조선의 승리.

일본은 화의(和議)가 결렬되자 1597년 1월에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입하였다. 왜군은 재침(再侵)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를 전라도 점령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재해권을 빼앗으려고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였는데, 이순신이 일본 간첩의 농간으로 포함을 받아 파직되고, 그 대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오른 원균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부산 쪽으로 진격하다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하였다. 조선 수군의 전력을 와해시킨 왜군은 득의양양(得意揚揚)하여 육지를 마구 유린하면서 9월에는 충청도 지방까지 북상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의 지원군이 소사전투(素沙坪戰鬪)에서 왜군의 북진(北進)을 차단하고 남쪽으로 밀어냈으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패잔병 1200여명과 군선 13척을 수습하여 133척의 대선단으로 진격해오는 일본 수군을 명량해협(鳴梁海峽)에서 격파하였다.

이렇게 육상전투(陸上戰鬪)와 해상전투(海上戰鬪)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전의를 잃고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다가 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를 핑계로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陳璘)과 함께 노량(露梁) 앞바다에서 왜군을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조명연합수군(朝明聯合水軍)은 이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적선 2백여척을 격침시키고 3만여명에 이르는 적병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퇴각하는 적선을 추격하던 중 총격을 받아 순국하고 말았다.

전후(戰後) 7년간에 걸친 일본과 조선 간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조선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일본은 영토를 얻은 것도 없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지도 못한 것이다. 전쟁의 초반에는 조선 측이 고전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민의 잠재된 국방능력이 발휘되어 일본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유교(儒敎)의 문치주의(文治主義)가 국방을 허술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나, 유교에 의해서 배양된 충의정신과 자존심이 나라를 지키는 정신적 원동력으로 나타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것은 조선 측이었다. 전국 8도가 전장(戰場)으로 화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기근과 질병으로 쓰러졌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전란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후에도 인구는 150만명, 토지결수는 50여만결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물론 국가의 대장에 등록된 수치이므로 실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 수치의 3분의 1도 채 안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왜군의 방화와 약탈로 인한 문화적 손실이 매우 컸다. 불국사와 경복궁을 비롯해 서적 등 기타 주요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그리고 수만명이 포로로 잡혀가 나가사키[長崎]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

●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영향과 북인(北人)의 집권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은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임란(壬亂)에서 사실상 패전국(敗戰國)이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막부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막부로 교체되었다. 당초 히데요시는 이에야쓰를 포함한 5인의 대로(大老)에게서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섬긴다는 서약까지 받아냈었다. 그러나 막상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쓰는 1600년 10월의 세키가하라회전[關ケ原會戰]에서 히데요시의 군사력을 격퇴시키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1603년에는 고요제이제[後陽成帝]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칭호를 받아 도쿠가와 막부시대(幕府時代)를 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막부를 장악한 쇼군[將軍] 아래 여러 다이묘[大名]가 각 번을 맡아 다스리는 막번(幕藩)체제로 운영되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문화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포로로 끌려간 조선 도공(陶工)들이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으며, 호남에서 잡혀간 유학자 강항(姜沆)은 퇴계의 성리학을 전파해 도쿠가와 시대에 성리학이 정학(正學)의 위치를 차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명나라도 임진왜란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대군을 파견해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 틈을 탄 만주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해 나감에 따라 명청교체(明淸交替)의 계기가 되었다.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인명 손실은 물론이고, 왜란 전 170만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결로 감소될 정도로 많은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으며, 전주사고(全州史庫)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소실되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일부 부유한 백성들은 군공(軍功)이나 납속(納贖)으로 양반의 지위를 획득한 반면, 가난한 백성들은 조선 지배체제를 정면에서 거부했다. 전란으로 농경지가 황폐화되고 그나마 생산되는 식량이 명나라 군사들에게 먼저 조달되면서,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는 인상살식(人相殺食)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이 지배층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했다. 왜란 초기에도 백성들이 장예원(掌隸院)을 부수고 왕자를 생포해 일본군에 인계한 적이 있었으나, 이런 행위들은 우발적인 것일 뿐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594년 발생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과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은 주모자들이 조선왕조의 타도와 새로운 국가 건설을 내걸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의병대장을 자처하며 천안, 직산 등지를 근거지로 봉기한 송유진은 계룡산, 지리산 일대로의 세력 확장에 성공하자, 1594년 정월 보름날 서울까지 점령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아산 평택의 병장기(兵仗器)를 약탈해 북상의 의지를 드높였으나 직산에서 충청병사 변양준(邊良俊)에게 체포되어 사형당함으로써 실패했다.

본관이 전주로서 왕족의 서얼(庶孼)이었던 이몽학은 왜란 중에 장교가 되었으나,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 등과 함께 백성들을 모아 홍산(鴻山)을 점령하고 이어 임천군, 정상, 청양, 대흥을 함락시켰다. 이몽학은 충청도의 요충지인 홍주(洪州)를 점령하려 했으나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의 방어전(防禦戰)으로 실패했다. 그러자 그의 부하 김경창(金慶昌) 등 3인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몽학의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지방관들은 도주하거나 항복하고, 수많은 이민(吏民)들이 반란군에 호응해 그 무리가 수만명에 달하는 기세를 올려 조선 왕실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만 33명이며, 지방에서 처형된 사람도 100명이나 되었다. 그러고도 연좌율을 적용하면 너무 많은 인명이 살상될 것이라 우려한 조정이 특별한 경우에만 연좌율을 적용할 정도로 관련자가 많았다.

국문(鞫問)에서 이몽학의 잔당들은 수많은 의병대장들을 동조자라며 끌어들였다. 김덕령(金德齡), 최담령(崔聃齡), 홍계남(洪季男), 곽재우(郭再祐), 고언백(高彦伯)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의병대장은 이몽학과 내통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으나 백성들의 신망이 높은 전쟁 영웅들을 제거하려는 선조(宣祖)의 복심에 따라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장살(杖殺)되었고, 이산겸(李山謙)도 이 사건과 연루되어 죽고 말았다.

새 왕조 건설의 기치를 내건 송유진의 반란과 이몽학의 반란에 백성들이 대거 가담했음은 백성들이 조선왕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백성들이 조선왕조 자체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런 상황은, 집권 사대부계급에게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임진왜란은 또한 집권당의 교체를 가져왔다. 전란 초기 의주까지 몽진한 선조는 압록강을 바라보며 이런 시를 지었었다.

관산(關山)에 뜬 달을 바라보니 통곡(痛哭)이요
압록강 찬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쓰리도다.
조신(朝臣)들이여, 금일(今日) 이후에도
서인(西人)이요, 동인(東人)이요 나뉘어 싸울 것인가?

그러나 '서인이요, 동인이요 나뉘어' 싸우는 당파를 권력 강화에 이용한 인물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다. 근왕병 모집시 단 한명의 백성도 응하지 않을 정도로 조정이 불신받는 상황에서도, 선조는 오직 자신의 안위와 권력만을 생각했다. 국망(國亡)의 위기에서 한숨 돌리게 되자 임금과 신료들은 나라가 쇠약해진 이유를 찾아 해결을 도모하려 하기보다는 상대 당에 책임을 전가하는 파쟁에 돌입했다.

전란의 와중인 1594년에 발생한 이경전(李慶全)의 이조전랑 추천 문제는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사이를 크게 벌려놓았다. 북인 영수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을 당시 이조전랑으로 있던 남인 정경세가 후임으로 불가하다고 고집해 남인과 북인 사이에 파쟁이 불거진 것이었다. 정경세가 유성룡의 문인인 까닭에 이산해는 이를 유성룡이 사주한 것으로 간주했고, 이는 두 당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끔 만들었다. 유성룡을 지지하는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이수광(李睟光), 윤승훈(尹承勳), 한준겸(韓浚謙) 등은 남인이 되고, 이산해를 지지하는 유영경(柳永慶), 기자헌(奇自獻), 박승종(朴承宗), 홍여순(洪汝諄), 이이첨(李爾瞻) 등은 북인이 되었다.

북인들은 의병대장을 대거 배출한데다 일본에 대한 강경론을 주도해 선명성에서 앞서갔다. 북인들의 조정 진출은 의병대장을 대거 배출한 공적 때문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기도 했다. 서인들도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 같은 이름 높은 의병대장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의병대장의 주류는 북인들이었다. 특히 북인의 종주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휘하에서 의병대장들이 대거 배출되었는데,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조종도(趙宗道) 등이 이들로서 김덕령도 북인이었다. 북인들은 선조 재위 31년(서기 1598년) 남인 영수 유성룡이 화친을 주장한 것을 빌미로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배'라고 공격하면서 그를 삭탈관작시킨 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북인들의 독주는 다른 당파, 특히 서인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 다시 반정의 싹이 트고 있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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