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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38.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과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

개마기사단 |2011.10.14 01:12
조회 231 |추천 0

 

조선의 지배층이 위기 극복에 실패하면서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바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지배층이 외국의 군사력을 불러옴으로써 조선은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후 일부 유학자들과 민중들은 외세 축출을 위해 의병항쟁을 전개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압도적인 무력에 눌려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지배층은 외세 극복에 나서기는커녕, 오히려 외세에 기생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했고, 이는 결국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 동학의 창건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 움직임이 좌절했음을 의미했다. 또한 조정 내의 적극적인 개혁세력의 몰락을 의미했다. 당시 백성들은 개화당의 각종 정책들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의 유교는 신분제 유지를 위한 지배이념에 불과했으며, 불교는 극한 탄압으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고, 안으로는 신분제 철폐 등의 사회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세력의 등장을 희구하게 되었다. 이럴 때 등장한 것이 바로 동학(東學)이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는 1860년 4월 5일, 자신의 고향인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에서 새로운 경지를 체험했다.

'뜻밖에도 이 해 4월 나는 마음이 떨리고 몸이 전율했다. 병이라 해도 증세를 잡을 수 없고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이 때 어떤 선어(仙語)가 내 귀에 들어와서 나는 문득 소스라쳐 일어나 캐어묻자,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고 부르는데 너는 상제로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중략) 내가 "그러면 서교(西敎)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렇지 않다. 내게는 영부(靈符)가 있는데 그 이름은 선약(仙藥)이라 하고 그 형상은 태극(太極)이며, 또 궁궁(弓弓)과 같다. 내게서 이 영부를 받아 사람들의 질병을 구해 주고 나에게서 이 주문(呪文)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라. 그러면 너도 장생할 것이며 천하에 포덕(布德)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최제우(崔濟愚)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布德文)'

마치 불교의 해탈과 같은 이 때의 체험을 최제우는 새로운 민족종교 동학의 창건으로 연결시켰다. 최제우는 천주교의 하나님의 개념에서 중요한 시사를 받았으나, "나는 동쪽에서 나서 동쪽에서 도(道)를 받았으므로, 도는 비록 천도(天道)지만 학(學)은 동학이다. (중략) 내 도는 이 땅에서 받았으며 또 이 땅에서 펼 것이니, 어찌 서학(西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그 기저는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한 저항 논리였다.

최제우가 서학에 대해 "우리의 도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르다."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비슷하지만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 등 우리의 전통사상을 주축으로 삼은 것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 동학의 중심 개념

동학은 일종의 종교였는데, 시천주(侍天主)신앙이 중심이 되었다. 모든 백성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해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구제신앙이 동학의 핵심 교리였다. 최제우는 한울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의 섭리에 따르면 온 세상의 질서가 회복되고 사람들이 일체(一體)로 돌아갈 수 있다고 설파했다.

동학은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같이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이느 최제우의 '천지만물 중에 사람만이 가장 신묘한 존재다.'라는 사상의 구체화기도 했다. 이는 '인내천(人乃天)'과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으로 집약되며,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양반 신분제에 대한 부정을 담고 있는 혁명적 이론이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동학의 존엄사상은 '사람이 본래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라.'는 데 근거한 교리였다.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겠는가? 나는 비록 부인이나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 만하면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 만하면 스승으로 모신다.

해월설법(海月說法)'

이는 동학이 남녀나 계급을 극복하는 인간존중과 평등의 개념을 갖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민주주의사상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동학이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사회구원의 강한 메세지 때문이었다.

'소위 서학하는 사람 암만 봐도 명인 없네. 서학이라 이름하고 내 몸 발천(拔薦)하였던가? (중략) 내가 또한 신선되어 하늘 위를 날아가서 개 같은 왜적(倭敵)놈을 한울님의 조화받아 하룻밤 사이에 멸하고저.

안심가(安心歌)'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정세 속에서 동학의 강력한 사회구원 메세지는 민중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동시에 피안의 세계를 제공했다.

동학이 백성들에게 호응받은 것은 사회구원 외에 개인구원의 메세지도 강하게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제우는 개인구원의 방도로 성(誠), 경(敬), 신(信) 세가지를 꼽았다. 최시형의 '우리 도는 성, 경, 신 세가지에 있다. 만약 큰 덕이 아니면 실로 행하기 어려운 것이고, 성, 경, 신에 능하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것이다.'라는 가르침이 이를 말해준다. 최시형의 설법 중에 성, 경, 신은 모두 한울님이 충심이 되는데 한울님을 진심으로 믿는 것이 신(信)이며, 한울님에 대한 지극한 정성이 성(誠)이고, 한울님에 대한 진정한 공경이 바로 경(敬)이었다.

한울님에 대한 신(信)은 단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해야 한다. 이것이 동학의 중요한 개념인 '시천주(侍天主)', 곧 '한울님을 모신다.'는 개념이었다. 동학은 이 외에도 한울님을 모시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거나 질병을 퇴치할 수 있다는 개념을 담고 있었다.

동학에서 부적과 주문을 중요시한 것은 이런 신앙 때문이었다. 동학의 종교적인 수행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것이 중요한 의식이었다. 본주(本呪)는 '한울님을 위하면 한울님이 내 사정을 돌봐주시고, 한울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잘 될 것이다.'라는 것과,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를 체득할 수 있고 한울님을 길이 잊지 않으면 만사가 저절로 깨달아진다.'는 것 등이며, 강령주(降靈呪)는 '한울님의 영기가 지금 저에게 크게 내리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은 동학 포교의 중요한 방편이었다. 동학교도들은 주문을 외면서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 마시면, 바라는 모든 바가 이루어지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 동학의 포교

동학은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을 함께 담은 교리로 백성들의 호응을 받았다.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던 최제우는 1860년 9월 경주에서 체포되었으나, 수백명의 제자와 신도들의 청원에 의해 석방되었다. 이는 동학의 교세를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되어 사화 불안과 질병 등이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급속히 전파되었다. 불과 몇년 사이에 동학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이자 민심을 현혹시키는 사교(邪敎)라고 규정짓고 탄압에 나섰다.

최제우는 각지에 접소(接所)와 그 책임자인 접주(接主)를 두어 신도들을 조직화했다. 1863년 8월에는 위험을 감지하고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해 대비책을 마련해 놓은 다음 포교에 전념하다가, 그 해 12월 20여명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당하였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은 관헌의 추적을 피해 소백산으로 이주하면서 영월, 인제, 단양 등지로 동학을 확장시키고, 1878년에는 개접제(開接制), 1884년에는 육임제(六任制)를 마련해 신도들을 조직화했다. 1880년에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고, 이듬해에는 단양에도 경전간행소를 두어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했다.

확장된 교세에 따라 1885년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본거지를 옮긴 최시형은 1892년부터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하는 합법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892년 12월에는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에 집결시켜 교조의 신원과 탄압 중지를 청원했다. 이것이 제1차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다. 1893년 3월에는 40여명의 대표가 광화문에서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했고, 조정 측의 회유로 해산했음에도 조정이 탄압하자 4월 말에는 보은에 수만명의 신도가 집결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이처럼 당초에는 교조신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 전개 과정에서 조선 내부의 사회적 모순과 일본, 청나라의 개입이 맞물리면서 반봉건, 반외세의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으로 전환된 것이었다. 동학조직이 반외세, 반봉건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대중조직으로 전환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커다란 폭발력을 지니며 확산되었다.

●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의 전개

동학교단은 교조신원운동에 주력하려는 최시형(崔時亨) 등의 북접(北接)과 사회 문제 전반의 해결에 주력하려는 남접(南接)으로 나뉘고 있었다. 남접은 1893년 4월의 교조신원을 위한 보은 집회 와중에 독자노선을 걸으려 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조짐이기도 했다.

'이미 이 무렵, 그 무리 4천여인은 전라도 전주 근방에 모여 감사에게 3개조의 요구를 제기했다. "첫째, 국인(國人) 중 우리 당을 지목해서 사도(邪道)를 주장하는 것이라면서 경멸하는 자가 있으니, 명령을 발하여 그 어리석음을 바로 잡을 것, 둘째,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에 해를 끼치는 존재니 속히 이를 쫓아낼 것, 셋째, 근래 지방의 관리들이 포악하게 거두고 억지로 빼앗아 생민이 도탄에서 고통을 당하니, 마땅히 이들 지방 관리를 쫓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3개 조를 들어주지 않으면 우리들 4천여인은 한 걸음도 이곳에서 물러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申聞) 1893년 4월 18일자'

전봉준(全琫準), 황하일(黃河一) 등 남접의 우두머리들은 북접의 보은 집회와 별도로 금구 원평리에서 농민대회를 연 후 서울로 북상하려 했다. 그러나 보은 집회가 해산된 후 동학 간부들의 반대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동학운동은 교조신원운동에서 점차 정치운동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고, 전라도 고부 지역의 농민운동과 결합되면서 엄청난 폭발성을 보였다.

곡창지대인 전라도 서북 지역은 조선 후기 사회 모순이 중첩된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왕실 소유 토지인 궁방전(宮房田)이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를 관리하는 감관(監官)의 농간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세운반을 맡은 전운사(轉運使)와 균전관(均田官) 등이 농민들을 착취하여 수탈에 열중하는데다, 개항 이후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이런 와중에 1892년 말 고부군수로 부임해온 조병갑(趙秉甲)의 수탈은 농민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그는 면세를 조건으로 황무지 개간을 허가하고는 추수기에는 세금을 거두었으며, 부자들에게는 불효(不孝), 불목(不穆) 등의 죄를 씌워 재물을 빼앗았다. 특히 만석보(萬石洑)는 원성의 표적이었다. 만석보는 동진강(東津江)에 농민들의 노동력으로 건설한 수리시설이었는데, 농민들은 수차례에 걸쳐 과중한 수세(水稅)의 경감을 청원한 바 있었다. 그러나 조병갑은 경감은커녕, 강의 하류에 필요하지도 않은 새로운 보를 쌓고는 고을의 수세를 징수하여 농민들을 극도로 분노케 했다.

전봉준은 1893년 12월 장두(壯頭)의 자격으로 군수 조병갑에게 두차례에 걸쳐 수세 경감을 호소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동지 20명과 함께 각 마을 집강(執綱)에게 보내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해 봉기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전주 점령과 서울 진격 계획을 갖고 있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 때에 도인(道人)들은 선후책(先後策)을 토의, 결정하기 위해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梟首)할 것.

둘째,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셋째,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의 것을 빼앗은 탐리(貪吏)를 공격하여 징계할 것.

넷째, 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京師)로 바로 향할 것.

위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전략에 능하고 만사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이하 판독 불능)

갑오농민항쟁 사발통문(甲午農民抗爭沙鉢通文)'

1894년 2월 전봉준은 김도삼(金道三), 정익서(鄭益瑞), 최경선(崔景善) 등과 함께 농민들을 거느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해 수세미(水稅米)를 농민에게 돌려주고 아전들을 처벌했다. 조정에서는 조병갑의 행위를 두둔해서는 사태가 악화될 것이라 판단하고 그를 파면한 다음,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했다. 신임 군수의 무마책으로 농민들의 항쟁은 그 강도가 떨어졌다. 그러나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가 농민봉기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재차 항쟁이 불길이 붙었다.

● 제1차 봉기

1894년 4월, 전봉준은 김기범(金箕範), 손화중(孫華中) 등의 동학접주들과 함께 무장현(茂長縣)에 모여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창의문이 전달되자 근방의 10여개 읍에서 호응하여 10여일만에 1만여명이 모였다. 전봉준은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4월 말 각처에서 봉기한 농민군을 고부 백산(白山)으로 집결시켰다. 전봉준은 동도대장(東徒大將), 손화중과 김개남은 총관령(總管領)에 추대되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이 자리에서 4개 행동강령을 결정했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하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며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셋째, 일본 오랑캐를 쫓아 버리고 군왕의 정치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없애라.

정교(鄭喬)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갑오(甲午)조'

이 자리에서 농민군은 '우리가 의기(義旗)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목을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兩班)과 호강(豪强)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과 방백(方伯)과 수령의 및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라는 유명한 창의문을 발표하고 무장봉기(武裝蜂起)에 나섰다.

농민군은 손쉽게 부안 관아를 점령했다.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무남영(武南營)의 영관 이경호(李景鎬)를 보내 혁명군을 토벌하게 했으나, 그 해 5월의 황토현전투(黃土峴戰鬪)에서 농민군은 2백여명의 관군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두고 그 여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에게 약 8백여명의 군사를 주어 진압하게 했으나 중도에 도망자가 속출하는 등 관군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졌다. 홍계훈의 증원 요청에 따라 조정에서는 총제영중군(總制營中軍) 황헌주(黃憲周)에게 증원군을 주어 영광 법성포(法聖浦)에 상륙시켰다. 그러나 홍계훈은 농민군과의 접전에서 패배했고, 5월 31일에 농민군은 드디어 전주성을 점령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과 대치하면서 두차례에 걸쳐 원정서(原情書)를 관군에게 제시했다. 제1차 원정서는 14개 조목, 제2차 원정서는 24개 조목으로 되어 있었는데, 탐관오리의 숙청 및 외국 상인과 국내 특권 상인의 배격, 쌀의 국외 유출 방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6월 11일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고, 농민군은 전주성 점거 10여일만에 철수하고 해산해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했다.

전라도 53개 소 관아 안에 설치된 일종의 민정기관인 집강소는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고, 각 집강소에는 분장을 나누어 깁강 밑에 서기(書紀), 성찰(省察), 집사(執事), 동몽(童蒙) 등의 임원을 두어 행정 사무를 분담하게 했다. 집강소에서는 폐정개혁 12개조를 실천에 옮겼다.

'폐정개혁안(弊政改正案) 12개조

첫째, 도인과 조정 사이에 오래 끌어온 혐오감을 씻어 버리고 모든 행정을 협력할 것.

둘째,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해 내 일일이 엄벌에 처할 것.

셋째, 횡포한 부호(富豪)들을 엄징할 것.

넷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은 징습할 것.

다섯째, 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여섯째,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양립을 벗겨 버릴 것.

일곱째, 청춘과부는 재가를 허락할 것.

여덟째, 무명잡세는 모두 거둬들이지 말 것.

아홉째, 관리의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열째, 외적(外敵)과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열첫째, 토지는 평균하게 나누어 경작케 할 것.

동학사(東學史)'

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은 전라도 유생 정석모(鄭錫謨)가 쓴 갑오약력(甲午略歷)은 집강소가 설치된 후 '이른바 고을 군수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 행정을 맡아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고을원들을 추방하니 이서배들은 모두 동학당에 들어 성명(成命)을 보존했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전봉준은 수천명의 군중을 끼고 금구 원명에 틀고 앉아 (전라)우도에 호령했으며, 김개남은 수만명의 군중을 거느리고 남원성을 타고 앉아 (전라)좌도를 통솔했고, 그 밖의 김덕명(金德明), 손화중, 최경선 등은 각기 한 지방씩 할거하여 탐학불법을 일삼으니 개남이 가장 심했다.'고 적고 있다. '개남이 가장 심했다.'는 표현은 김개남이 가장 급진적이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전봉준이 조선의 국체는 보존한 채 고종 주위의 벼슬아치들만 처벌할 것을 주장한 데 비해, 김개남은 원 이름 영주(永疇)를 남조선을 開創한다는 뜻에서 개남(開南)으로 개칭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새 나라 창건을 기도했던 것이다.

● 제2차 봉기

동학농민혁명군이 봉기하자 고종(高宗)은 1894년 5월에 직접 윤음(倫音)을 내려 불법한 지방관의 징계를 약속하는 등 봉기 무마에 주력했다. 그러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정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해 농민들의 북상을 막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군사 파견을 요청했다. 자국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인 이 조치는, 조선을 외국 군사력의 각축장으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체결된 천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청군의 진주는 일본군의 진주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파병 요청을 받은 청나라가 즉각 섭지초(葉志超)의 군대를 아산만에 상륙시키자, 일본군도 일본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왔던 것이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한 다음,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입궐시켜 중대 정무와 군무를 체결하게 했다.

청군과 일본군의 진주로 이제 혁명군은 반봉건의 과제 외에 반외세의 과제를 실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재차 거병했으니 이것이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 제2차 봉기였다.

제1차 봉기 때에는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의 남접(南接)과 최시형의 지도에 따르는 북접(北接)이 각각 다른 노선을 걸었었다. 북접의 최시형은 종교의 틀을 벗어난 정치운동에 반대하다가, 동학 중진들의 권고를 받고 봉기에 동의해 공주목과 진잠현(鎭岑縣)의 경계인 성전평(星田坪)을 점거하고 이어서 회덕현을 습격했으나 갑자기 해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봉기에서는 오지영(吳知泳) 등의 권유로 반봉건, 반외세 투쟁에 함께 나서게 되었다. 손병희(孫秉熙)의 지휘 아래 북접의 농민군도 거병해 청산(靑山)에 집결하고, 곧 남접과 북접의 병력이 논산에서 합세해 공주로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11월 하순, 농민군은 목천 세성산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서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조선 관군과 함께 공주로 진격해, 일본군은 우금치에, 관군은 이인(利仁)과 효포(孝浦)에 각각 진을 쳤다. 12월 초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웅치(熊峙) 방면으로 총공격을 가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공주 남쪽 30리 지점의 경천까지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개남의 지원군 5천여명이 합류하자 사기가 오른 농민군은 다시 공주로 진격하여 우금치 가까이 진을 치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을 전개했다.

6~7일간 계속된 40~50회의 격전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은 우수한 근대식 화기(火器)로 무장한 일본군의 총격과 포격에 의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북상하다 청주에서 관군의 습격을 받아 다시 전주로, 태인으로 쫓겨 내려왔다가 김개남은 끝내 체포되고 말았다. 손병희의 북접 주력부대도 충청도로 북상했다가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패퇴, 충주에서 해산되었다. 금구, 원평 방면으로 도주했던 전봉준은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숨어 들어가 재기를 모색하던 중, 그 해 12월 말에 관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듬해 4월에 전봉준(全琫準)은 손화중(孫華仲), 김덕명(金德明) 등과 함께 사형당해 혁명운동으로 일관한 삶을 마쳤다. 김개남(金開南)은 이미 1월에 전주에서 斬首당한 뒤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는 조선 민중의 자주적인 반봉건(反封建), 반외세투쟁(反外勢鬪爭)의 좌절을 의미했다. 나아가 이는 조선이 자력으로 자주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내적으로는 조선 조정도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는 정치적 혁신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대외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에서 보여준 무력항전(武力抗戰)의 정신은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으로 이어졌다.

●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

반일의병항쟁이 동학농민혁명 실패 직후에 발생한 것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후 이에 참가한 농민들은 커다란 피해를 당했다.

'서울과 지방 각 도에 영을 내려 동학 여당(餘黨)을 잡으라고 하였다. 수령들은 이들을 회유해 귀화시켰는데, 다 죄를 묻지 않았다. 오직 호남의 장흥, 강진의 이교(吏校)들이 많은 비(匪)를 죽여 비난이 높았다. 이 때문에 그 가족들이 떼를 지어 들고 일어나니, 모두 체포해 전후로 수백명을 죽였다.

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이런 상황에서 집으로 귀가할 수가 없었던 농민들은 산발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1895년 3월의 상황을 기록한 '화적들이 크게 성해 도로들이 막혔는데, 이것은 모두 동학의 나머지 무리 때문이다.'라는 속음청사(續陰晴史)의 문헌과 '농민 봉기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계속 퍼져가고 있으니, 온 나라의 근심 걱정이다.'라는 고종실록(高宗實錄)의 기록은, 동학농민혁명군의 주력부대는 해산되었지만 잔존세력들은 계속 항거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전투 경험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초보적 수준의 무장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전기만 있으면 다시 무장투쟁에 나설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학농민혁명 와중인 1894년에 군대를 조선에 진주시킨 일본은 조선에 내정 개혁을 권고하는 한편,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김홍집(金弘集)을 총리대신으로 삼는 제1차 김홍집 부일내각(附日內閣)을 성립시켰다. 이듬해 일제(日帝)와 부일내각이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고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살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일부 유생들이 이에 저항해 봉기했고, 여기에 무장 농민들이 대거 가담함으로써 의병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유인석(柳麟錫)과 이춘영(李春永)은 제천에서, 이소응(李昭應)은 춘천에서, 김복한(金福漢)은 홍주에서, 권세연(權世淵)은 안동에서, 이강년(李康秊)은 문경에서, 김도현(金道鉉)은 영양에서, 노응규(盧應奎)는 진주에서, 허위(許蔿)는 금산에서, 기우만(奇宇萬)은 장성에서 각각 봉기해 전국 각지에서 맹렬한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을미의병항쟁(乙未義兵抗爭)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김홍집의 부일내각이 붕괴되고 일본의 침략정책도 일시 중단됨으로써 당면 목표를 달성하고 종결되었다.

병오의병항쟁(丙午義兵抗爭)은 1905년 9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야욕을 노골화하자 발생했다. 1905년 7월에 맺어진 가쓰라-데프트 밀약과 8월의 제2차 영일동맹조약(英日同盟條約)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1월에 무력을 통한 강압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해 한국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민영환(閔泳煥), 조병세(趙秉世), 송병선(宋秉璿) 등 정부 관료들은 불법적인 늑약(勒約)의 폐기를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인 장지연(張志淵)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본의 국권침탈을 규탄함으로써 민중의 집단시위를 유발시켰다.

이에 원주에서 원용팔(元容八), 죽산에서 박석여(朴昔如), 영춘에서 이강년(李康秊), 영천에서 정환직(鄭煥直), 저산(猪山)에서 고광순(高光洵), 홍주에서 민종식(閔宗植),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 영해에서 신돌석(申乭錫), 영덕에서 정용기(鄭鏞基) 등이 전국 각지에서 거병하였다. 이들 의병부대는 일본의 군사시설을 공격하고 일본 군경과 교전하면서 국내에서 상업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살해하는 한편, 매국적 책동을 일삼는 친일파 인사들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을사조약 이후의 의병항쟁은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접해 해산 군인들이 가담하면서 그 전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먼저 서울 시위대에서 시작된 한국군의 항전은 원주, 강화 등 지방의 진위대로 확대되었고, 특히 민긍호(閔肯鎬)가 지휘하는 원주 진위대는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를 넘나들며 서울진공작전의 중추를 이루기도 했다.

1908년, 의병들은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결성했다. 그 해 음력 정월에 양주로 집결한 의병부대는 모두 1만명에 달했다. 총대장 이인영(李麟榮)과 군사장 허위(許蔿)를 비롯해 전라도 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충청도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관동(關東) 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교남(喬南) 창의대장 신돌석(申乭錫), 관서(關西)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關北)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진동(鎭東) 창의대장 허위 등이 수뇌부였다. 13도 창의군의 총사령관인 이인영은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부대가 국제법상 교전단체임을 선언하고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13도 창의군은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여 허위가 선발대를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총사령관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귀향하자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의병들은 각기 분산해 독자적인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수행했다. 이 중 노령(露領)의 의병들은 1908년 두차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정미의병항쟁(丁未義兵抗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일제(日帝)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전개해 마을들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대량 살육했다. 의병항쟁은 이로써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1909년 말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915년경에 소멸되었으나, 일부는 만주로 이동해 독립군(獨立軍)이 되었다.

● 대한제국의 수립

갑오경장(甲午更張) 와중인 1894년 7월, 조선 조정은 고종을 '대군주(大君主)'로 그 위상을 격상시켜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조선의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했다. 일본이 조선의 개국기년 사용을 허락한 것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내외에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 이듬해인 1895년 8월 27일에는 국호를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개칭하고 대군주를 '황제(皇帝)'로 격상시키려고 했으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애 대한 각지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고종이 이듬해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해 중단되었다.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거주는 러시아를 비롯, 각 열강들의 이권 침탈과 친로(親露) 수구파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졌다.

그러자 1896년 7월에 창립한 독립협회(獨立協會)와 자주적 보수파를 중심으로 고종 환궁운동이 일어나, 1897년 2월 고종은 파천 1년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고종의 환궁 뒤 독립협회 중심의 개화파와 일부 보수파들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했다. 1896년 1월부터 사용하던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1897년 8월 16일부터 광무(光武)로 고쳐 건양 2년을 광무 원년으로 삼고, 그 해 10월 12일 원구단(圓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개칭했다.

독립협회 중심의 개화파와 수구파는 정체(政體) 문제로 대립했다. 개화파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 세력은 1898년 절영도(絶影島)의 러시아 조차(租借) 문제로도 격돌했는데, 이를 침략의 첫 단계로 규정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에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서울 종로에서 열어 절영도 조차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수 등을 요구했다. 이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철회, 일본의 석탄고 기지 환수라는 성과를 가져왔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렌 협정을 체결했다. 실로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들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이에 힘을 얻은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해 1898년 11월 2일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 공포를 성공시켰다.

개화파의 이런 성과에 수구파들은 위협을 느꼈다. 수구파는 독립협회의 목적이 의회 설립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는 내용의 전단을 뿌렸다. 놀란 고종은 경무청(警務廳)과 친위대(親衛隊)를 동원,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조병식(趙秉式) 중심의 수구파 정부를 수립시켰다. 독립협회가 자신들의 조선 점령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일본도 수구파에 가담해 독립협회의 활동을 탄압할 것을 권고했다. 이를 받아들인 고종은 결국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했다.

이에 힘입은 수구파 내각은 1899년 8월 17일,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 공포했다. 국호는 여전히 대한제국이었으며 정체는 전제군주제라고 규정했다. 황제에게 행정권은 물론, 입법, 사법권과 육, 해군 통수권까지 부여하면서도 그를 제한할 수 있는 어떠한 조항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구시대로의 퇴행에 가까웠다.

대한제국은 황제권 강화에 모든 정력을 기울여 군사정책의 중점을 국가의 국방력 강화보다는 황실 호위 병력의 강화에 두었으며, 경제정책에서도 전국의 광산, 철도, 홍삼 제조, 수리관개사업 등의 수입을 정부 예산과 분리해 황제의 수입으로 삼고, 상업과 공장 설립에서도 민간 산업을 억제하고 황실 직영업종에 중점을 두었다.

대한제국은 토지를 측량하는 양전사업(量田事業)과 토지 소유자에게 증서를 발급하는 지계사업(地契事業)을 중점 사업으로 삼아 1898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이듬해부터 양전사업을 실시했다. 1901년에는 양지아문 대신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해 토지 문제를 다루었다. 양전사업과 지계사업은 당초 근대적인 토지제도의 수립에 목적을 두었으나, 실제 시행 결과 봉건적인 지주의 권한만 강화됐을 뿐 농민들의 요구 사항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양전사업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농민 소유였던 토지들이 다수 황실 소유의 궁방전(宮房田) 등으로 강제 편입되면서 정부와 농민 사이에 크고 작은 분쟁들이 발생했다. 이처럼 대한제국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방기하고 황실 이익 극대화의 여러 사업을 전개하는 동안, 러시아와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의 국제 정세는 근본적인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제정 러시아에 과도하게 의지함으로써 많은 이권을 빼앗겼으며, 이에 반발하는 일본을 무마하기 위해 또 여러 가지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조선 점령에 강력한 방해세력으로 작용하자 대한제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기미를 감지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국외중립(國外中立)을 선언했으나, 일본은 이런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1904년 2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일전쟁 개전 직후 일본은 서울을 점령하고 2월 23일 대한제국을 위협하여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李址鎔)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명의의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의 내용은 첫째, 한국 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둘째,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할 것, 셋째,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것, 넷째,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며, 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다섯째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는 것 등으로서,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크게 훼손시킨 것이었다. 민중들은 이 조약에 서명한 이지용과 참서관(參書官) 구완희(具完喜)의 집에 폭탄을 던지는 등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일본은 같은 해 7월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治安權)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 가는 등 친일파들의 동조 속에 조선 침략을 더욱 가속화해 갔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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