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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42.민족문화수호운동(民族文化守護運動)

개마기사단 |2011.10.14 01:27
조회 256 |추천 0

 

● 한국 침략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 날조

일제(日帝)는 유구한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있는 우리 민족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한국 역사를 왜곡하였다. 한국 역사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열등감을 조장하고,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 의식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설립하여 조선사(朝鮮史)라는 방대한 양의 역사서를 발행하였다. 일제가 날조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은 한국사의 자율적, 주체적인 발전을 부정하고, 정체성, 타율성, 당파성만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일본인과 조선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는 조선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정체성론(停滯性論)이란 조선의 역사적 발전이 정지되어 있었다는 억지 이론이다. 즉 우리 민족의 역사는 왕조 교체를 되풀이하여 왔지만 사회, 경제적 구조에 아무런 내적 발전이 없는 단순한 왕실의 변동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근대 사회로의 이행에 필요한 봉건사회의 단계를 거치지 못하였다는 중세부재론(中世不在論)과 통한다. 심지어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까지도 조선의 사회, 경제적 발번 단계는 일본의 10세기경의 수준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타율성론(他律性論)이란 우리 역사가 민족의 주체적 역량에 의해 자율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항상 외세의 간섭에 의해서 이끌려 왔다는 억지 주장이다. 일제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역사의 시작부터 기자(箕子), 위만(衛滿), 한군현(漢君縣) 등 중국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고 남한 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경영설(任那經營說)을 날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타율성론은 조선이 반도 국가로서 대륙 세력이나 해양 세력의 간섭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는 '반도적 숙명론'과 통하는 것이다.

당파성론(黨派性論)은 조선시대의 정치사가 사적인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충돌한 '당쟁의 역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로 인해 결국 나라도 망하였고, 아예 당파성이 조선인의 민족성으로 고착되어 단결이 불가능한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식민사관의 논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조선 사회는 수백년 동안 사회, 경제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채 분열과 파쟁만 거듭했고, 스스로 근대 사회로 발전할 가능성도, 독립을 유지할 능력도 없는 반도(半島)로서의 숙명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조선을 보호하고 근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는 억지 논리에서 이어진다. 더구나 일제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본래 같은 조상,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하면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고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식민사관은 현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아직도 일본의 국수주의적 지식인들은 근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고 침략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한국 역사를 왜곡하여 세계에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이 한국 역사를 바라보는 편파적인 시각은 몇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조선 후기에 경제적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양반 중심 체제가 점차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농층이나 상업 자본가 등 새로운 사회 계층이 성장해 갔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변화는 근대 사회로의 발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정체성론(停滯性論)은 분명 역사적 사실과 틀린 이론이다.

둘째, 반도 국가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외세의 간섭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같은 반도 국가로서 유럽 최고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로마 제국의 예를 통해 간단히 부정된다. 반도는 대륙과 해양 문화를 다양하게 받아들여 자기화함으로써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조건도 된다. 또한, 우리 역사만 볼 때도 영토가 한반도 내로 국한된 고려(高麗) 이후 외세의 침략에 맞서 끊임없이 항전하면서 주체성을 유지하였고, 한글과 같은 뛰어난 민족 문화를 창조하였다.

셋째, 당파성이 민족성으로 고착되어 민족적 단결을 이룰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가능하다. 붕당정치는 학문과 이념을 달리하는 정치 집단 간에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여론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 형태이며, 권력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오늘날의 정당 정치에도 나타나고, 조선의 멸망은 붕당정치가 무너져 일당전제화되고 세도정치로 변질되었을 때 나타났다. 지배층 내부의 정치적 현상을 두고 민족성을 운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분열심을 조장하려는 억지 논리에 불과하다.

● 나라가 형체라면 역사는 정신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 역사의 주체적 발전을 밝히고 올바른 민족사를 정립하기 위한 노력은 민족주의사관, 사회경제사관, 실증사관 등 세가지 방향에서 전개된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라는 가히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가히 멸할 수 없으니, 대개 나라는 형(形)이나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은 홀로 존재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역사를 쓰는 까닭이다. 신이 존재하여 불멸하면 형은 때맞춰 부활한다.

박은식(朴殷植) 한국통사(韓國痛史) 서문'

이 글은 민족주의사관의 기본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록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했더라도 민족정신이 깃든 역사를 잃지 않는다면 빼앗긴 나라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야만적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주적, 주체적인 민족사의 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박은식(朴殷植)은 이러한 민족정신을 '조선의 혼(魂)'이라 강조하였고,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여 일제의 침략과 민족의 독립운동을 정리하였다. 한국통사는 19세기 중엽부터 일본의 한국 병합 직후(1864년~1911년)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침략 과정을 서술한 책이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갑신정변 때부터 1920년까지의 항일투쟁을 기록한 책이다.

신채호(申采浩)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을 확립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여 근대 민족사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이순신전(李舜臣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을 저술하여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였다. 이를 통해 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주체적 정신을 살려냄으로써,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고대사에 살아 숨쉬는 자주적, 주체적인 민족 고유의 사상으로서 '낭가사상(郎家思想)'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로는 이밖에도 신채호의 민족주의사관을 계승하여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저술하고 '조선인의 얼'을 강조한 정인보(鄭寅普)를 비롯하여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 등이 있다.

민족주의사관이 우리 역사를 이끌어 가는 민족정신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사회경제사관은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따라 우리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다는 특징이 있다. 유물사관이란 인류 역사를 움직여 온 원동력이 관념이 아니고 물질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마르크스는 인류 사회가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라 원시공산제 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왔고, 장차 사회주의로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보편적 발전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선의 역사적 발전의 전 과정은 가령 지리적 조건, 인종학적 골상, 문화 형태의 외형적 특징 등 다소의 차이는 인정되더라도, 외관적인 소위 특수성은 다른 문화 민족의 역사적 발전 법칙과 구별되어야 하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세계사적인 일원론적 역사 법칙에 의해 다른 민족과 거의 같은 궤도로 발전 과정을 거쳐 온 것이다. 그 발전 과정의 완만한 템포, 문화의 특수적인 농담(濃淡)은 결코 본질적인 특수성이 아니다.

백남운(白南雲)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앞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경제사학의 대표작 인물인 백남운(白南雲)은 우리 역사도 위에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인류 역사의 보편적 법칙에 따라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를 저술하여 우리 역사를 이러한 보편 법칙에 따라 기술함으로써 식민사관의 중세부재론(中世不在論)을 극복하였다.

한편,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랑케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실증사관이라 불리는 이 학풍은 철저한 문헌 고증을 통해 한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병도(李丙燾), 손진태(孫晉泰) 등이 중심이 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실증사학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학술단체였는데, 이들의 연구 성향은 일본 사학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식민사관을 제대로 극복하기에는 미흡하였다.

한편 전형필(全鎣弼)은 일제의 문화재 파괴에 저항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재 수집과 보존에 크게 기여하였다.

● 한글을 지킨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식민사관에 맞서는 국사 연구와 더불어 국어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3·1운동 이후 선구적인 한글 연구자인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1921년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조직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한글날을 제정하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한글 보급과 연구에 노력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최현배(崔鉉培), 이윤재(李允宰) 등을 중심으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발전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 및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을 제정하여 한글의 표준화에 크게 기여했다. 문맹퇴치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회원들이 강사로 나섰고 한글 강습 교재도 편찬하였다. 조선어학회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우리말 큰 사전'의 편찬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을 계기로 중단되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함흥영생고등여학교(咸興永生高等女學校)에 재학중인 학생 박영옥(朴英玉)이 등교길에 친구들과 한국어로 대화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건을 총독부에서 확대 조작하여 조선어학회의 회원들을 대거 검거한 사건이다. 당시 재판부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논리를 앞세워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하였다. 일본 경찰의 잔인한 고문으로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하였고, 대부분이 감옥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조선어학회는 광복 이후 한글학회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문화, 예술의 변화

1910년대의 우리 문학계는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 등이 주도하였다. 계몽적 성격이 매우 강했던 이들의 문학 활동은 개화기의 신문학을 갈무리하면서, 근대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갔다.

3·1운동 이후에는 다양한 문예 사조가 나타난다. 염상섭(廉想涉)의 '만세전', 현진건(玄鎭健)의 '빈처' 등과 같이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개인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나타난다. 또 3·1운동의 실패에 대한 좌절로 허무감에 빠져 퇴폐적인 낭만주의로 흐르는 경향도 있었는데, 주로 백조(白潮) 동인들이 그러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른바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한다. 카프(KAPF)를 중심으로 활동한 신경향파는 식민지 현실의 계급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박영희(朴英熙), 백철(白鐵) 등 일부 작가는 뒤에 전향하여 친일 활동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한편,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韓龍雲),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李相和), '통곡 속에서', '그날이 오면'의 심훈(沈熏) 등은 조국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적극적 저항 의식을 표현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저항 문학의 전통은 1930년대의 이육사(李陸史), 1940년대의 윤동주(尹東柱)로 이어진다.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하려 했던 이육사,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인 윤동주는 조국 광복의 희망과 확신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이 두 시인은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는 시처럼 조국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과 신경향파 문학에 대한 거부감이 나타나면서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운 순수 문학이 많아졌다. 이들은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문학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문학만을 위한 문학을 추구한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친일 문학 활동을 전개하는데, 서정주(徐貞柱), 모윤숙(毛允淑), 김동인(金東仁), 유진오(兪鎭午), 최재서(崔載瑞) 등 많은 인물이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군국주의 대외침략을 적극 옹호한 작품을 다수 창작하였다.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전혀 이름이 낯설지 않은 수많은 문인들이 친일 작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친일 활동이 오랫동안 망각된 채, 친일 문인들은 광복 이후에도 한국 문학계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 중 상당수는 국가의 문화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하고, 기념비를 세워 기념사업까지 전개하고 있다. 문화계의 친일 활동은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과 음악, 연극, 영화 부분에서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음악과 미술, 연극, 영화 등에서 서구와 일본의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구한말부터 유행하던 '애국가', '권학가' 등의 창가나 반일 민요, 주로 국외에서 불린 '독립군가'는 망국민의 서러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서양 음악에 바탕을 둔 가곡, 동요가 등장한다. 홍난파(洪蘭坡)의 '봉선화', 윤극영(尹克榮)의 '반달', 현제명(玄濟明)의 '희망의 나라로' 등이 대표적이었다. 국외에서 활동한 안익태(安益泰)는 애국가를 작곡하였는데, 이는 '한국 환상곡'이라는 교향곡 안에 들어 있는 합창곡이었다. 안익태는 외국에서도 항상 애국가의 합창 부분은 한국어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요즘 흔히 트로트라고 불리는 대중가요도 많이 만들어지는데,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황성옛터'나 이난영(李蘭影)이 부른 '목포의 눈물'은 지금도 많이 애창되는 곡이다.

하지만 이러한 음악 분야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친일 활동이 나타난다. 민족음악가로 불리는 홍난파나 현제명은 친일 음악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많은 친일 가요를 작곡하였다. 홍난파가 쓴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곳이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라는 노랫말로 끝나는 '희망의 아침'은 그 대표적인 곡이었다.

대중가요 쪽에도 친일 활동이 나타나는데, 가수 남인수(南仁樹), 백년설(白年雪),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손목인(孫牧人) 등은 대중음악계에서 친일 활동을 한 대표적 인물로 광복 이후 문화훈장을 받았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하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감격시대'는 남인수가 부른 곡으로 간혹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은 1939년에 작곡된 가요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한 노래라고 한다.

미술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한국화와 새로 들어온 서양화가 함께 발전하였다. 한국화가로는 조선 말기의 장승업(張承業)을 계승한 안중식(安中植)과 이상범(李象範), 허백련(許百鍊), 그리고 김은호(金殷鎬)와 그의 제자 김기창(金基昶)이 유명하였다. 서양화 분야에서도 본래 안중식의 제자였다가 최초로 서양화가로 변신한 고희동(高羲東)을 시작으로 김관호(金觀鎬), 나혜석(羅蕙錫), 민족적 특색이 강한 그림을 그린 이중섭(李仲燮) 등이 유명하다.

하지만 미술 분야에서도 역시 음악 분야와 마찬가지로 김은호와 이상범, 김기창 등의 친일 작가가 등장했다. 특히 김은호는 친일파 귀족과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 주었고, 조선인 화가로는 처음으로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 되었으며,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친일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러한 그가 3·1운동 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인상을 받았고, 이순신 장군, 유관순 열사와 논개의 영정까지 그려 우리 역사를 더욱 수치스럽게 하였다.

연극, 영화 등 공연 예술 분야도 새롭게 발달하였다.판소리, 가면극, 사당패 놀이 등 전통적 공연 예술은 일제의 억압 속에 위축되었다. 창소리를 1인 1역의 형태로 발전시킨 창극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1920년대 이후에는 일본풍을 받아들인 신파극이 서민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수일과 심순애'로 대표되는 신파극은 통속적인 면에 강하여 일제도 그리 탄압하지 않았다. 서양식 연극도 시작되어 토월회나 극예술연구회 등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현실 비판적인 사상주의 연극에 대해서는 일제가 강력히 탄압하였기 때문에 현실에 깊게 뿌리내리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토막'을 발표하여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던 유치진(柳致眞)을 비롯하여 많은 연극인들도 1940년대에는 적극적 친일 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영화도 등장했다. 1924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 기업인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영화인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널리 알려진 나운규(羅雲奎)가 있다. 그는 1926년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맡은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나라 잃은 민중의 울분과 설움을 예술적 경지로 숭화시켰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영화는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일제는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침략 전쟁을 찬양하고 고무하는 쪽으로 이용하였다. 이에 따라 영화 분야에서도 안석영(安夕影), 문예봉(文藝峰) 등 친일 활동을 전개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타났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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