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민중혁명(四一九民衆革命)의 염원을 짓밟은 5·16군사정변(五一六軍事政變)
1961년 5월 16일 새벽, 200여명의 장교들이 3600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서울 시내의 주요 기관을 점령하였다. 자신들은 혁명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 제2군단 부사령관 박정희(朴正熙)를 추종하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김종필(金鍾泌)과 30대의 젊은 육사 8기 출신 군인들이 일으킨 정변(政變)이었다. 선배들과 달리 승진이 늦어 불만이 많았던 육사 8기 군인들은 장면(張勉) 내각이 정권 장악 음모를 꾸며왔다. 그들은 4·19민중혁명(四一九民衆革命) 1주년에 맞춰 대학생들이 과격 시위를 할 것으로 예상하여 거사를 모의했으나,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챈 학생들은 조용했다. '4월 위기설'을 무사히 넘긴 학생들은 5월로 접어들면서 자주평화통일운동(自主平和統一運動)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박정희 일파는 시기를 늦출 수 없어 5월 16일을 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장면 총리도 음모를 사전에 포착하였지만 군사통제력이 없었고,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장면 내각과의 갈등 속에 진압을 회피하였다. 당시 한국의 군사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도 진압 의사가 없었다.
정변 당일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가 이념으로 반공체제를 강화하고 둘째, UN헌장을 준수하고 미국 및 우방과 유대를 강화하면서 셋째, 부패와 구악 척결,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겠으며 넷째,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를 재건하고 다섯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할 실력을 양성하고 여섯째, 모든 과업을 완성하면 정권을 이양하고 군 임무로 복귀하겠다는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다. 4·19민중혁명 이후 거세게 일어난 자주평화통일운동을 부정하고 반공과 친미적 입장을 밝혔으며, 혁명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분단 상황에 안주하려는 반민족적 보수 집단의 선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마지막 공약도 지켜지지 않았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장악하고 박정희를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 언론을 탄압하고 269명에 달하는 정치인들의 활동을 6년 동안 금지시켰으며, 대통령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헌법을 개정하고,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그후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는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간신히 누르고 당선되었다.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군복을 벗은 군정의 모습으로 이른바 제3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과정을 마치고 일본군 장교로서 출세하고자 했으나 해방으로 꿈을 잃은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친일 경력을 감추기 위해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1948년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간도특설대장을 지낸 백선엽(白善燁)과 만주국군 장교를 지냈던 정일권(鄭一權)의 도움으로 겨우 석방된 그는 군사정보국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근무하다가 6·25남북전쟁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면서 육군 소장(少將)으로 진급하였다. 그런 그가 조카사위인 김종필과 함께 민족정기를 바로잡겠다고 반공을 외치며 군사정변을 일으켰으니, 참 아이러니한 역사의 모순이었다.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를 지녔고, 또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의 일선에 등장한 박정희는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친일 경력은 반공으로 위장할 수 있었지만, 한국 주둔 미국군 사령부로부터 공산주의 경력을 의심받고 있었다. 또한, 경제발전도 시급히 이룩해야 했지만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고심하던 박정희는 그 돌파구를 '한,일 국교정상화'에서 찾아냈다. 해방 이후 미국은 그간 북한, 중국, 소련에 대결하기 위한 남한, 미국, 일본의 동맹을 촉구했지만 식민지 지배와 인권유린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한,일 국교는 단절된 상태였다.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으로부터 무상차관 3억 달러와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을 받는 조건으로 한일국교협정(韓日國交協定)을 체결하였다. 이때가 1965년 6월의 일로써,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 '약탈 문화재 반환', '군위안부, 강제 징용, 집단학살 피해자 유가족 등에 대한 일본 정부 차원의 배상', '재일한국인의 정당한 법적 지위 및 대우' 등의 문제는 소흘히 다룬 채 이루어진 굴욕적인 흥정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로 미국 정부의 신임을 얻어낸 박정희는 1964년 9월에 미국의 베트남 파병 요청을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프랑스를 대신해서 베트남의 독립전쟁을 진압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으나, 국제 사회로부터 내정 간섭이라는 비난 속에 외면당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체면을 유지하고 자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경제적 후원을 미끼로 한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요구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최대 과업으로 평가받는 '경제개발 5개 년계획'은 장면 내각이 이미 마련했던 계획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일본으로부터 얻어 온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건설하면서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기활성화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내의 높은 교육열과 값싼 노동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제개발 5개 년계획'은 경제기획원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외국에서 들여온 자본으로 공장을 세워 수출을 늘여 나가는 방식이옸다. 그 결과 1960년대~1970년대에 '한강의 기적'으로 부르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개발독재'라고도 부르는 고도성장의 이면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다.
정부가 경제 활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기업은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 정치자금을 건네주었고, 정부는 특정 기업을 비호하게 되어 정경유착(政經癒着)의 관행이 형성된 것이다. 이들 기업은 오늘날 재벌로 성장하였다. 또한 마구잡이로 들여온 외국 빚과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 전략은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를 심화시켰다. 그 결과 석유 파동[Oil Shock]이나 1997년 외환 위기와 같이 국제 환율과 국제 경기의 미묘한 변동에서 국내 경제가 동요하여 그 고통을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되었다.
고도성장은 계층과 지역의 소득 격차를 심화시켰다. 재벌, 노동자, 도시, 농촌, 호남, 영남 간의 격차 외에도 학력, 지위, 남녀별로 소득차가 심화된 것이다. 값싼 노동력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러한 소득 격차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였다. 친일 활동과 분단에 앞장섰던 보수 세력은 해방 전부터 누려 오던 기득권을 유지하며 번영의 혜택을 받았으나, 국민 대다수인 도시의 노동자와 농촌의 농민들은 상대적 빈곤감을 감수해야 했다. '국가는 부강하지만 국민은 가난한'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신화를 이룩하였다. 수출액은 해마다 급격하게 성장하였고, 산업구조도 선진국 형으로 바뀌었다. 박정희 행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은 대기업 육성 정책이었다. 농촌의 소득 향상을 위한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농촌은 몰락하였다.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향상되지 않았다.
1960년대~70년대에 이룩한 고도성장은 원료를 수입, 가공, 수출한 결과이다. 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나머지가 기업과 노동자의 몫이었는데, 국민 1인당 소득이 1961년 85달러에서 1971년 252달러로 늘어났다고 해도 국민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가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쟁의를 탄압하면서 저임금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시달렸다. 또한, 정부는 잦은 국제 경제 변동으로 기업이 어려워지면 국민의 세금으로 기업을 후원하였고, 기업은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해고했다.
1960년대~70년대에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만연하였는데, 정부는 일년 묵은 쌀을 지난해 가격으로 시장에 방출하고, 조금 비싼 가격으로 햅쌀을 사들였다. 그러나 일년 묵은 정부미는 맛이 없었고, 농촌의 실질 소득은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해 빈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또한, 정부는 부족한 쌀을 대신하여 미국에서 밀과 보리를 수입해 보리 혼식과 분식을 하였다. 결국 신나는 건 값싼 식량 덕에 저임금을 지불애도 되는 기업이었고 죽어나는 건 농민이었다.
● 6·3반독재투쟁(六三反獨裁鬪爭)과 3선개헌반대운동(三選改憲反對運動)
4·19민중혁명 1주년을 맞아 달아오르던 학생과 지식인, 그리고 진보적 정치 인사들의 통일운동은 5·16정변으로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공포 분위기 속에 제3공화국이 탄생했지만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은 한일국교협정 반대 시위로 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1964년 5월 9개 대학 2천여명의 학생들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6월 3일에는 '반민족적 한일회담 반대, 독재정권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언론과 출판을 검열하고, 각급 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을 내렸다. 또한, 오후 7시 이후엔 통행을 금지시키고, 영장 없는 압수, 수색,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래도 저항이 그치지 않자 전국 14개 대학과 서울 58개 고등학교를 조기 방학시키고, 1964년 6월 22일 굴욕적인 한일국교협정(韓日國交協定)을 조인하였다. 한일협정 무효 선언과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는 대학에 무장 군인들이 난입했고, 중앙정보부는 학생과 지식인을 간첩으로 몰아 제1차 인민혁명당변란사건(人民革命黨變亂事件)을 조작하였다.
공포 분위기와 경제개발 성과 찬양 일색의 언론 보도가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박정희는 1967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그리고 재선 직후부터 2회에 한하여 연임을 허용한 법을 바꾸기 위해 '3선개헌(三選改憲)' 작업을 추진하였다.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여당 국회의원 수를 확보하려고 그 해 6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3·15부정선거보다 더 극심한 부정이 자행되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중앙정보부는 7월에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한 북한 특수부대가 북한산에 나타나고, 미국의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였다. 이 무렵 북한은 북한식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하고 강경책을 폈던 것이다. 북한의 강경 태도는 박정희 정권이 안보를 내세워 민주화운동을 억압하고 예비군, 학도호국단과 같이 국민과 학생을 군대식으로 통제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렇듯 남북한의 대립과 긴장 관계는 서로에게 독재체제를 강화시키는 빌미가 되었다.
국민들과 야당의 반대를 탄압하고 3선개헌을 단행한 박정희는 세번 연속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1971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는 만만치 않은 저항을 받았다. 40대 기수론을 내건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金大中)은 기존의 보수 정치인과 다른 신선한 충격으로 박정희 후보를 위협하였으며, 신민당이 국회 의석 204석 중 89석을 차지하여 공화당이 독주하던 의회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반독재투쟁(反獨裁鬪爭)의 전면적 확대와 유신헌법(維新憲法)
성장 일변도로 치닫던 한국 경제는 1960년대 말부터 외채 상환 부담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초에는 석유 파동으로 원료 수입 가격이 폭등한 반면, 수출은 침체되었다. 또한, 경제개발의 그늘에 있던 노동자, 농민의 불만과 정부의 각종 비리와 실책이 연일 속출하였다.
1970년에는 달동네 서민 아파트인 와우아파트가 부실공사로 붕괴되고, 고위층과 비밀리에 사귀던 정인숙(鄭仁淑)이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으며, 평화시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全泰壹)은 노동삼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였다. 1971년에는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되었던 서울의 판자촌 철거민들이 이주 대책 약속 이행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들 사건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도덕성과 그동안 자랑해 오던 경제발전의 허상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며, 학생과 정치인들에게 머물러 있던 민주화운동(民主化運動)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71년에는 반공법에 반발하여 지방 판사 153명이 사표를 내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대학 교육자들은 학원 민주화를 선언하였으며 북파공작원들이 무장한 채 탈출해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폭한 실미도사변(室彌島事變)이 일어났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전국적 농민 조직인 카톨릭 농민회가 조직되었다. 이렇듯 학생, 노동자, 농민 등 각계의 저항이 커지면서 독재정권은 위기를 맞이했다.
정권의 위기는 외부에서도 들이닥쳤다. 베트남 전쟁의 늪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국가들의 국방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할 것을 선언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공산권과 화해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주둔한 미국군 2만명을 철수하고 남북교차승인을 제시하는 등 북한과 화해할 것을 권유하였다. 냉전체제의 붕괴는 분단 대립을 조장하며 독재정권을 유지해 오던 남한과 북한의 독재자 모두에게 큰 위기였다.
위기 상황에 공감한 남한과 북한의 독재정권은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간첩 수색에 열중하던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김일성을 만나 합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이었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0월 17일 갑자기 전국에서 비상 계엄령이 내려졌다. 국회는 해산되고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된 속에서 10월 27일 비상 국무회의라는 이름으로 유신헌법이 발표되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폐지하고 대통령의 직속 기구나 마찬가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도록 하겠다는 '헌정 파괴' 선언이 내려진 것이다. 또한, 대통령이 국회의원 1/3 임명권과 법관 인사권을 지니고 국회해산권과 법적 효력에 상응하는 긴급조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일인독재체제가 수립되었다.
유신헌법(維新憲法)에 의해 급조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2년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또 다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박정희가 말하는 '한국식 민주주의', 즉 남한식 독재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이 무렵 북한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12월 27일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당시 수상이던 김일성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모든 권력이 주석에게 집중되는 '북한식 사회주의', 즉 북한식 독재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 민주화운동의 압박 속에 스스로 무너진 유신독재
그간 군사정권은 반공을 구실로 민주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붕괴되자, 위기를 느낀 군사정권은 유신체제를 급조하였다. 미국과도 관계가 불편해진 상황에서 유신 정권은 1973년 3월 일본에서 반유신운동(反維新運動)을 하던 정치적 라이벌 김대중을 납치하여 살해하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풀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대학생들의 반유신시위(反維新示威)가 이어졌고, 장준하(張俊河)는 1백만인 헌법개정 청원운동을 전개하였다.
1974년 초 박정희 독재정권은 유신헌법에 반대하면 비상 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겠다는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고, 즉각 장준하를 구속하여 15년 징역을 선고하였다. 그래도 반유신운동이 거세지자 시위 주동자에게 사형을 구형하겠다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이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인 연합시위를 전개하던 대학생들을 '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으로 1천여명을 구속하였다. 또한, 그 배후에 인민혁명당(人民革命黨)이라는 간첩 조직이 있다고 조작하여 이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시국이 어수선한 와중에 광복절 기념식장에서는 재일한국인 문세광(文世光)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가 실패하고 대신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를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9월에 이르러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발족되었고, 11월에는 기자들의 언론 자유 수호 투쟁이 전개되었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 기업의 광고가 끊어지자, 시민과 학생들의 격려 광고가 이어졌다. 하지만 3개월이 못 가 동아일보는 134명, 조선일보는 30명의 기자를 집단 해고시켰다.
1975년 미국군의 철수 속에 베트남이 독립과 통일을 이루자, 궁지에 몰렸던 유신 정권은 4·19민중혁명으로 폐지되었던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키고 반공태세를 강조하면서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1976년 삼일절에는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咸錫憲), 문익환(文益煥)을 대표로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民主救國宣言文)'이 발표되었고, 1977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의 득표율이 공화당을 앞질렀지만, 통일주체국민위원회에서 99.99%로 다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국민들의 지지 속에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의 반유신운동(反維新運動)도 활발해졌다.
1979년 8월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정국은 극단으로 치달려 갔다. 신민당사에 난입한 2천여명의 경찰관은 여공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당 총재를 구타하는 등 폭력사태를 유발시켜 결국엔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유신 정권은 강력히 항의하는 김영삼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켰다. 그러자 김영삼 총재의 지지 지역인 부산과 마산에서 거친 시위가 이어졌다. 부산에 이어 마산에 비상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시민들은 공화당사, 방송국, 파출소를 파괴하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 무렵,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는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과 함께 궁정동에 있는 대통령 전용 비밀 연회장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의 총격으로 피살되었다. 18년 동안의 독재정치가 떳떳하지 못한 자리에서 심복의 권총 사격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거세지는 민주화운동의 압박에 직면한 유신 정권이 내부 갈등 속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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