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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여왕’ 연수영 」7국지전(局地戰) ⑷

개마기사단 |2011.10.15 16:08
조회 84 |추천 0

●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출중한 지휘관 연수영의 낙마와 무능한 연정토의 부임으로 고구려 수군 장졸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졌다. 반면 당은 육로를 통한 대규모 침공보다도 바다를 통한 고구려 후방 공격이 훨씬 더 경제적이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런 전략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

 

전쟁이 3년간에 걸치자 고구려의 군사들은 육군이든 수군이든 피로가 누적되었다. 또 고구려의 방어 전략은 거점 중심인데 당군이 소규모로 빈번하게 이곳저곳 공격하니 적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도 버거웠다.

 

집권자 연개소문은 이런 당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끊일 새 없이 요동반도 전체, 전 해안, 압록수 유역 등지에 성벽을 신축하고 보수토록 했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우려하던 사태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식량 부족이었다. 백성들 거의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고, 군대라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자주 나돌았는데, 그것은 소문으로 그치지 않고 사실로 확인되기도 했다. 참담한 노릇이었다. 이는 집권자나 한 정권의 진퇴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이 걸린 절박한 문제였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야만 하는가! 연개소문은 잠이 오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나이 쉰 살도 되지 않아 머리가 반 넘게 세었다. 쉰 살은커녕 그 해에 연개소문의 나이 마흔두살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오골성주(烏骨城主) 추정국(鄒定國)이 과로로 쓰러져 폐병을 앓다가 병석에 누운 지 20여일만에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이 생겼다.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 당시 고구려의 승리에 기여하는 전공(戰功)을 세운 바 있는 양장(良將) 추정국의 죽음은 고구려의 요동 수비군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연개소문은 태왕에게 상주하여 추정국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치르게 하였다.

 

한편, 당황(唐皇)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도 날이 갈수록 건강은 나빠지는데 고구려를 빨리 치지 못해 안달하고 있었다. 조정에서 의논토록 했더니 이런 건의가 올라왔다.

 

“대군이 동방을 원정하려면 반드시 1년을 먹을 군량을 갖추어야 하며, 이러한 많은 양을 우마(牛馬)나 수레로 나를 수는 없으니 마땅히 선박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하옵니다. 그런데 수나라 말기에 검남(劍南) 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번 요동의 전쟁 때에도 검남은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곳의 백성들을 시켜 선박을 만드는 게 마땅한 줄 아옵니다.”

 

태종은 이 의견을 받아들여 더 많은 전함과 수송선을 건조하라고 닥달했다. 그런데 고구려도 그랬지만 당나라에서도 대다수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전쟁이라면 진저리를 쳤다. 전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일부 장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다.

 

그 해 7월에 사공(司公) 방현령(房玄齡)이 병상에 누워 이런 상소문을 썼다. 그리고 아들을 시켜서 황제에게 바치게 했다.

 

‘노자(老子)의 말에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으며 제지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는 것이 있습니다. 폐하의 위엄 있는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하다 할 수 있으며 지역을 넓히고 강토를 개퍽하는 사업도 역시 그만 둘 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한 명의 중죄인을 처결하실 때에도 반드시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아뢰도록 하며, 소찬을 올리게 하며, 풍류를 중지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데, 이제 무고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아래 내맡김으로써 참혹한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은 어찌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고구려가 신하의 예절을 어기면 그들을 칠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백성을 못살게 군다면 그들을 없앨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오랫동안 우환거리가 된다면 그들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가지 조건이 전부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유도 없이 당나라를 괴롭게 하면서 안으로는 선대(고구려의 영류태왕을 말함)의 원한을 씻어주고, 밖으로는 신라를 위해 복수한다는 것은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스스로 허물을 고치도록 내버려두시고, 모집에 응해온 군사들을 돌려보내신다면 중국은 자연히 경사롭고, 오랑캐들은 저절로 우리에게 의지해올 것입니다. 만일 소신이 죽기 전에 이 몇 마디가 받아들여진다면 소신의 몸은 죽어도 썩지 않을 것이옵니다.’

 

방현령이 죽기 직전에 한 이 충고는 당시 당의 형편으로서는 천만 번 옳은 말이었지만 고구려와 연개소문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지 못한 태종은 듣지 않았다. 그 누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반드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야 말겠다는 태종의 야욕과 집념이 그 정도였다.

 

방현령이 죽은 그 달 7월에 태종은 장사 강위(强偉)에게 명해 양자강 중류 검남도에서 비밀리에 전함을 건조하도록 지시한 데에 이어 8월에도 월주도독부와 무주조선소, 홍주조선소 등에 1천 1백여척의 전함을 만들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때 건조한 전함은 길이 1백척, 너비 50척에 이르는 것으로 군량과 물자 수송 외에 대규모 병력 수송이 목적이었다. 오아(五牙)라는 이름의 5층짜리 누선은 전투병력만 8백명이 승선할 수 있는 거대한 전함이었다. 태종이 이들 전함을 바닷가 조선소가 아닌 내륙인 양자강 중류에서 만들게 한 것은 오직 보안 유지를 위해서였다.

 

대규모 공사에는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 노동력은 강제동원으로 충당했다. 전쟁은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 모두에게 그지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조선공사장에서 혹사당하다 못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태종은 2만명의 군사를 보내 이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648년 새해가 밝자마자 백제는 다시 병력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다. 지난해에 김유신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의직이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소비포(所比浦)를 건너 요거성(腰車城)을 단 한번의 공격으로 함락시켰다. 요거성을 얻은 의직은 군사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붙여 10여개의 성을 공취(攻取)하는 개가를 올렸다. 4월이 되자 의직은 휘하의 군사들 가운데 날쌘 자만을 뽑아 데리고 야음을 틈타 신라의 옥문곡(玉門谷)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김유신이 거느린 향군들과 교전이 벌어져 3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백제의 장수 의직에게 서변의 10여개 성을 빼앗긴 신라에서는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의 침략을 막아내자는 쪽으로 조정의 공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김춘추가 진덕여왕에게 자청하여 신라의 사신 자격으로 당나라를 향하는 뱃길에 올랐다. 셋째 아들인 문왕(文王)을 대동하여 장안의 황궁으로 들어간 김춘추는 당나라 조정의 관복을 차려 입고 태종을 알현했다.

 

“소국 신라에서 온 김춘추가 천자를 알현하나이다!”

 

태종이 김춘추의 복색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신라인이면서 어찌하여 당나라 관리의 복장을 하고 있는가?”

 

김춘추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 신라는 대당제국을 부모의 나라로 떠받드는 신국(臣國)이옵니다! 하오니, 신라의 사신이 당의 관복을 입고 천자를 알현하는 일이 어찌 흠이 되겠나이까?”

 

태종은 김춘추의 아첨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대는 무슨 소원이 있는고? 무슨 말이든 짐에게 다 해보라.”

 

김춘추는 얼른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폐하! 소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으면서 대국을 섬긴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백제가 포악하고도 교활하여 자주 침범하고 있사옵니다. 더구나 지난해에는 대군으로 침입하여 수십개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입조할 길조차 막았사옵니다! 만약 폐하께서 천병을 보내어 이 흉악한 무리를 없애주지 않는다면 저희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매 육지로도 바다로도 다시는 조공할 방도가 없겠사옵니다.”

 

“그렇구나! 잘 알았도다. 내 반드시 대군을 내어 백제를 칠 것이니 그대는 마음 놓고 돌아가라!”

 

그러고 나서 태종은 김춘추를 위해 며칠을 두고 성대한 연회를 베푸는 등 그지없이 융숭하게 대접했다. 김춘추는 둘째 아들 인문(仁問)을 장안에 머물러 숙위토록 했다. 이는 자진해서 자기 자식을 인질로 바친 것이었다. 또한 태종에게 청해 신라에서도 앞으로는 벼슬아치들이 당나라의 의관과 복식을 똑같이 사용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태종은 먼저 요구하기도 전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셈이니 입이 찢어져라 기분이 좋아 “하오[好]! 하오!”를 연발하며 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사행길에 대성공을 거두고는 귀국하는 길에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다가 그만 고구려 수군 정찰선에 붙잡히고 만 것이었다. 그때 김춘추의 수행원 온군해(溫君海)가 급히 김춘추와 의관을 바꾸어 입었다. 고구려 군사들이 온군해를 보고 김춘추인 줄 알고 바로 베어 죽였다. 그 사이에 김춘추는 쾌속선으로 갈아타고 황급히 달아나 가까스로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가 약속대로 백제 정벌군을 일으킨 것은 태종이 죽은 다음인 660년의 일이었다.

 

648년 6월이 되자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은 7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 탈환에 나섰다. 윤충(允忠)의 부장인 지수영(遲受泳)이 병정 5천을 거느리고 김유신의 군대를 상대했는데, 김유신은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유인한 다음 미리 매복시킨 2천의 특공대로 하여금 급습하게 해서 1천의 적병을 참살하고 지수영을 비롯한 백제의 장수 8명을 생포하였다. 김유신은 대야성에 있는 윤충에게 사람을 보내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品釋)과 딸인 고타소(古陀炤)의 유골을 포로와 맞바꾸자고 제의하였다.

 

윤충이 김유신의 뜻을 전해듣고 자신이 함부로 처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즉각 대궐로 사람을 파견해 임금의 품의를 구했다.

 

김유신과 싸워본 좌평 의직이 의자왕(義慈王)에게 김유신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신은 속임수에 능하고 잔꾀가 많은 자입니다. 우리가 유골을 보내면 그 역시 우리 장수 여덟 명을 죽여 시신으로 돌려보낼 공산이 큽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성충이 나서서 간언하였다.

 

“김유신은 대야성 군주 품석 내외의 뼈가 우리 나라의 살아 있는 장수 여덟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적장을 돌려보냄으로써 천하의 의로움과 정당함이 신라에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라하(於羅瑕)께서도 아시다시피 예전에 우리 장수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시킬 때에 죽은 품석의 아내는 김춘추의 딸입니다. 그런데 김유신은 김춘추와 처남매부간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옹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김춘추와의 관계를 세상에 과시하려는 뜻도 포함돼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예리한 지적을 듣고 큰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속셈을 안 이상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덟이나 되는 우리 장수들의 목숨이 그까짓 유골만도 못하다는 셈이니 당장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조정에 비난이 쏟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구나. 상좌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임금이 묻자 성충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김유신이 그와 같은 제의를 하는 순간 이미 그가 얻을 것은 얻은 셈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장수 여덟 명의 목숨입니다. 마땅히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김유신이 신의를 지키지 않고 우리 장수들을 살려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은 저쪽에 있고 의로움과 정당함은 우리에게 있으니 무엇을 더 근심하겠나이까?”

 

의자왕은 성충의 간언을 받아들여 윤충이 보낸 사자에게 품석 내외의 유골을 찾아 김유신에게 보내도록 했다.

 

윤충은 품석 부처의 목 없는 유골을 목관(木棺) 속에 넣어 김유신에게 보냈다. 김유신은 약속대로 지수영을 비롯한 백제군 장수 여덟 명을 살려보낸 뒤 즉시 군사들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려 백제 경내로 쳐들어갔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거타주 북변, 남악과 인접한 악성(嶽城)을 공격하여 윤충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악성 주변의 12개 성을 함락시켰다. 김유신은 이 전과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금 진례(進禮) 등 9성을 쳐서 2만여명의 백제군을 살상하고 1만여명을 사로잡았다.

 

백제는 김유신에게 당한 참패로 인해 기험한 남악을 중심으로 비교적 일사불란하던 국경이 북쪽과 동쪽의 광활한 땅을 잃고 그야말로 개 이빨처럼 들쭉날쭉한 형태가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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