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에서 돌아온 고국양왕은 담덕 태자가 요동성 쪽으로 출정했다는 보고를 듣고 대사자(大使者) 아불파연(阿佛破然)에게 3만 군사를 주어 태자의 군대를 도와 후연군과 싸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곧 태자가 뛰어난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요동성을 공격하던 후연의 10만 대군을 물리쳤다는 전갈을 받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은 몸인데다가 장기간 전쟁을 치름으로 해서 심신이 극도로 지쳐 있었던 고국양왕은 후연의 요동성 침공 소식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자리에 몸져눕는 신세가 되었다. 고국양왕은 후연의 기습적인 침입으로 인해 백제 원정이 실패했다는 생각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심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국왕의 병세는 시일이 지날수록 악화되어갔다. 나라 안에서 용하다는 의원들이 모두 동원되었지만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국왕은 점점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웠던 고국양왕은 태자를 비롯한 대소 신료를 처소로 불러모았다.
“이제 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소. 그대들은 앞으로 태자를 잘 보필하여 이 나라가 천하에 우뚝 설 수 있도록 해주시구려.”
담덕 태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폐하, 명운이란 모름지기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한다 했으니 부디 마음을 굳게 가지시고 건강을 회복하셔야 하옵니다.”
고국양왕은 억지로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 병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병이 아님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한 나라를 통치할 군주가 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너의 백부(伯父)이신 해미류왕(解味留王:小獸林王)께서 내게 보위(寶位)를 물려주신 것은 바로 담덕 너를 이 나라 고구려의 제왕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느니라.”
고국양왕은 그동안 남의 옷을 입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난 것이었다.
“우리 고구려의 앞날이 담덕 너의 두 어깨에 달렸다. 내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도록 하여라.”
“예, 아바마마!”
며칠 후, 고국양왕은 잠을 자듯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장례는 평온한 가운데 치러졌다. 이 때가 서력 391년으로 고국양왕의 장례가 끝나고 담덕 태자가 고구려 제19대 제왕으로 등극하니, 바로 천하를 뒤흔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다.
성대한 즉위식에서 영락(永樂)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공표한 광개토호태왕은 허약한 국력을 키워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젊은 장정들을 더 뽑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조의선인에 속한 특수병들도 더욱 확장하기를 서둘렀다.
편전(便殿)에서 태왕은 호선(毫扇)을 들어 좌중의 시선을 모았다.
“백잔(百殘)과 싸우시다 원통하게 돌아가신 조왕(祖王:故國原王)의 한(恨)을 풀어 드릴 때가 됐소. 준비가 끝났으니 남방의 백잔을 치겠소.”
대사자(大使者) 아불파연(阿佛破然)이 아뢰었다.
“신중하셔야 하옵니다. 선대왕(先代王)께서 지난번에 4만의 군사를 친솔(親率)하시어 백제를 칠 때에 선비족(鮮卑族)의 10만 대군이 요동성으로 침공한 적이 있거니와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한참 국력을 키우며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백제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또 연군(燕軍)이 쳐들어온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게다가 북방의 거란족(契丹族) 또한 근래 세력을 규합하여 변경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잦사옵니다. 이에 철저히 방비한 연후에 백제를 공격해도 늦지 않으리라 봅니다.”
광개토호태왕은 조용히 말했다.
“그대의 판단은 그르지 않소.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들을 두려워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중에 위아래에서 협공을 당하게 될 것이오. 비록 위험 부담이 있지만 백잔이 아직 우리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공격의 적기요. 만일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는 백잔을 도모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오.”
태왕은 차분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신하들을 설득했다.
철기군주(鐵騎軍主)인 대형(大兄) 모두루(牟頭婁)가 나섰다.
“이미 폐하의 어명에 따라 군제를 개편하여 철기군을 강화하고 수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군량미 또한 넉넉히 준비해 두었사옵니다. 지금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출전의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태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태왕의 눈길이 신하 하나하나에 머물 때마다 그들은 태왕의 열정에 데인 듯이 전율했다.
“여러분의 충정과 염려는 잘 알고 있소. 승산이 없다면 절대 출전을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오. 짐(朕)의 결정을 믿고 따라 주길 바라오.”
균형을 잃지 않은 태왕의 언행은 신하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태왕은 단순히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원한을 풀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서북방에 있는 거란족(契丹族)은 종종 변경을 침략해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태왕은 거란족에게 노예처럼 학대받는 고구려의 백성들을 무사히 귀환시켜야 했다. 또한 거란은 명마의 주산지였다. 고구려가 철기군을 유지하려면 훌륭한 말이 필요했다. 그러나 거란족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면 남쪽의 백제가 이 틈을 노려 고구려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태왕은 거란족을 정벌하기 위해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친히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패하(浿河) 이서의 백제군 최대 요충지인 치양성(雉壤城)으로 쳐들어갔다. 백제군 주력부대가 있는 치양성만 함락시키면 구두성과 치악성은 가만히 있어도 항복할 것이었다. 태왕은 치양성의 전력을 가늠해보기 위해서 소형(小兄) 석모수(席牟洙)에게 보조병력인 말갈족(靺鞨族) 군사 5천을 주어 백제군에게 싸움을 걸도록 했다. 말갈족 군사들은 주로 경기병(輕騎兵)으로 이루어져 나아가고 물러나기가 용이했다.
치양성은 백제 제일의 세도가인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의 사촌 동생인 달솔 진원강(眞元康)이 2만의 병사를 통솔하여 지키고 있었다. 진원강은 종형(從兄)인 진가모의 후광을 업고 치양성주(雉壤城主)가 되기는 했지만 공명심(功名心)만 높을뿐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진원강은 고구려의 군사들이 출현했다는 소식에 지레 겁을 먹고 성문을 걸어 잠근 후 성루에 올라가 고구려군의 동태를 살폈다. 고구려군은 진원강의 걱정과는 달리 수효도 적을뿐 아니라 기세 또한 대단치 않았다.
이를 보고 자신감을 얻은 진원강은 부하 장수인 은솔(恩率) 맹봉(孟鳳)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도록 했다. 맹봉은 전장(戰場)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다.
맹봉은 고구려군의 책략을 두려워하여 성주에게 아뢰었다.
“소장이 듣기로는 고구려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합니다. 군왕의 친정(親征)이라면 최소한 3만의 병력은 될 텐데 눈앞에 보이는 고구려 군사들의 수는 너무 적습니다.”
맹봉의 말을 듣고 진원강은 슬그머니 걱정이 됐다. 그 역시 고구려 군사들이 북방의 싸움을 많이 겪어 용맹스럽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원강이 맹봉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대가 오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는 척하며 고구려군의 형세를 살피도록 하라. 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을 터이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성으로 돌아오라.”
맹봉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성주의 명령이었으므로 마지못해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문 밖으로 나섰다.
맹봉이 거느린 백제의 군사들이 성문을 나서는 것을 본 고구려군은 일제히 말을 달려 성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성루에서 이를 지켜보던 진원강은 궁수들에게 명령해 고구려 군사들을 향해 활을 쏘게 했다.
화살이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앞서 달리던 기병 하나가 화살에 맞이 말 아래로 떨어졌다. 뒤이어 수십명의 고구려 기병들이 마상(馬上)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겁을 먹은 고구려 군사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궁시(弓矢)의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맹봉의 군사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굶주린 이리떼처럼 고구려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무서운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듯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달아났다.
승기(勝機)를 잡았다고 생각한 맹봉은 달아나는 고구려 기병들의 뒤를 추격했다. 고구려군의 도주 속도가 너무도 빨라 쉽사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성에서 30여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맹봉은 복병을 염려해서 추격을 멈추고 성으로 돌아왔다. 진원강은 크게 기뻐하며 성문을 열고 맹봉을 맞이했다.
“오늘 보니 고구려 군사들도 별게 아니구나. 저런 형편없는 군사들로 우리 대백제의 영토를 넘보다니 참으로 분수를 모르는 자들이로다.”
진원강은 호탕하게 웃었지만 맹봉은 여전히 걱정이 앞섰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도압성 전투에서만 해도 고구려 군사가 이처럼 무기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장의 생각으로는 우리를 방심하게 하려는 저들의 계책인 것 같습니다.”
“그대는 눈으로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고구려군은 위명(威名)만 높았지 사실 겁쟁이들이 아니냐!”
맹봉이 충심으로 간했지만 자만심에 빠진 진원강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고구려 기병들이 다시 치양성 앞에 나타났다. 전날의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진원강은 보고를 듣자마자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려 했다.
맹봉은 한사코 말렸지만 전공을 세울 욕심에 눈이 먼 진원강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 겁이 나면 자네는 성이나 지키고 있게.”
진원강은 맹봉을 물리치고 말에 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