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호텔 리조트 임시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 하고 있는 준하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온 통 머릿속에는 수정이 자리 잡고 있다. 칠판에 부착 되어 있는 리조트의 건설 설계도를 보며 수정안과 비교하고 있다. 앞으로 이 곳이 이렇게 변하게 될 것이다. 리조트 사업이 준비 단계에 있을 때 기준에게 준하가 먼저 자진하여 일을 맡겠다고 했었다. 물론 수정에 대한 어긋난 마음 때문에 시작은 좋은 의도는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의 호텔 업계를 활보했던 기준의 아들인 만큼 좋은 명성을 얻고도 싶었다. 수정의 표정이 떠오르지만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한다. 그 때 사무실 문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와 함께 한 여자가 들어온다. 수정이다. 지난 밤 비에 젖어 비서를 시켜 사왔던 새 옷을 입고 서 있다.
“ 무슨 일이지? ”
“ 우리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찾아왔어. ”
“ 김비서! ”
“ 네.. 본부장님. ”
“ 점심 하고 와. ”
“ 네.. 그럼. ”
비서가 나가고 문이 살짝 열린 채 두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 한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들킬까 염려되어 아무렇지 않는 척 표정을 가다듬는다.
“ 난 아까 내 의사를 밝힌 건 같은데. 아직도 할 말이 더 있다고? ”
“ 준하 오빠. 천사 고아원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야. 나뿐만이 아니라 그 곳을 거쳐 간 많은 아이들이 있어. 그건 오빠도 잘 알잖아. 고아원을 없앤다면 그 아이들은 집을 잃는 거라고. 부모님을 다시 만나다는 희망을 잃는 거야.. 이미 공사를 시작해서 중단하기 어렵겠지만... 그럼 얼마간에 여유를 줘... 내가 어떻게든 아이들 있을 곳을 찾아본 다음....”
“ 네 말대로 하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거지? ”
“ 뭐....? ”
“ 방금 네가 말 한대로 하면 분명 우리 대한 호텔은 사업에 차질이 생기게 돼. 그럼 그 만큼 손해를 보게 되겠지. 그래도 만약에 내가 네 말대로 하게 된다면 적어도 나한테 뭐 이득 되는 게 하나쯤은 있어야 할 거 아냐? ”
“ 오빠... 오빠도 알다시피 내 상황이 돈으로 보답하기엔.. ”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수정의 말을 듣고 있던 준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그런 준하를 보며 놀라는 수정.
“ 좋아! 공사 중단 하지. 그리고 가능한 리조트 건설 공사에서 천사 보육원 지역을 제외 해 줄 수 있어. ”
“ 저..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어? 아...하.. 고마워 오빠.. ”
“ 단... 조건이 있어! ”
“ 조건...? ”
책상 의자에 앉아 있던 준하가 소파에 있는 수정에게 다가온다. 조건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한 수정이 멍한 표정을 짓자 조금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수정을 지그시 바라본다. 숨 막히는 고요함이다. 준하가 소파에 옆으로 걸터앉아 상체를 수정에게로 들이밀자 수정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뺀다. 자신을 거부하는 느낌에 자존심이 상한 준하는 손으로 수정의 얼굴을 돌려 강제로 키스를 시도한다. 고개를 이리 저리 흔들며 반항하려 해 보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준하의 손힘이 거세졌고 수정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수정의 두 손을 한 손으로 제압한다.
“ 웁... 하...지..”
최대한 힘을 내어 반항하자 준하의 손이 수정의 옷으로 간다. 흰색 가디건을 잡아 벗기려고 하려는 그 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그 손 놔!!! ”
그리고 준하를 단숨에 제압하고 주환의 주먹질에 바닥으로 넘어진다.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니 주환이 서 있다.
“ 지금 날 쳤습니까? ”
“ 주..주환씨.. ”
“ 맞을 짓을 했으니까! ”
준하의 입술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던 수정이 멍한 듯 바라본다. 두 남자 모두 서로에게 화가 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대한민국 형사가.... 사람을 쳐? 하하하.... 무고한 시민을 이렇게 폭력적으로 대하셔도 먹고 살고 있나봅니다. 세상 참 좋아졌군.. ”
일어서는 준하의 표정은 분명 웃고는 있었지만 섬뜩한 느낌이다.
“ 일어나죠.. 가요. 그만. ”
주환이 수정의 어깨를 감싸며 일으켜 세우고 이내 사무실을 나온다. 혼자 남은 준하는 웃고 있던 표정이 순식간에 매섭게 변하면서 책상에 있던 모든 물건을 엎어버린다. 바닥으로 모든 물건들이 사정없이 떨어지는 소리로 한 동안 사무실에서는 울려 퍼진다.
검은 색 차량 한 대가 들어오고 이내 거대한 호화 단독 주택의 주차장 문이 열린다. 뒷 자석에서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쉬고 있던 기준은 도착했다는 비서의 말을 듣고 눈을 뜬다. 비서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가 뒷문을 열어 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계단을 이용해 집 안으로 들어간다. 현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미선은 평소 보다 이른 기준의 퇴근에 의아해 하며 기준을 맞이한다.
“ 여보. 들어오셨어요.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안 좋아요? ”
“ 오늘은 몸이 좀 피곤하군. 그래도 할 일이 있으니 김 비서 서류는 내 서재로 놔두고 가게. ”
“ 네. 회장님. 그럼 편히 쉬십시오. ”
비서가 돌아가고 안방에서 기준의 옷을 받아주던 미선이 기준의 옷 주머니를 꺼내 확인하려고 하자 손으로 제지 하며 말한다.
“ 내가 할 테니 물 한잔 서재로 가져다 주오. ”
“ 오늘은 그냥 쉬시지.... 알았어요.. ”
미선이 방에서 나가자 양복 안 주머니에 있는 목걸이를 꺼낸다. 그리고 손에 들고 서재로 향한다. 의자에 앉아 손을 다시 펴 목걸이를 확인하는 기준의 모습에서 슬픔과 그리움이 보인다. 그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미선이 물 컵이 든 쟁반을 가지고 서재 안으로 들어온다.
“ 고맙소. ”
“ 언제 주무시려고요,,? 당신 이제 몸 관리도 해야 하는데.. ”
“ 먼저 쉬어요. 난 할 일이 좀 있소. ”
“ 알겠어요. 너무 무리 하지 말고 당신도 쉬세요. ”
부부간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또 다시 서재는 고요해진다. 이 목걸이를 보고 나서 더 생각나는 한 여자가 있다. 오랜 시간 잊혀 혀지 않아 일에만 몰두한지 2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잊고 싶었던 한 여자와의 짧았던 사랑.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들추게 된 것이 이상하게 생각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말이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이 목걸이의 주인이 죽고 세상에 없는데 어떻게 다시 자신의 손으로 이 목걸이가 돌아온 것 일까. 무언가 생각지도 못한 비밀이라도 있었던 것 일까. 이 목걸이의 주인이 수정이라면 그 아이는 그 여인의 딸이라는 말인가.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괴롭다.
방으로 돌아간 미선이 쓸쓸히 화장대 앞에 앉는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거울 속에 비췬 모습은 그저 나이 든 중년층의 부인일 뿐이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 보다 많은 치장을 했다는 것, 단지 다른 사람들 보다 돈이 많은 소이 말하는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 잠시 후 미선의 핸드폰이 울린다.
“ 네. 여보세요? ”
[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에 친자 검정 의뢰하신 분 맞습니까? ]
“ 네.. 맞아요. 내가 친자 검정 의뢰 했어요. 혹시 결과 나왔어요? ”
[ 네.. 자료로 보내드렸습니다. ]
“ 아..아니.. 우선 나는 좀 급해서요. 결과가 어떻게 나왔나요? ”
[ 고객님이 의뢰하신 친자 검정 건은 99.9 %일치합니다. ]
전화를 끊고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나니 순간적으로 망연자실 한다.
“ 설마 설마 하면서.. 얼마나 아니길 바랐는데.... 하... 이건 말도 안 돼....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내가 어떻게 지켜온 가정인데.. 이건... 말도 ..흑..흑.. 안 돼.. 어떻게든 그 아이를 준하 곁에서 떼어 놔야 해.....! ”
거울의 비췬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다짐하는 미선의 표정이 매섭다.
사무실에서 나온 주환과 수정은 차에 오르고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그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는다. 오늘 준하의 돌발행동에 충격이 컸던 수정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 하고 있었고 그런 수정의 마음을 이해하는 주환 역시 선뜻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뒤 수정의 집 앞에서 도착했고 벨트를 푸르고 서로가 차문을 열고 내린다. 차에서 내린 주환이 수정에게 다가가 작별인사를 한다.
“ 쉬어요. 피곤 할 텐데. ”
그 말을 하고 뒤를 돌아가려는 주환의 등 뒤에서 수정이 껴안는다.
“ 가지 말아요. ”
주환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애절하게 말한다. 그리고 왠지 그 목소리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한참 동안 그 상태로 얼음이 되어 버린 두 사람 사이에는 또 다시 정적이 흘렀고 잠시 뒤 주환이 몸을 돌려 수정을 바라본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정을 보고 있으니 이대로 가버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사람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껴안고 있었다. 주환의 오른 손은 수정의 머리를 만지고 다른 한 손은 어깨위에 있다. 주환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말이 없던 수정이 오랜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다.
“ 미안해요.. 주환씨.. ”
미안하다는 수정의 말에 놀라 멈칫하는 주환의 표정이 굳는다.
“ 뭐가..말입니까.. ”
“ 나만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그렇게 화내고 싸울 일도 없었을 텐데.. ”
그 말을 듣던 주환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수정을 더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는다. 주환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수정의 무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평소 명랑하고 어떤 일에도 겁낼 줄 모르던 수정이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그리고 슬퍼보였다. 그러기에 자신이 이 여자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랜 시간 잠 못 이룬 채 서로의 조용한 숨소리만 맴돌 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은 들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아침에 찾아왔고 수정이 깰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옷을 들고 집을 나선다. 주환이 나가는 소리를 듣고 살며시 눈을 뜬다.
‘ 난 어떻 해야 하는 거지... ? ’
경찰서에 도착한 주환은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지는 않았지만 간밤에 술에 취해 경찰서로 연행되어 온 몇몇 남자들이 눈에 띄었고 군데군데 형사들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들어오는 주환을 보자 민준이 이사를 한다.
“ 나오셨습니까. ”
“ 이 사람들은 어제 들어 온 건가? ”
“ 예. 어제 12시 넘어서신고 받고 연행했습니다. 술집에서 난동을 부려서요. 그런데 팀장님 피곤해 보이십니다. ”
“ 그래 보이나? 잠을 좀 설쳐서.. 이제 그만 들어 가봐. 내가마저 할 테니까. ”
“ 하하하. 괜찮습니다. 제가 마무리 하고 가도 됩니다. ”
“ 됐으니까. 들어가서 쉬어!. ”
“ 헤헤헤.. 그럼... 염치없지만..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
“ 그래. ”
그 때 전화기를 내려놓던 진욱이 주환에게로 다가온다.
“ 정 팀장. 잠시 나 좀 보지. ”
“ 네..”
회의실로 들어간 진욱과 주환사이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돈다. 낮은 목소리로 어두운 표정을 하고는 주환을 부른 진욱에게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 무슨 일이십니까? ”
“ 휴.... ”
“ 왜 그러십니까? ”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진욱의 근심을 읽은 주환의 표정도 굳어지기 시작한다.
“ 정 팀장 앞으로 고소장이 발부됐어. 대한 호텔 본부장 폭행이라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고소장이라는 말에 미간에 주름이 잡히면서 지난 밤 사건이 스쳐지나간다. 수정에게 강제 키스를 하는 준하를 보며 감정 조절이 안 되어 폭력을 행사한 일은 사실이기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주먹을 휘두른 후 준하의 표정은 조금은 섬뜩할 정도로 매서웠었다. 대답을 선뜻 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주환의 표정을 본 진욱이 조심스레 묻는다.
“ 정말? 주환이 네가 대한호텔 본부장을 친 거냐? 아니... 네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고? 도대체 무슨 일로? ”
“ 사고였습니다. 죄송합니다. ”
“ 야 임마! 너 그렇게 아무한테나 주먹 휘두르고 그런 놈 아니잖아! 대한 호텔 쪽에서 널 고소했고 방금 변호사한테 연락이 왔는데 절대 합의할 마음 없다고 널 폭행죄로 구속 시키겠다는데 어떻 하려고 그래? ”
“ 제가 그 사람 만나서 해결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회의실에서 나온 주환은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컴퓨터를 키고 조사 중인 자료를 찾아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준하가 어제 수정에게 했던 행동이 떠오른다. 또 다시 자신이 그 행동을 목격했다면 망설이지 않고 똑같이 주먹이 먼저 앞섰을 것이다. 그 일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