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文
“나는 당신의 생각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표현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것이다.”
-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 -
1
어느 마을에 피리부는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피리소리는 사
람들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소리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피리소리에 감탄했고 사나이는 스스로도 자신의 피리부는 재
주는 신이 내린 재능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서 가까운
숲 속의 동물들에겐 사나이의 피리소리가 귀를 찢는 듯한 소음처럼
들렸습니다. 그의 피리소리는 때때로 바람을 타고 날아들어와
숲 속 동물의 귀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숲 속 동물들은 모두 한데 모여 사나이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내 숲에서 가장 상냥한 다람쥐가 대표로 그에게 찾아갔습니다. 사나이는 다람쥐를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작고 귀여운 다
람쥐구나 너에게 나의 아름다운 피리연주를 들려줄게" 그러자 다람
쥐는 사나이에게 친절하게 부탁했습니다. "선생님의 피리소리는 인
간들에게는 더없이 아름다운 음악이겠지만 저희들 동물들에게는
그렇지 않답니다. 우리들의 숲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에는 피리연
주를 쉬어주실 수는 없을까요?" 사나이는 자신의 아름다운 피리연
주를 다람쥐가 모욕한다고 여겼습니다.
'괘씸한 다람쥐녀석 내 피리소리가 아름답지 않다는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암 말도 안되고 말고 내 피리연주는 누구보다 최고라
고!'낯빛이 어두워진 사나이를 보며 다람쥐는 거듭 죄송하다면서
숲 속의 동물들의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는 묵묵히 그 말을 듣고있
다가 다람쥐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다람쥐야 내 피리소리가 너희
들에게는 아름답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따뜻한 차라도 내올테니 조
금만 앉아서 기다리렴" 다람쥐는 사나이가 부탁을 들어주었다며 고
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잠시후 그는 부엌에 들어가 커다란 칼과 가위를 가져왔습니다. 그
리고는 다람쥐를 손으로 꽉 잡아 움켜쥐고 다른 한손으로 가위를
들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내 피리소리가 듣기 싫다면 다시는 듣지
않게 해줄게." 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사나이는 다람쥐의 귀를 잘라
버렸습니다. 귀가 잘린 다람쥐를 문밖으로 내동댕이 치고 사나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피리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 시간
이 지나도 다람쥐가 돌아오지 않자 숲 속 동물들은 이번에는 똑똑
한 까치를 대표로 삼아 사나이에게 보냈습니다.
까치는 사나이에게 다람쥐가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는 시치미를 떼고 까치에게 다람쥐를 본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까치에게 물었습니다. "내 피리소리가 아름답지 않니?" 까
치는 그에게 천천히 말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해도
모두가 그것을 다 좋아할 수 는 없어요. 당신의 피리소리는 우리숲
속 동물들에게 마냥 아름답게 들리는 것만은 아니랍니다. 그러니
바람이 부는 날에는 조금만 작게 피리를 불어주실 순 없나요?"
사나이는 가만히 듣다가 까치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내 피리소리
가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그리고는 가위를 꺼내 까치의 날개
를 잘라버렸습니다. 날개 잘린 까치를 문 밖으로 내던지고 그는 다
시 피리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다람쥐도 까치도 돌아오지 않자 숲
에서 가장 연장자인 숫사슴이 피리부는 사나이를 찾아갔습니다.
"다람쥐도 까치도 돌아오지 않기에 내가 왔네, 자네는 그 둘은 보지
못했는가?" 그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늙은 숫사슴
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잘모르겠어요. 자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
하셨을텐데 제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드릴께요." 숫사슴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 걸세 누군가는 밤
의 빗소리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수면을 방해하
는 소리일 수도 있지. 자네의 피리소리 역시 누가 듣느냐에 따라 달
라지는게 아니겠나?" 숫사슴의 말이 끝나자 마자 사나이는 커다란
칼을 들어 숫사슴의 가는 다리를 내리쳐버렸습니다. 다리가 잘린
숫사슴을 내동댕이 쳐버리고 그는 분한 마음을 삭이지 못한채 마을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곤 난폭하게 피리를 불어댔습니다.그의
날카로운 피리소리에 사람들은 이내 모여들었고 마을 사람들을 향
해 그는 크게 외쳤습니다.
"숲속의 동물들이 우리들을 몰아내고 이 마을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마을을 저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지 않
습니까?" 마을 사람들은 사나이의 말이 의아했지만 모두가 그의 피
리소리를 사랑했고 그 또한 신뢰했으므로 그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광분한 사나이가 불어대는 피리 소리는 너무나 괴이하고 생소했지
만 모두를 길들이는 마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피리소리
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내 횃불과 날카로운 연
장들을 가지고 숲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에 앞에선 사나이는 더욱 거세게 난폭하게 피리를 불어댔습
니다. 숲 속 곳곳에 불이 놓였고 이내 울창한 숲은 불바다가 되었습
니다. 불길에 놀란 동물들은 하나 둘 사람들에게 잡혔고 기묘한 피
리소리에고통스러워하다 사람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긴 밤
이 지나고 난 뒤 숲은 새까만 잿더미가 되었고 숲속의 어떤 동물
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숲을 불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불어대는
그의 피리소리는 이전과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
들은 항상 아름답고 청아했던 그의 피리소리가 음침해졌다는 생각
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사나이는 늘 광장에 나와 하루종일 피
리를 불었습니다. 그의 피리소리 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저 멍하
니 그의 피리 연주만들을 뿐 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나이의 피리 소리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고 느
낀 한 소년이 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소년을 반기며 사나이는 물
었습니다. "나의 피리연주가 오늘따라 더 아름답지 않니?" 그의 피
리를 물끄러미 바다보던 소년은 작은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아저
씨의 피리 연주는 예전처럼 아름답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엔 무서
운걸요. 다시 예전처럼 맑고 고운 연주를 들려주실 수 없나요?" 소
년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던 사나이는 입에서 피리를 떼고 소년
의 자그마한 어깨를 두 손으로 천천히 감싸쥐었습니다. 그리고 소
년의 귀에 작게 속삭였습니다. "귀여운 아이야. 여기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렴." 그 후로 누구도 그 어느 누구도 두 번 다시 소년을 보지
못했습니다.
2
좁은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던 나는 싱그러운 햇살을 쐬고 싶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의자에 기대 누웠을 무렵 맑은 하늘에 구름이 끼
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구름이 낄게 뭐냐며 온갖 짜증과
함께 태양을 가린 구름을 향해 상스런 욕을 퍼부어댔다. 한창 화를
쏟아낼 즈음 문득 고개를 돌렸을때 나는 더 이상 짜증을 낼 수도 욕
지거리를 뱉어낼 수도 없게 되었다.
바윗덩이 같은 등짐을 짊어진 노파가 좁은 길에 무너져내리듯 주
저 앉아 쉬고있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아내
는 그의 이마 위로 희끄무레하게 다시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온 세상을 짊어진 오랜 옛날의 거인처럼 영원의 형벌을 받고있는
듯한 노파는 쓰러질듯 절뚝거리며 땡별 속을 다시 힘겹게 걸어갔
다.
그가 골목 어귀를 향해 몇걸음 내딛지 않았을때 내 손에 들려있던
컵속의 얼음은 모두 다 녹아있었다.
5
어느 마을에 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말고 살아야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누구에
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고 누구도 홀대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
간의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았고 자신의 말과 행동이 피해를 줄 것
같다면 입을 꾹 다문채 아무 것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그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 병에 걸렸을때 그는 자신의 임종을
예감하며 생각했습니다. '난 한 평생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고 아
프게 하지 않았으니 천국에 가겠구나.' 마침내 그는 늦은 새벽 죽음
을 맞이했고 하느님의 심판대에 올라갔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살아
온 여정을 훑어보시더니 그에게 지옥으로 갈 것을 명했습니다. 당
황한 남자는 하느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저는 일 평생 누구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왜 지옥에 가야합니까!?' 하느님은 매
서운 눈으로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이여 너는 살
아오는 동안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해하지 않았으며 누
구도 보듬어주지 않았느니라. 그리고 사람으로 살아가며 누려야할
행복과 기쁨들을 너에게 선사하지 않았으니 너는 너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산 것이니라.'
6
나는 늘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그 어느 곳
이든 당신 곁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지른 악행
도 당신이 외면해버린 진실도 나는 모두 보고 듣고 기억하고 있습
니다. 당신이 침묵해버린 순간에도 나는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
다. 당신이 눈을 감는 그날까지 나는 당신과 함께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를 당신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신은
나의 존재를 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당신
이 잊는다고해서 나는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외면한다고
해서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늘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늘 언제나 당신 곁에 살아
있습니다. 절대로 당신은 나를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워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의 이름은 그림자 입니다. 그리고 나의
다른 이름은 양심입니다.
3
한 나라에 지독한 폭군이 있었습니다. 그 밑에는 사악하고 간사한
간신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폭군에게 아첨하여 가장 높은 재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를 경계하라는 충신들의 말을 듣지 않은채
폭군은 그의 아첨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재상이 된 간신은 뜻있
는 충신과 명망있는 관료들을 차례 차례 모함하여 폭군의 손에 모
두 죽게 만들었습니다.
충신들이 사라지고 나자 이제 간신의 세상이 왔습니다. 간신은 자
신의 권력과 폭군의 총애를 등에 업고 닥치는 대로 재물을 긁어모
으고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폭군은 완전히 미친 사
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가릴 것없이 멋대로 살육하는 폭군의
횡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남은 관료들과 많은
사람들이 폭군의 광기의 희생양이 될때간신을 찾아와서 살려달라
청했지만 간신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며 그들을 내쳐버렸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궁궐안에 남은신하는 폭군의 군사들과
수발을 드는 하인 그리고 신하는 간신 단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여
느 때 처럼 폭군에게 문안인사를 올릴때 갑자기 폭군은 간신을 향
해 크게 화를 내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군사들에게 간신을 처
형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간신은 당황하여 폭군에게 이유를 물었으나 폭군은 처형하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간신은 주위를 둘러보며 도움을 청하려했으나 궁에
는 이제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신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구
도 자신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을때 그의 목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4
작은 마을에 한 마리 개가 살았습니다. 개의 주인은 잔인하고 포악
하기로 이름난 도둑으로 그는 자신의 집에 어마어마한 재물을 쌓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보화들이 쌓여있는 창고 앞을 개에게 지키
게 했습니다. 개는 주인인 도둑 이외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
록 창고를 성실히 지켰습니다. 마을의 다른 개들이 놀러와 개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주인은 어떤 사람이니 개는 자신의 주인은 이름난 도둑이며
많은 사람들을 해치는 대신 수많은 보물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
었습니다. 다른 개들은 그런 주인을 섬기는 개에게 무척 위험한 주
인이라며 경계하라 했지만 개는 그 대신 주인이 자신에게 너무나
맛있고 기름진 고기를 날마다 준다며 별것 아니라 여겼습니다. 어
느 날 밤 여느때처럼 보물창고 앞을 지키던 개는 대문을 박차고 들
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악한 도둑을 쫓아온 군인들이었습니다. 손에 칼과 창을
든 군인들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잔인무도한 도둑인 주인을
끌어내 죽여버렸습니다. 군인들은 이내 집에 불을 질렀고 개가 지
키던 창고에도 큰 불이 옮겨붙었습니다. 개는 살려달라며 목이 쉬
어라 짖어댔지만 누구도 개의 목줄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살려달
라는 개의 외침은 집이 무너져내리는 소리에 이내 묻혀버렸습니다.
7
어느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있었습니다. 왕국은 어마어마하게 넓
은 영토로 이루어져있었으나 그 대부분이 불모지와 같은 사막이었
습니다. 왕은 매일 아침마다 궁전의 가장 높은 탑에 올라가 자신의
왕국을 바라보았습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이 그는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푸른 녹음이 우거진 나라를 꿈꾸던 왕은 백성들을 끌어들여 수로
를 만들고 나무를 마구 심게했지만 아무리 많은 백성들에게 노역을
감당하여 나무를 심고 땅을 개간해도 사막은 조금도 숲으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가고 실망이 정점에 다다른 왕
은 그만 방에 틀어박혀 더 이상 아침마다 사막의 땅을 바라보지 않
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의 현명한 어린 아들이 왕에게 자신이
이 사막의 땅을 숲으로 바꾸겠다고 말했습니다.
실망의 늪에 빠진 왕은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했고 현명한 아
들의 말을 가벼이 여기고 뜻대로 하라 명했습니다. 왕자는 그날로
짐을 꾸려 궁전을 떠났습니다. 몇달이 지나고 몇년이 지나도 왕자
는 돌아오지 않았고 때때로 왕에게 편지를 보낼뿐이었습니다. 아무
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왕자의 생존만을 확인할뿐 왕은 편지를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왕의 부정적인 생각은 너무나 심해져 정사를 다
른 왕자에게 위임하고는 혼자만의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았습
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은채 아무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는 두
꺼운 커튼이 쳐진 자신의 방속에서만 살았습니다. 지긋지긋한 사막
이 싫었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이 나라가 싫었습니다. 어느새
왕자의 편지도 맘속에서 잊혀져버렸고 미움이 차오르다 그는 모든
것을 허무하게 보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병환으로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되었을 무렵,
먼 길을 떠난 왕자가 돌아왔습니다. 임종을 눈앞에 둔 왕은 아들에
게 세상은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며 아무것도 애쓰지 말라는 힘없
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 때 왕자가 눈물을 흘리며 왕에게 말했습니
다. 아버지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이 어두운 방에서 나와 창밖을
바라봐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죽음을 목전에둔 왕이었기에 왕은 왕
자의 말을 받아들여 자신의 방을 뒤덮은 두꺼운 커튼을 벗겨내라
명했습니다.
그리고 커튼이 내려진 창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들어왔습니다. 어
차피 끝도 없는 사막으로 가득할 풍경을 무심히 그렸던 왕의 눈동
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창 밖에는 사막은 온데간데 없고
울창한 숲과 녹음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아무리 먼곳을
바라봐도 끝없이 펼쳐진 숲이 왕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습니
다. 너무나 놀란 왕은 말을 잇지 못했고 그런 왕에게 왕자는 천천히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 나라는 이제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왕국의 중심에서
끝까지 모두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왕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수많은 백성을 동원해
나무를 심고 개간을 해보았지만 달라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
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왕은 거듭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은 아
버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많은 이들을
동원하여 나무를 심지도 않았습니다.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
에게 그저 씨앗들을 나누어주었을 뿐입니다.
씨앗을 심는 것도 그것을 기르는 것도 열매 맺게 하는 것도 모두
그들의 역량인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사막이 아닌 숲을 간절히 원
했기에 믿음을 혹은 희망을 가졌기에 그들의 손으로 숲을 일궈낸
것입니다. 아버지 이 나라의 끝없는 사막은 비로소 숲의 시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는 사람을 불러 그간 왕에게 보냈던 편
지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편지속에는 왕이 생전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수많은 씨앗과 꽃잎 그리고 나무열매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것들은 모두 왕국에서 자라난 것들이었습니다. 사막이 아닌 푸른
대지가 키워낸 산물이었습니다.
終言
"이비, 대체 V는 누구였소?" "그는 나의 아버지였고, 또 어머니였고, 나의 동생이었고, 당신이었고, 그리고 나였어요. 그는 우리 모두였어요"
- 영화, 브이 포 벤데타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