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4D 시대에 나온 흑백무성영화 '아티스트'
이 기획이 나한테는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사의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배우의 미세한 표정과 눈빛, 작은 제스처 하나에도 더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장면에 꼭 맞는 음악이 더해지면서 인물들의 감정이나 분위기에 더 빠져들게 된다.
정말정말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특별한 영화 '아티스트'의 명장면&명대사를 내 마음대로, 내 기준대로 모아봤다.
1. '페피'의 분장실 씬
극중에서 '조지'는 무성영화계의 톱스타로, '페피'(베레니스 베조)는 유성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예 스타로 나온다. 뜨기 전에 '페피'가 '조지'의 영화에서 단역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된 상황. '조지'의 분장실에 들어간 '페피'는 텅 빈 분장실에서 '조지'가 벗어둔 재킷 사이에 자신의 손을 넣어서 마치 그에게 안긴 것처럼 연기한다. 코믹하기도 하고 로맨틱하기도 한 이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손이 슬금슬금 아래로 더 내려가는 연기를 펼치고 있을 때 마침 분장실에 들어온 ‘조지’한테 딱 걸리기도 하고. ㅋㅋ 이 장면은 ‘제7의 천국’이라는 1927년도 프랭크 보저지 감독의 무성영화 속에 등장했던 명장면을 오마쥬한 장면이라고 한다.
위 사진이 ‘아티스트’에서의 장면이고, 아래 사진은 ‘제7의 천국’에서의 장면.
‘아티스트’에서는 사람 사이즈만한 옷걸이에 모자까지 걸쳐져 있어 더 업그레이드 된 느낌.
↑영화 ‘제7의 천국’
2. “특별한 게 있어야 배우로 성공할 수 있어요.”
‘페피’의 분장실 씬의 연장이기도 한 장면. 위 사진과는 관련이 없지만, ‘페피’ 얼굴의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 스틸을 가져왔다. ‘조지’의 분장실에서 혼자 안기는 연기(?)를 펼치고 있던 ‘페피’. 곧 ‘조지’가 들어오면서 잠시 어색한 광경이 연출되고, ‘조지’는 ‘페피’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분장실에 있던 펜슬로 ‘조지’가 ‘페피’의 입가에 점을 하나 찍어주며 던지는 말, “특별한 게 있어야 배우로 성공할 수 있어요.”
점을 찍어주고 함께 미소 지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조지’와 ‘페피’의 모습이 아름답게 찍힌 장면이다. 그리고 이어서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모습이, 기발하고 재치 있게도 카메라가 거울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비밀스럽고 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때 ‘조지’가 ‘페피’에게 찍어준 이 점이 나중에 유성영화계의 핫스타로 떠오르는 ‘페피’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가 된다. 그러니까 위 사진은, 시대의 아이콘이 된, 성공한 ‘페피’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이는 스틸.
3. '조지'와 아내가 소원해지는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
이 장면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단 몇 컷으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지'와 아내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걸 표현해 낸 장면.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조지'의 단독 컷으로 한 번, 아내의 단독 컷으로 한 번, 이렇게 번갈아 가면서 화면을 잡아준다. 처음에는 둘이 음식을 먹고, 그 다음에 또 다시 다른 음식을 먹고, 그 다음에 '조지'는 아내에게 무관심한 채로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보고, 아내는 '조지'가 나온 잡지에 불만의 표시로 낙서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교차로 카메라가 각자의 모습을 비추는 동안 의상이 계속해서 바뀐다. 이게 다 다른 날의 다른 상황이라는 것. 점점 부부의 관계가 소원해 지고 있음을 단 몇 컷으로 재치 있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떠오른 영화는 바로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 '아티스트'의 미셸 아자나비슈스 감독이 이 영화에서의 명장면을 오마쥬해서 표현했다고 한다. 동일한 방식과 동일한 기법으로.
위 사진은 ‘아티스트’의 ‘조지’의 모습, 아래 사진은 ‘시민 케인’의 장면
↑영화 ‘시민 케인’
4. 영화 속 첫 효과음 등장씬
극중 무성영화계 최고의 톱스타인 '조지'(장 뒤자르댕)는 유성영화가 도래하는 시대적 과도기에 적응하지 못한 채 점점 퇴물배우로 전락해 간다. 어느 날, 악몽을 꾸게 되는 '조지'는 꿈 속에서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갑자기 영화에 '소리'가 등장한다.
'조지'가 자신이 들고 있던 유리잔을 테이블에 놓을 때 '탁-' 하고 정적을 깨는 유리잔의 소리는 그 순간의 '조지'의 공포와 두려움을 내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조지’는 소리가 나자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다시 유리잔을 탁- 하고 놓아보기도 하고, 다른 물건들을 쓰러뜨려 보기도 하며 그 소리들을 재확인한다.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의자가 쾅 하고 쓰러지는 소리에 개가 짖는 소리도 난다. 그런데 오직 자신의 목소리만 들리지 않는다.
이 장면이 나오기 직전에는 음악도 멈춰 있다. 그야말로 정적. 그 때에 들리는 저 물건들의 소리, 개가 짖는 소리, 여자들의 웃음소리는 정말.... 그 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블록버스터 영화의 사운드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조지'가 느꼈던 것처럼.
5. ‘페피’가 ‘조지’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이 장면도 인상 깊었다. 무성영화계의 톱스타였던 ‘조지’가 유성영화로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점점 퇴물 배우로 전락해 가고, 그 과정을 멀리서 계속 지켜보던 ‘페피’가 ‘조지’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
상황은 이렇다. 자신의 옛날 영화 필름들을 돌려 보다가 현재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분노하고 자조에 빠진 ‘조지’가 모든 필름들을 다 바닥에 집어 던지고, 성냥불을 붙인다. 점점 더 거세지는 불길은 급기야 ‘조지’마저 잡아먹을 기세. ‘조지’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불길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고, 원하는 것을 찾은 후에 그걸 꼭 껴안고서는 연기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조지’의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페피’가 촬영장을 박차고 병원으로 달려오고, 의사들조차 너무 꼭 쥐고 있어서 빼앗기 힘들었다던 ‘조지’의 소중한 ‘그것’, 바로 단역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페피’와의 촬영 장면이 담긴 필름을 발견한다.
이 때 그 필름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이 흥미롭다. 웃으면서 NG를 내던 그 촬영 장면들 컷컷을 사진 슬라이드쇼처럼 짧게짧게 잘라서 보여주는데, 이 때 오르골에서 나올 법한 음악소리가 인상적이다.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을 동화처럼 보이게 해 준다.
6. ‘아티스트’의 하이라이트, 탭댄스씬
뭐니뭐니해도 ‘아티스트’의 가장 인상적인 명장면은 ‘조지’와 ‘페피’의 탭댄스 장면일 것이다. '조지'와 '페피'의 사랑의 결실, 유성영화의 본격적인 도래, 무성영화 배우와 유성영화 배우의 조화와 타협 등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한 이 탭댄스 장면은,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탭댄스 그 자체만으로 황홀함을 준다. 2분여 간 쉼 없이, 원 테이크로 진행된 탭댄스 장면은 배우들의 다채로운 동작과 표정연기가 더해져서 너무나도 아름답고 흥겹게 완성되었다. 두 배우는 이 2분간의 탭댄스 장면을 위해서 무려 5개월 동안 연습했다고.
이 장면을 보면 바로 '싱잉 인 더 레인'이 연상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탭댄스 장면을 찍은 곳이 '싱잉 인 더 레인'의 스타, '진 켈리'의 스튜디오라고 한다. '아티스트'를 보면서 장 뒤자르댕이 진 켈리와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7. “With pleasure.” (기꺼이요.)
탭댄스씬 바로 뒤에 나오는 장면이지만 워낙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부분이라 나눠서 써 봤다. ‘아티스트’에서 남자 배우 장 뒤자르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면.
본격적인 유성영화 시대로 바뀌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티스트’는 영화의 마지막에 소리가 나오게 한다. 탭댄스씬을 끝내고 감독의 ‘컷!’ 소리가 나자마자 제작자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너무도 흡족한 표정으로 퍼펙트를 외친다. 한 번 더 촬영해 보자는 제작자의 제안에 ‘조지’의 한 마디, “With pleasure.”(기꺼이요.) (이 장면은 말소리가 들린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갔던 내 친구는 이 순간에 익룡이 될 뻔 했다고. 그만큼 짜릿!한 희열이 느껴진다. 정말 익룡과 같은 소리로 “끄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러버릴 뻔 했던 장면. 장 뒤자르댕의 매력이 이 장면에서 완전히 ‘포텐 터진다’고 해야 할까? 문제 없다는 듯 살짝 고갯짓하며 씨익 웃어보이는 그 표정과 눈빛은 정말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백 개쯤 찍어주고 싶다. (위 사진도 매력적이지만 영화에서의 그 표정은 좀 다르다.)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고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 ‘아티스트’.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