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설에서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일본문학의 현주소
‘사(私)소설’이라 불리며 폄하됐던 일본 소설은 1987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이후 광범위한 팬 층을 확보했다. 나 역시 하루키로 일본문학에 입문한 그야말로 하루키 세대다. 하지만 하루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일본의 작가로서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는 후속타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요시모토 바나나·에쿠니 가오리·야마다 에이미 등 일본의 3대 여류작가를 중심으로 다시 일본의 소설들이 한국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사소설은 특성상 개인의 삶을 여과 없이 쏟아내어 문학적 품위가 없다는 폭로문학의 한 형태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보니 문학적으로 작품성을 높게 인정받지 못한다. 이들 작가들은 주로 연애소설을 쓰기에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특유의 감성으로 남성들의 서슬 퍼런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한국 여성들의 지갑을 열어낸 것이다. 남자들은 에쿠니 가오리나 바나나여사의 책을 펴들고 카페에 앉아있는 여자들을 된장녀라고 욕을 했지만, 이들 사소설 작가들의 내밀한 삶의 고백한 한국 싱글 여성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특히 에쿠니 가오리는 일본적 자세를 담은 이야기와 작가적 경험을 토대로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작가로 한국에 알려져 있다.
좌측부터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 고로 사소설 삼인방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이 남녀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서로를 보듬어주는 내용이 많아 ‘치유의 소설’로 불리는 반면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서는 여자가 연애를 해도 영혼은 남자에게 주지않는 ‘쿨한 태도’를 유지한다. 여성의 자의식과 사회적 위치에 대한 욕구를 적절히 어루만져주는 그녀의 섬세한 필체는 이 시대의 싱글 여성들의 지친 맘을 위로해주기 충분했다.
좌측부터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온다 리쿠 고로 이들은 미스터리 삼인방.
하지만 역시 사소설이라는 것이 남성들에겐 따분한 연애담일 뿐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일본 사회파 미스테리 소설이다. 90년대 중반에 등장한 스즈키 코지와 같은 호러소설이 아닌 사회적 의제를 가득 담은 흥미진진한 미스테리 소설은 순식간에 한국 남성 독자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미야베 미유키로 구성된 미스터리 3인방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일본의 미스터리 전문 작가들이다. 일본 미스터리가 한국에서 빅뱅 현상을 일으킨 지 벌써 3, 4년이 되어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세 작가의 작품들이 가장 고르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것은 세 사람의 작품 성격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독자들 역시 뚜렷한 취향의 차이대로 골라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중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아직도 나올게 있는지 모를 정도로 수두룩하게 나와 서점의 일본문학 섹션을 장식하고 있다.(개인적으로는 미야베 미유키의 인류애가 돋보이는 미미월드를 더 사랑한다.) 아무리 읽어도 어느새 인터넷 서점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새 책이 나와 있다. 그가 워낙 다작을 하기도 하지만, 워낙 한국에서 인기가 좋아 그의 예전 작품까지 모두 소개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기현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대 역작은 아무래도 한국에서도 엄청나게 팔린 스테디셀러 <용의자 X의 헌신>일 것이다. 처음엔 이 책의 제목이 무척 유치해보여 맘에 들지 않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이야 말로 히가시노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이란 그의 이력에서 찾을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공대 엔지니어 출신이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의 이력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그가 가장 뛰어난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부분은 그래서 트릭의 완성도에 있다. 그가 만든 트릭은 공대인 특유의 치밀한 이론을 바탕으로 설계된다. 용의자 X의 헌신의 경우 물리학자와 수학자의 두뇌싸움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그 트릭이란 게 마치 수학 공식과 같아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지극히 이과계열다운 두 사람이 맞대결이 흥미진진하다. 서로가 만든 수식을 풀어내고 증명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는 이 냉정한 공대생들은 독자들을 긴장의 터널로 자연스레 이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문체 또한 드라이하게 표현해내어 모든 작품의 내용들이 사건을 구성하는 하나의 실마리로서 작용한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수학을 풀 듯 그 과정을 증명하고, 추리하여 범인의 윤곽을 잡아내는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가 신봉하는 어느 일정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과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순수의지라고 할까.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작품에 풀어 넣으면서도 그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단서는 범우주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얼마 전 읽은 그의 최근작 <다잉 아이>의 경우 인간의 복제와 죽은 이의 원한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의 공포를 유발하는데 성공한다. 어쩌면 인간이 가진 상상력만이 문학적 혹은 인류적인 구원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음을 믿는 그의 성실함이 내 맘을 끈다.
일본의 거품경제의 붕괴와 묵시록의 색체가 짙게 배여 있는 사회분위기에 미스터리 소설들은 그 완성도를 층층이 높여왔다. 그래서인지 일본 미스터리 작품들은 유독 한국에서 영화화가 많이 된다. 어쩌면 한국의 일본 미스터리소설 열풍은 어쩌면 두 나라가 가진 사회적 의제에 대한 고민들이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있기 때문은 아닐까. 요즘 새로 개봉한 김민희, 이선균 주연의 화차를 계기로 미미여사(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볼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