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여행] 봉평신라비전시관에서 불사이군과 용생구자설을 생각한다
-봉평신라비 전시관, 월송정, 망향정을 신선처럼 노닐다...
화랑들이 놀던자취 어디가서 찾을건고
일만그루 푸른솔이 빽빽하여 숲일런데
눈앞가득 흰모래는 백설인양 방불코나
한번올라 바라보매 흥겨웁기 그지없다.
-월송정에 대하여 지은 시(詩), 숙종(肅宗) 어제시(御製詩)
선랑고적장하심(仙郞古蹟將何尋)
만주장송족족삼(萬樹長松簇簇森)
만한풍사여백설(滿限風沙如白雪)
등임일망흥난금(登臨一望興難禁)
월송정을 읊은 모든 시(詩)에는 신선 선(仙)이 들어 간다
금강송과 대게의 고장 울진은
관동8경 중 2곳이 있는 문화유산답사기의 적지다.
월송정과 망향정...을 가장 보고 싶어 울진을 찾았다^^
백면서생의 피를 타고 낳지만
울진 여행에서는 신선처럼 ㅎㅎ
* 관동팔경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울진의 월송정(越松亭)
월송정 (越松亭)
관동팔경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越松亭)은 팔작지붕 주심포, 고상누각으로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중기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퇴락되었던 것을 1933년 향인(鄕人)황만영(黃萬英)등이 다시 중건 하였다.
그후 일제말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적기(연합군)내습의 목표가 된다하여 월송주둔 일본군에 의해 철거당하여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69년 4월 평해·기성·온정면 출신의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金剛會)의 후원을 받아 철근2층콘크리트의 현대식 건물로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하여 1979년 해체하고 새설계 아래 도비 8천만원으로 1980년 7월에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조선 성종이 당시 국내 명화가를 시켜『팔도의 사정(사정-활을 쏘는 활터의 정자) 중 가장 풍경이 좋은 곳을 그려오라』 명하자 그 화공이 영흥(永興)의 용흥각(龍興閣)과 평해의 월송정을 그려 올렸더니, 성종은『용흥각의 부용(芙蓉-연꽃)과 양류(楊柳-버들)가 아름답기는 하나 월송정에 비할 수 없다』며 월송정과 그 주변의 경치에 감탄했다 한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의 푸른 소나무와 흰모래 밭에서 웅지(雄志)를 품던 도장으로도 알려지고 있는 월송정은 숙종때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곳을 찬미한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 정자위에서 바라보는 빽빽히 우거진 노송림과 명사십리(明沙十里)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은 가히 손꼽을 만한 명승지(名勝地)이다.
월송정은, 한때 달밤(月夜)에 송림(松林)속에서 놀았다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고 했고, 월국(越國)에서 송묘(松苗)를 가져다 심었다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고도 했으나, 전해오는 각종 자료에 의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 불리고 있다.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 26평 규모의 옛 모습으로 복원된 월송정은, 1985년에 안내간판을 비롯 진입로 확·포장과 주차장(350평)이 설치되었고, 1987년에 도비3천만원으로 주변정비를 말끔히 단장했다. 또 1989년에 산책로 1,200m를 조성,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고, 주변에는 송림을 자랑하는 구산(邱山) 해수욕장이 자리잡고 있으며,『월송정』현판은 80년 준공당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로 새겨져 있다. [울진군 자료]
'불사이군'의 반골기질을 지닌 울진사람의 혼을 읽으려 들린 곳
월송정을 들린 후,
봉평신라비를 보기 위해 찾은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으로^^
국내 최대 비석전시관인 경북 울진 봉평신라비 전시관은
국보 242호인 봉평신라비가 있다.
울진 봉평 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종목 : 국보
-지정번호 : 242호
-재료 : 화강암
-수량 : 1기
-지정일 : 1988. 11. 4
-소재지 :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
-시대 : 524년(신라 법흥왕 11)
-소유자 : 국유
이 비는 일부가 마멸이 되어 정확한 비문의 판독이 어려우나, 524년(신라 법흥왕 1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윗너비 32cm, 가운데 너비 36cm, 아래쪽 너비 54.5cm로 전체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으로 414년(고구려 장수왕 2)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하며,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것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비문은 자연석 화강암에 한 면(앞면)만을 다듬어 글자를 새겼는데, 구성은 전체 10행으로 1행 31자,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전체 글자 수는 398자이다.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울진지방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자 신라에서는 대군(大軍)을 일으켜 이 사건을 진압한 뒤 법흥왕과 신료 13인이 모여 그에 대한 사후 처리의 일환으로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어 얼룩소를 죽이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한 뒤 현지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장육십, 장백대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의 성격을 대체로 율령비(律令碑)로 보고 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 인하여 고대사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를 제공하여 그동안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한국의 고대사가 밝혀지기도 하였다. 즉, ‘신라육부(新羅六部)’라는 글자가 나옴으로 인해 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신라6부가 성립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법흥왕이 탁부(啄部)로, 그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은 사탁부(沙啄部) 소속으로 되어 있어서 형제가 각기 다른 부(部)를 관칭(冠稱)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또 노인법과 죄인을 처벌하는 장형의 존재는 520년(신라 법흥왕 7) 율령제도가 성문법으로서 실제로 행하여졌음을 증명해 주는 등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이밖에도 부를 초월하지 못한 왕권의 한계, 당시 신라의 영역, 관료제도, 지방통치조직과 촌락구조, 의식행사 양상 등의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甲辰年正月十五日喙部牟卽智寐錦王沙喙部徙夫智葛文王本波部△夫智 / 干支岑喙部美昕智干支沙喙部而△智太阿干支吉先智阿干支一毒夫智一吉干支喙勿力智一吉干支 / 愼肉智居伐干支一夫智太奈麻一尒智太奈麻牟心智奈麻沙喙部十斯智奈麻悉尒智奈麻等所敎事 / 別敎令居伐牟羅男弥只本是奴人雖是奴人前時王大敎法道俠阼隘尒耶界城失火遶城村大軍起若有 / 者一行△之△△△△王大奴村負共値五(?)其餘事種種奴人法 / 新羅六部煞斑牛△△處事大人喙部內沙智奈麻沙喙部一登奈麻男次邪足智喙部比須婁邪足智居伐牟羅道 / 使卒次小舍帝智悉支道使烏婁次小舍帝智居伐牟羅尼牟利一伐彳尒宜智波日△只斯利一今(?)智阿大兮村使人 / 奈尒利杖六十葛尸조村使人奈尒利阿尺男弥只村使人△△杖百於卽斤利杖百悉支軍主喙部尒夫智奈 / 麻節書人牟珍斯利公吉之智沙喙部善文吉之智新人喙部述刀小烏帝智沙喙部牟利智小烏帝智 / 立石碑人喙部博士于時敎之若此者獲罪於天居伐牟羅異知巴下干支辛日智一尺世中了三百九十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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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울진사람들은 반골기질이 강해 태조 이성계에 반대해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부르짖으며
공민왕 복벽운동을 주동하여 고난의 세월을 보냈고,
더 과거에는 이 봉평신라비 내용에서 증명되듯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에 위치해 어려움을 많이 격었단다.
비(碑) 내용을 보면
울진지방이 고구려 영역이었으나 신라에 편입되고 나서도
신라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노인법(奴人法) 적용을 받았다.
이에 항거하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노예신분을 벗어나고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는 대군을 일으켜 평정한 후
왕을 비롯한 고위 귀족 14명의 논의하여
얼룩소를 죽여 제의를 지내고 이 비를 세워 경고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울진 굴구지 마을처럼 임진왜란이 터진 줄도 모르고 살았다는
한반도의 오지로... 축복(?) 받은 땅이다.
이 전시관은 2001년 유교문화권 사업으로 180억원의 국,도비를 들여
2층 건물 연면적 2,393㎡에 실내 전시관과 야외비석공원으로 이뤄졌다.
전시실에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 실물과
중원 고구려비, 임신서기석 등 삼국시대 주요 비석모형 10점과
금석학의 계보, 시대별 비석의 양식변화 ,한자 서체와 한글창제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봉평신라비에는 법흥왕의 성을 牟(모) 로 적고 있어
신라 김씨왕조는 김씨로 개명한 선비족 흉노 김알지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하는 등
귀중한 문화,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야외 비석공원에는 한반도 모양을 조성,
출토 위치에 광개토왕릉비와 삼국∼조선시대 국보, 보물급 모형비 25점을 세우고
비석거리에는 울진지역 송덕비 45점도 전시해
국내 최고 비석전시관의 면모를 갖췄다.
광개토태왕비의 실물 크기 모형...
광개토대왕이 말 달리던
국내성 너머, 북간도 너머, 흑룡강 넘어...
천년왕국의 번영, 돌위에 새겨진 뜻은?
서토수복(西土收復)에 대한 염원......
월송정에 있는 안축(安軸)의 시(詩)
사거인비수자동(事去人非水自東)―옛사람 간 곳 없고 산천은 의구한데
천년유적재송정(千年遺跡在松亭)―천년전 옛 자취 오직 송정에만 남았으며
여라정합교난해(女羅情合膠難解)―겨우사리 다정한 듯 서로 엉켜 아니풀고
제죽심친속가춘(弟竹心親粟可春)―형제대가 마음맞아 좁쌀방아 찧는구나
유저선랑동자학(有底仙郞同煮鶴)―어느 화랑 예 있어 학을 구워 술 나누리
막령초부학도룡(莫令樵斧學屠龍)―초부의 도끼로서 용잡는 것 배움말라
이모중도회유지(二毛重到會遊地)―머리털 절반 희어 예 놀던 곳 찾아오니
각선창창석일용(却羨蒼蒼昔日容)―솔은 늙지 않았구나 푸르고 푸른 네 모습아
임진년 용의 해, 용생구자설의 의미를 생각하며
비석 박물관(?)에 왔으니...비석 공부 좀 하자^^
거북 모양의 잔등에 장방형의 받침(碑座)을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성행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비석을 세울 때에는
일반적으로 땅에 묻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으나
통일신라 이후 당의 영향을 받아 귀부를 비좌로 삼게 되었고,
그뒤 조선시대까지 석비(石碑)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
비의 구성은 귀부, 비신, 이수로 되어 있다.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 의하면
용은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그 이름들은 비희,이문,포뢰,폐안,도철,공복,애자,산예,초도이며 각기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첫째 비희(贔屭)는
모양이 거북과 비슷한데 이빨이 있다.
힘이 세고 무거운 것을 짊어지는 것을 좋아해
등 위에 무거운 것을 지고 있어서 석비 아래 있는 거북이 형상이 이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라가 문란해 망조가 들어갈수록 귀부인 거북 형상이
살을 찐다는 것이다^^
신라말기의 귀부...살이 넘치는 몸매!
귀부 (비석받침, 龜趺):
거북 모양의 잔등에 장방형의 받침(碑座)을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성행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비석을 세울 때에는 일반적으로 땅에 묻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통일신라 이후 당의 영향을 받아 귀부를 비좌로 삼게 되었고, 그뒤 조선시대까지 석비(石碑)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
현존하는 귀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661년에 세워진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의 귀부로서 이수(螭首)와 함께 뛰어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8~9세기를 거치면서 거북의 머리는 용으로 변하고, 표현법도 사실적인 형태에서 점차 위엄있고 추상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용의 머리에 거북의 몸을 한 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12세기경에는 귀부 형태의 비석받침이 갑자기 대석(臺石) 형태로 바뀌면서 귀부는 차츰 사라진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귀부는 극소수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답습했지만 퇴화되고 도식화되었다. 비문을 통해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서 당시의 조각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사전 자료]
우리 조상들의 익살과 해학이 담긴
장인의 깜찍한 재치...
한쪽 발을 든 특이한 형상의 귀부^^
용생구자설, 아홉마리 용 중
한마리만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한다.
그것을 항룡(亢龍)이라 부른다.
올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9룡 중 승천하는 용은 누구일까?
역사 교육에도 좋은
울진 문화유산 탐방에서 꼭 들려야할 곳,
망향정으로 끝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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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정(望洋亭)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은 그 위치가 고려 때에는 기성면 망양리 해변언덕에 세워져 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채신보가 이곳의 망양정이 오래되고 낡았다하여 망양리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다 한다.
그 후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1518년(중종 13)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하였고, 1860년(철종 11)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더불어 현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屯山洞)으로 이건하였다 한다.
그 후 오랜세월 풍우로 인해 낡은 것을 1957년 울진군, 울진교육청이 국·도비 보조금과 뜻있는 지역인사들의 도움으로 1959년 9월에 중건 낙성한 것을 1979년11월에 군에서 보수 정화한 바 있고, 1994년 9월에 사업비 9천1백20만원을 들여 재보수 하였다.
망양정은 성류굴 앞으로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동해의 만경창파를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그 경치가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가는 곳이라하여 숙종이『관동제일루』라는 친필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하며, 숙종과 정조가 친히 지은 어제시와 정추(鄭樞)의 망양정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초, 채수(蔡壽])의 망양정기 등의 글이 전해오고 있다.
기성면에 있었던 구 망양정의 절경을 읊은 송강 정철의『관동별곡』중 한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망양정 오른 말이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 가뜩 노한 고래 뉘라서 놀래관대 불거니 뿜거니 어지러히 구는지고. 은산(銀山)을 꺾어내어 육합(六合)에 나리는 듯 오월장천(五月長天)에 백설은 무삼일고. 져근덧 밤이들어 풍랑이 정하거늘 부상지척(扶桑咫尺)에 명월을 기다리니 서광천장(瑞光千丈)이 뵈는 듯 숨는고야. 주렴을 고쳐걸고 옥계를 다시쓸며 계명성(啓明星)돋도록 고초 앉아 바라보니 백련화 한 가지를 뉘라서 보내신고. 이 좋은 세계 남대되 다 뵈고져···
망양정 아래 포구에는 군이 1985년에 개설한 망양 해수욕장이 있고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155호인 천연동굴 성류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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