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자들이나 경제·경영학자들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마치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즉, 현대의 거대 기업은 주식분산이 잘 이루어지고 주주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지고 항상 변동하기 때문에 주주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없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주식을 전혀 소유하지 않은 사람도 주식회사의 경영을 맡을 수 있고, 반대로 모든 주식을 소유한 사람도 경영을 남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전문가들이 사실문제(quid facti)를 권리문제(quid iuris)와 구별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③ 보론:법인 본질론에 대하여
여기서 잠시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논의는 아니지만 주인 없는 법인의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이른바 법인 본질론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태고 넘어가려 한다. 법인의 존재방식을 놓고 법학자들이 이른바 의제설(Fikionstheorie)과 실재설(Realitatstheorie) 사이에서 벌이는 논란을 일러 일반적으로 법인 본질론이라 부른다. 사비니에게서 비롯된 이 논란의 요체는 법인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과연 어떻게, 무엇으로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대다수 법학자들은 법인의 의제설과 실재설의 대립을 설명할 때, “법인은 자연인에 의제하여 만들어진 가상적 존재이다”는 입장을 법인 의제설이라 하고, 반대로 법인을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실체로 실재하고 있는 것을 법이 단지 승인한 것이라고” 하면 이것이 법인 실재설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 논쟁을 촉발시킨 사비니(F. C. von Savigny)와 기르케(O. von Gierke) 자신이 한 말을 살펴보면 이른바 법인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법인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이라 할 수 있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문제 되고 있는 것은 법인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처럼 엄연히 존재하는 법인 기업을 눈앞에 두고 법인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심각하게 묻는 법학자가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토론이 아니라 정신감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법인 의제설이 법인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한갓 가상적 존재라고 보는 입장이라는 설명이나, 법인 실재설이 그에 반해 법인이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이라는 설명은 둘 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법인 의제설이 법인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도 옳은 말이 아니며, 법인 실재설의 핵심이 법인의 존재를 사회적 실체로서 인정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법학자가 주장하듯이 이 두 학설의 대립이 오늘날 별로 의미가 없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비니와 기르케의 법인학설은 서로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한 유사성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이론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니 사비니와 기르케의 대립에 대해서도 유사성을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겠지만, 나중에 유사성을 말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먼저 두 사람 사이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어떤 것의 본질을 묻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본질을 묻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근거, 곧 존재근거를 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어떤 것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전제되어 있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해 주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니, 이때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법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법인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법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아서 그것이 존재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인 것이다. 이 점에서 사비니도 기르케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차이가 무엇인가? 그 차이는 법인이 법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J. P. Sartre)의 말을 굳이 끌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것의 존재근거로서 본질을 묻는 것은 오늘날에 와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법인의 본질 곧 곤재근거에 대한 물음이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법인이 우리 눈앞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법인이 있을 수 있는지가 아직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 보자면 오직 개별적인 인간만이 인격체일 수 있다. 그에 반해 법인이란 어떻든 법에 의해서 인정된 인격체이다. 아무리 법인 실재론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이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법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또는 법이 없다면 현대자동차도 삼성전자도 법인 기업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인은 법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법이 법인의 존재근거가 아니겠는가? 사비니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유산점유자(bonorum possessor)가 의제된 상속자인 것처럼, 법인은 의제된 인격이다.” 여기서 유산점유자는 로마법상에서 원래 상속자가 아닌데 법무관에 의해 법적으로 지정된 상속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유산상속자는 법에 의해 마치 상속자인 것처럼 가정된 상속자이다. 마찬가지로 법인 역시 그 자체로서는 인격이 아니지만 법에 의해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법적인 권리주체로서 인정된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비니의 입장에 따르면 법인의 존재근거는 국가의 법률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며, 주식회사 법인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법률은 법인에게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비로소 온전한 권리주체로서 존재하게 하는 근거이다. 그러므로 법률이 형상을 부여하기 전까지는 아직 법인은 존재할 수 없다. 법학자들 가운데는 법인의제설이란 법인의 설립을 위해 복잡한 허가를 필요로 했던 19세기의 산물이며 법인 설립이 자유롭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현실적으로 의미를 잃은 이론이라 설명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경솔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나라마다 법이 바뀜에 따라 주식회사 법인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법적인 규정의 변천에 따라 지금까지 그 형태가 달라져 왔고, 사회적으로는 나라에 따라 법이 다르기 때문에 역시 그 형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우리가 주식회사의 경영권과 관련해서 그 지배구조를 바꾸려고 할 때 언제나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전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사비니가 이런 입장을 취한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그가 칸트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자기의식을 지닌 개별적 인격만이 도덕적 능력과 법적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법인이 온전한 의미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인격적 주체가 아니고 의제된 인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실제로 법인으로 인정되고 기능하는 단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법인의 권리능력이 실제 인격성이 아니라 다만 의제된 인격성에 존립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르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역시 법인격의 개념을 “결합된 인격들의 총합과 구별되는 통일된 전체로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단체가 법질서에 의해 인정받은 능력”이라고 규정한다. 즉 법에 의해 인정될 때 법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인 플라톤에게 아무리 형상이 사물의 존재근거라고 하더라도 그 형상이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사물 외부에 초월적인 방식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아무런 질료적 토대가 없는데 형상만으로 어떤 사람을 창조할 수도 없다고 항변했던 것처럼, 기르케 역시 한편에서 법인이 법률을 통해 법적인 인격을 인정받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법률이 법인의 존재근거라고 보는 데는 명백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에 따르면 법률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으로 법인을 창설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단체를 사후적으로 법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학이나 교회는 이미 중세 때부터 존재하고 있던 전형적인 단체인데, 그 단체들은 개별적 구성원들의 총합과 구별되는 어떤 자립적 권리주체로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법률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단체들이다. 기르케는 법인이란 없던 것을 법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고 있던 단체를 법률적 규정을 통해 그 자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승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법인격에 해당하는 개념을 아예 단체인격(Verbandsperson)이라고 불렀다. 법적 인격이란 말 자체에서부터 법률에 매개된 인격이라는 뉘앙스를 풍기지만, 단체인격이라 하면 단체는 법률 없이도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기르케의 말이 훨씬 더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만사가 다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남는 물음은 단체의 존재가 법적 인정에 얼마든지 앞설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단체에게 단체 구성원들의 총합과 구별되는 전체로서 자립적인 권리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남기 때문이다. 법인격이란 단체에 부여된 인격이다. 그런데 단체에 부여된 인격은 구성원들 개인의 인격과 구별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성원들 개인이 아니라 그들이 모은 단체를 전체인 하나로서 간주하고 개별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인 하나에 대하여 법이 부여한 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별적인 구성원의 인격과 단체의 인격이 분리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어떤 단체가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법인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 단체의 모든 법적 권리와 책임은 구성원들 개인에게 직접 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법적인 의미에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개인이지 법인으로서의 단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인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구성원 개인들과 구별되는 일종의 보편적 인격 또는 보편적 주체가 반드시 상정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구성원 개인의 인격은 자연인 속에서 표현되고 실현되지만 단체의 인격을 실현하는 그런 보편적 주체는 어디에서 어떻게 실현되는 것인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단체의 인격을 구현하고 있는 주체가 개인처럼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자연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제에 관해 사비니는 그런 보편적 주체는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법에 의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허구적으로 가정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법인 의제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허구적으로 가정된다 해서 법인의 보편적 인격성이 한갓 관념적 추상물(Ens Rationis)로 그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수많은 단체들이 법인으로서 실제로 법적인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존재하고 또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정체가 무엇이든 법인인 이미 보편적 주체로서 사회 내에 존재하고 있다. 법인은 실제로 재산을 소유하며, 실제로 계약을 체결하고, 실제로 소송의 당사자가 된다. 그런 한에서 법인은 엄연히 유령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법률적 주체이다. 그러므로 법인의 보편적 주체성을 단순히 허구적으로 가정된 것이라 말하는 것만으로는 법인의 실체를 전혀 설명할 수 없으니, 우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행위하는 법인격이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법인이 하는 모든 일이 유령이 한 일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그 모든 일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든 그가 직접 현존하는 보편적 주체가 아니라는 것은 애써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와 내가 만나 아무리 친밀한 우리가 된다 하더라도, 그 ‘우리’라는 것이 너와 나의 외부에 또 다른 주체로서 존재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는 언제나 개별적 인간일 뿐, 보편적 주체가 그 자체로서 (보편적 주체를 구성하는) 개별적 주체들 외부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인이 개별자가 아니라 단체로서 엄연히 법적인 행위의 주체라면, 하지만 그 주체가 보편적 주체일 수 없다면 남는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어떤 개별적 주체가 보편적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다. 즉 어떤 개인이 법인의 보편적 주체성을 대신하는 것이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제 법인격의 문제는 법인의 존재 근거에 대한 물음에서 대표의 문제로 이행하게 된다. 법인 일반을 통틀어서 보자면 이 문제는 누가 단체인 법인의 보편적 주체성을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대표한다는 것은 한갓 이름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체의 한 구성원이 단체 구성원들 전체의 의지와 생각을 자기의 의지와 생각 속에서 전형적으로 표현하고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老子)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보편적 주체성을 구현한 자가 바로 성인(聖人)인데, 그에 따르면 “성인은 정해진 마음이 따로 없고 백성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는다(聖人無常心利百姓心爲心)”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이념형이다. 일반적으로 그 정해진 목적을 충실히 대변하는 것으로 법인의 보편적 인격성을 구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주체성을 대리하는 개별적 주체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곤경이 이런 식으로 다 해소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단체의 현실적 운영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이 정도로 타협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주식회사 법인을 누가 대표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적어도 법률적으로 보자면 주식회사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들을 선임하고 이사들 가운데 다시 대표이사가 선임되게 되어 있으므로 주식회사 법인의 구성원은 주주요, 주주들의 대표가 곧 주식회사 법인의 대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이 그렇게 규정한다 해서 과연 그것이 주식회사에 대한 올바른 규정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중의 논의로 미루고 주식회사의 두 번째 특성으로 나아가려 한다.
▶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술『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편찬(2012년 출판)133쪽~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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