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많이 아파
나는 황급히 여자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가 들어서는 안 될 거라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때마침 다른 두 여자도 일어나고 있다.
자신들의 자리를 정리하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카운터로 돌아가 앉는다.
수정의 자리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그녀들은
천천히 카운터를 향해 걸어나온다.
화장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볼륨녀가 화장실로 들어간다.
채연은 화장실 밖에서 서성이고 있다.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뒤에
볼륨녀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곧이어 수정이 뒤따라 나온다.
얼굴은 발갛게 부어 있다.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수고하세요.”
“네...안녕히 가세요.”
수정이 메세지를 받고 피씨방을 떠나기 전까지의
해맑던 모습들은 온데간데 없다.
약속이나 한듯
세 여자 모두 굳어진 표정으로
짤막한 인사말을 남기고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간다.
그녀들과 깊은 얘기를 나눈 적도
또 그녀들이
무엇을 하는지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니지만
어렴풋이 이해를 할 수 있다.
단순한 느낌일 뿐이지만
뭔지 모를 쓰라린 마음이 스며든다.
서둘러 청소를 끝내고
카운터에 앉아 잠시 쉬고 있으려니
교대자가 들어온다.
나와는 달리 나와 교대하는 사람은
한번도 늦게 온 적이 없다.
퇴근하는 길에 담배를 사기 위해
잠시 편의점으로 들어간다.
아침밥은 잘 먹지 않긴 하지만
오늘따라 배가 출출한 상태이므로
빵이라도 하나 사갈까
안쪽을 서성이다가
채연이 사줬던 오렌지주스가 눈에 들어온다.
“삼천 백원입니다.”
당시 디스플러스 가격이 천육백원에 불과했으니
500원짜리 빵 가격을 제외하더라도
오렌지주스가 천원씩이나 하는구나.
그냥 입가심으로 마시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채연은 가격을 알고서도 나에게 선뜻
이 오렌지주스를 건넨 것일까.
집으로 들어와서
밤새 뿌연 담배연기에 찌든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한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면서도
수정의 부은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오히려 또렷한 모습으로
눈 앞을 맴돌고 있다.
오늘도 쉽게 잠이 들기는 틀린 것 같다.
.
.
.
그날 밤에는 그녀들이 오지 않았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이랬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크게 신경을 쓸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제 일과 오늘 그녀들의 부재를
연관시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에 여자화장실에 들어갔다
수정의 슬픔어린 목소리만 듣지 않았더라면
비어있는 그녀들의 자리를
계속해서 바라보지는 않을 텐데.
다음날,
전날에 이어 오늘도
제 시간보다 십분이나 일찍 출근하니
경림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빠 요즘 왜그래?”
“뭐가?”
“집에 안 좋은 일 있어?”
“그런 거 없어.”
그 동안 내가 자주 지각을 했고
또 그렇지 않은 날이라고 해도
원래 출근시간보다 일찍 온 날은
알바시작 후 첫 이틀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없었으므로
경림이 이런 질문을 해 오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물어보면
내 입장이 뭐가 되는가.
고작 이틀 연속 십분 일찍 온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걱정되잖아.”
“뭐가 걱정돼?”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하는데 그럼 걱정이 안돼?”
“그 동안 나 자신을 잊고 살았던 것 같아. 이제야 내 본모습을 찾은 것 뿐야.”
“...염병한다.”
“......”
사실
내 본모습은
당연히 지각을 하는 것.
알바를 하면서 그녀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그녀들에게 가까워지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알바를 그만두거나 짤리는 그날까지
내가 이렇게 일찍 올 일은 없었을 터.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그녀들에 대한 걱정스러운 마음이 없었더라면
출근시간보다 빨리 와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요즘 표정이 왜 그래?”
“응?”
“얼굴이 완전 죽었잖아. 일찍 오는게 그렇게 싫어?”
“별로 좋지는 않아.”
“으이그...”
어느새 표정에까지
내 마음이 전이된 것일까.
하긴,
이등병 때도 표정관리 못한다고
고참들에게 늘상 갈굼을 당했었으니.
“일찍 안 와도 되니까 인상 좀 펴.”
“인상 펴는 날이 늦게 오는 날이야.”
“......”
“......”
“...펴지마.”
“...으응;”
인수인계를 마치고 나서
경림은 퇴근 준비를 서두른다.
늘상 이 시간에는 사장이 없다.
항상 아홉시 이후에야 밥을 먹으러 가긴 하지만
최근 들어 부쩍 자리를 비우는 날이 잦다.
자리를 비워도 경림이 일을 잘하기 때문일까.
“나 갈게. 아, 그리고 내일은 밥 사.”
“무슨 밥?”
“저번에 밥 산다고 했잖아. 내일 사라고.”
“아...안돼.”
털털한 줄만 알았더니
의외로 집요하구나.
농담처럼 말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다니.
“왜 안돼?”
“아...저...내일은...”
“내일은 뭐? 할일 없는 거 다 아는데.”
“내일은...마 많이 아파.”
“......”
“......”
요즘 좀 안 맞았더니
감을 상실했나보다.
경림의 손바닥은 여전히 맵다.
“너는 어떻게 아픈 것도 예약해 놓고 아프냐 미친 인간아!”
니가 때려서 아파진거야 *;
“내일 퇴근시간 맞춰서 올 테니까 도망가지 말고 기다려.”
“...으응.”
말을 마치고는 경림은 매몰차게 돌아선다.
이젠 돌이킬 수가 없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밥을 사준다는 쓸데없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거였는데.
경림이 나가고 나서
천천히 가게 안을 돌아 본다.
그녀들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이틀 연속으로 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내가 이틀 연속으로 일찍 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
생각해보니 비유가 좀 이상하다;
일찍 왔기 때문인지
가게 안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인다.
열시가 되었음을 알려주고
카운터로 가서 기다린다.
이제 곧 전쟁터가 될 것이다.
미리 금고를 열고 준비해 두어야겠다.
사실 막판 교복러쉬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늦게 온 것도 없잖아 있다.
물론 대부분은 늦잠을 잔 것이긴 하지만.
전쟁은 오분만에 종결되었다.
이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일만 남았다.
피해복구가 끝나면 한동안은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형님들이 오시는 시간 전까지.
학생들이 앉았던 자리를 치우고
카운터로 돌아오는데
낯익은 얼굴이 카운터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볼륨녀다.
“정액 한 자리 주세요.”
“네...어...하 한자리요?”
“네. 한 자리요.”
“아...네.”
만원짜리를 받고는
오천원짜리 한 장을 거슬러 준다.
육천원으로 올랐던 정액요금은
급감한 손님으로 인해
불과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오천원으로 돌아온지 오래다.
오천원짜리를 건네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볼륨녀와 대화를 나눈 적은 거의 없으므로
먼저 말을 걸기도 좀 뭐하다.
“저...다른 분들은...”
“오늘은 안 와요.”
“네...”
더 이상 물어본다는 것도
조금 어색한지라
그 상태로 대화를 중단했다.
역시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늘상 앉던 그 자리에
왼쪽으로 두 자리를 비워둔 채로
말없이 가서 앉는다.
그리고는 조용히 컴퓨터를 켠다.
아직 많은 얘기를 해본 적은 없지만
볼륨녀는 다른 두 여자와는
상당히 다른 성격인 듯하다.
언제 어떤 경우에도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자신이 해야 할 얘기만
그리고 필요한 얘기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나이가 있는 만큼의 관록일까.
열한시 쯤에 사장이 돌아왔다가
한 시간을 채 있지 않고 퇴근한 것을 빼고는
오늘도 역시 큰 사건 없이 무난하게 흘러간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어느덧 시간은 새벽 4시를 향한다.
그녀가 혼자 와서 정액을 끊은 뒤로
나는 몇 번이고 그녀와
또 그 옆의 빈자리들을 바라보았으나
그 모습 그대로 시간은 계속해서 흐른다.
볼륨녀는 한 번도 카트라이더에
접속하지 않는다.
마치 기억에서 그날 새벽이 지워진 듯
예전 그 모습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듣거나
싸이를 하거나
간간히 테트리스에 열중할 뿐이다.
그 후로 삼십 분이 더 지났으나
형님들은 오시지 않는다.
이런 날은 정말 편하기도 하지만
긴장이 풀려 졸음이 쏟아지기 일쑤다.
역시나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얼굴을 드니
볼륨녀는 그 자리에 없다.
졸았던 시간은 고작 십여분.
그 사이에 그녀는 또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일까.
여섯 시가 되어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형님들도,
또 그녀들도 없는 피씨방은 썰렁하다.
가게 안에는
여전히 밤새 리니지를 하고 있는
아저씨 한 사람이 있을 뿐.
여자화장실로 가서
청소도구를 챙겨 나오니
어느새 다시 돌아온 그녀가
자기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다.
사실 그대로 오지 않았더라도
별로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야간정액이었으니
따로 계산을 할 일도 없으며.
손님들이 나가고 나면
내가 그 자리를 치운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들은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고 간다.
특별히 치울 것이 없음에도.
그녀는 오늘도 짤막하게
“수고하세요.”란 인사를 할 것이므로
우선 카운터에 가서 앉는다.
이윽고
그녀는 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애들은...오늘 못 왔어요.”
“아...네.”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물어본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그녀의 인사말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저...무슨 일이라도...”
“......”
그녀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린다.
사실 내가 그것을 물어볼 이유도
마땅한 명분도 없다.
이건 단지 예의상,
그러니까 단골손님들에 대한 예의상
그녀에게 물어본 것 뿐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
“...아파요.”
“아...네?”
“애들...아파서요. 좀 많이 아파요.”
“......”
“...수고하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언제나와 같은 인사를 남기고는 돌아선다.
내가 미처
“안녕히 가세요.”란
예의상을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아니
건네지도 못하고 있을 때.
[출처] [펌] 안마시술소 여자들 16.많이 아파 |작성자 극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