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로 향하는 정반대방향으로
도보 20분거리에
자그마한 2년제 대학이 있다.
그리고 그 대학 캠퍼스 안에는
b남고와 b여고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중 b남고가 나의 모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설마 내가
b여고를 졸업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2년제라고는 해도 그다지 규모는 작지 않은 듯
같은 재단의 두 개 고등학교를 거느린 데다
전국 곳곳에 동일한 재단의 대학 및 고등학교가
산재해 있는 모양.
이 대학의 정문과 후문 쪽으로는
역시나 대학가답게 먹자골목이 발달해 있으며
그 유흥의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대학가의 원룸촌이 득실거린다.
경림이 들어간 아파트는
이 대학의 캠퍼스 바로 옆에 붙어 있으며
위치상 나의 모교와 마주보고 있다.
또한 내 모교 바로 옆의 b여고는
마찬가지로 경림의 모교이기도 하다.
경림의 아파트단지 입구에서
약 이백여 미터 떨어진
한 원룸건물 앞에 다다르자
채연이 걸음을 멈춘다.
“여기예요. 우리 사는 데.”
“네...”
건물은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꽤나 깔끔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여기에 이런 건물은 없었거든.
그게 한 사오년 전.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잘 들어가요.”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 잔 정도는 얻어먹어야 될 거 같은데요?”
라고 말할 정도의 뻔뻔함은
나한테는 없다.
따지고 보면
채연이 바래다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그렇기에 굳이 고마워할 이유도 없으며
게다가 그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네...잘 들어가세요. 다음에 뵐게요.”
또한
일전에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밤에 봐 요”
라고 말할 용기도 없다.
남자라는 종족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불리하다.
같은 말이라도
남자가 하면 변태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인사를 나눈 뒤에도 채연은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나야 뭐 워낙 바보라
그냥 서 있는 거라 쳐도.
“......”
“......”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자
채연이 피식-
하고 웃어보인다.
“풉, 가셔도 돼요.”
“아...네...머 먼저 갈게요.”
나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만약 나를 창조한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너는 이 강아지야,
나한테 짧은 다리와
작은 꼬추를 준 걸로도 모자라서
주둥아리까지 병 신으로 만들었냐고.
영화같은 데서 보면
이런 장면에서는
“채연씨 먼저 들어가세요.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재석씨 먼저 가세요. 가시는 거 보고 들어갈래요.”
“아니에요, 먼저 들어가요. 들어가시는 거 못보고 가면 영 불안해서요.”
“저도 재석씨 먼저 안 가시면 들어가기 싫어요.”
뭐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던데.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된 게
한방에 돌아서 버리다니.
지금껏 걸어왔던 방향을 향해
다시 조용히 몸을 돌려
몇 발자국을 옮긴다.
내가 돌아섰으니
그녀가 들어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은
칠팔십년대 애정영화 따위에서
너무도 흔하게 보아 왔던 것 같아
상상만으로도 닭살이 슬금슬금 돋는다.
“재석씨!”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통수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린다.
그녀는 원룸건물 앞에 서 있는 그대로다.
“다음에 또 언제 쉬어요? 같이 술이나 한 잔 하게요!”
“아...그 글쎄요...다음 주...정도에...”
사실
아까 전에 그녀가
‘언제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을 했을 때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한국사람이
‘밥 한번 먹자’, ‘술 한잔 하자’고 하는 말은
약속의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한 표현이 아니었던가.
채연이 같은 말을 재차 반복한 이제야
나는 그것이 그냥 해본 말이 아님을 얼핏 느끼고
당황스러워하는 중이다.
“이따 밤에 쉬는날 확실히 말해줘요. 우리도 맞춰서 쉬게.”
“아...네...그게 저...저도 확실히는...”
“밤에 봐 요 안녕.”
“네...”
채연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자기 할 말만 내뱉고는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내가 미처 대꾸할 틈도 없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젠 어쩔 수 없다.
또 한 번 사장녀석으로부터
휴가를 쟁취하는 수밖에.
집으로 돌아오니 시계는 이미 열한시.
여덟시에 퇴근했는데
도대체 세 시간은 어디로 날아간건지.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아침에 얼마 먹지도 않은 감자탕은
이미 소화된 지 오래.
어차피 아침은 안 먹는 주의라
배가 꺼졌다고는 해도
별로 밥이 땡기지 않으므로
샤워를 하고는 바로 침대에 누워
정신없이 잠에 빠져든다.
꽤나 피곤한 듯.
.
.
.
“아 글쎄, 가게 사정 뻔히 알면서 왜 그러냐.”
“다음 주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래요. 한번만 더 쉴게요.”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사장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완강하게 버티는 중이다.
애초에 한 달에 두 번의 휴일을 주기로 했으니
한달만에 간신히 첫 휴가를 보내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오늘
다시 휴일을 바라는 것이
결코 무리한 요구는 아니다.
사실 이 피씨방에
알바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손님이 넘쳐나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새벽타임에는
나만 붙박아 두려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짐작은 간다.
형님들이 두 려 운 거지?
그렇게 무서운 분들 아닌데.
사실
나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출근하자마자
쉬는 날을 달라고 한 것은
어쨌거나 내 실수임이 분명하다.
오늘도 지각한 주제에;
그렇다고는 해도
어쨌든 지금은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이제 곧
그녀들이 올 것이므로.
“한 달에 두 번 쉬는 거잖아요. 못쉬어서 몸이 힘드니까 자꾸 지각을 하죠.”
“핑계가 좋다 이놈아.”
사장은 얼렁뚱땅 넘어가며
서둘러 퇴근준비를 한다.
오늘도 십분을 늦었으며
출근한지도 십분 정도가 지났으니
아직 시간은 고작 열시 이십분.
이토록 퇴근을 서두르는 이유가
나의 휴가요구를 기피하기 위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강경책을 쓰는 수밖에.
“사장님.”
“왜?”
“저...이제 그만 두려 합니다.”
“......”
“......”
“...이...씨 발;”
과정이야 어찌됐건
나는 또 한 차례의 휴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간신히 회복한 사장과의 관계가
다시 틀어지긴 했지만.
오늘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에
하루 동안의 휴가를 허락해 주고는
사장은 말없이 퇴근해 버린다.
보아하니 또 삐졌구나.
사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계약이 된 조건을
이행하는 것뿐인데.
오늘은 마침 사장이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출근하기 전에 이미
경림은 퇴근해 버렸다.
그리고 사장 또한 지금 퇴근했으며.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가게 안에 손님이 상당히 많다.
아마도 금요일이라 그런듯.
오늘 하루도
상당히 피곤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게 뭐 대수겠는가.
휴가를 얻어냈는데.
잠시 가게 안을 둘러보는데
한 무리의 손님들이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채연 일행이 늘상 앉는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손님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오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그녀들이 앉는 자리는
이 시간쯤 되면 언제나
빈 자리가 되는 것일까.
카운터로 돌아가 계산을 하고
방금 나간 손님들이 앉았던
그녀들의 자리를 치우고 돌아오니
아니나다를까,
볼륨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이다.
곧이어 채연도 따라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이제는 조금은 더 가까워졌음을
직접 체감할 수가 있다.
처음에는 아예 대화라고는
시도조차도 못하던 것이
이제는 최소한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인사 정도는 주고받고 있으니.
“두 자리요.”
“네.”
이제는 굳이 ‘정액’이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다.
언제나 그녀들이 요구하는 것은
야간정액 세 자리...
......
어 어라?
오늘은 두 자리?
“아...두 자리요?”
“네. 수정이 오늘 안 와요.”
오늘도...인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세 여자가 함께 피씨방에 오더니
그 일이 있은 후,
화장실에서 눈물섞인 목소리를 들은 후부터
수정만 삼일째 보이지를 않는다.
이제는 어렴풋이 감이 오기 시작한다.
채연이 말한 것처럼
단순한 술병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분명...
...조카 심한 술병일 것이다.
뭐
내 입장에서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는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건 그렇고
채연과의 약속으로 인해
간신히 사장으로부터 휴가를 얻었다.
그것을 알려주어야겠다.
“저 다음주에 쉬기로 했어요. 아침에 말한대로 그때 술이나 같이 하죠.”
라고
나는 허공에 대고
혼자 지껄이고 있다.
두 여자는 이미
자신들의 자리로 가서
의자를 빼는 중이다.
어째서,
언제 쉬냐고 안 물어보지?
내가 무리해서 휴가를 얻어낸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역시나 아침에 했던 말은
그저 예의상의 말이었을 뿐이며,
그걸 또 좋다고 휴가까지 억지로 받아낸 것은
나의 오버였을 뿐인가.
그녀들은 이제 막 들어왔을 뿐이니
여기서 나갈 때까지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설마 자기가 먼저 꺼낸 얘긴데
이제 와서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다.
사장은 이미 삐졌다.
그 쫀쫀한 성격으로 봤을 때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못해도 일주일 이상은 걸릴 터.
채연이 끝끝내 그 얘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나의 쉬는 날을 그녀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간신히 얻어낸 휴가를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나
생각은 생각일 뿐.
시간은 아무 대책없이 흐른다.
그녀들은 언제나처럼
몇 시간이 지나도록 내쪽으로 돌아보지도 않는다.
쪽지를 보내지도 않는다.
카트라이더에 접속하지도...
그래도
아직 여유는 있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나갈 때에는
어차피 마주칠 것이므로.
새벽 네 시가 가까워지고
가게 안은 한산해졌다.
이제 곧
형님들이 오실 것이라는 것을
손님들도 아는 듯하다.
“띵동.”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고
형님들이 오셨나 했더니
이게 웬걸,
출입문 바깥쪽이 시끄럽지 않은 걸로 보아
형님들이 아닌듯.
조용히 문이 열리고
얼굴이 시뻘개진
취객 한 마리가 들어선다.
어디서 물약이라도 한 사발 빨고 온듯.
“어서 오세요.”
유흥가에 위치한 피씨방이라
술취한 손님들을 받는 것은
일상다반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취객은 골치아픈 존재다.
찌질이도 술을 마셨을 때에는
형님들과 같은 포스를 풍기기 때문에.
“......”
“아...카드 가지고...아무 자리나 앉으시면 되는데...”
대부분의 취객들은
떼거지로 몰 려 오 는 경우가 많고
방금 들어온 이 손님처럼
혼자 피씨방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방금 들어온 이 손님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카운터 앞에 선 채로
시뻘건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상당히 낯이 익은 얼굴.
어디서 봤더라?
아,
그때 그 남자네.
[출처] [펌]안마 시술소 여자들19. 그때 그남자|작성자 극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