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내게 미안해야 할
건덕지가 없다.
앞으로 이 피씨방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 사과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사과를 들어야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아쉽고 서운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손님들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최종적으로 두 여자가 일어난다.
언제나와 같이 자리를 정리하고는
이내 이쪽으로 걸어나온다.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
볼륨녀의 형식적인 인사에
언제나같은 인사로 맞대응을 하다
채연이 이쪽을 보고 서 있는 모습에
말을 중단한다.
“......”
“......”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을 뿐.
볼륨녀는 이미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약 발랐어요?”
“...네.”
“어디 한 번 봐??”
“네? 아 아까 진짜 발랐어요;”
“그니깐 한 번 보자구요.”
“아...진짜 발랐는데...”
진짜로 발랐다.
처음 그녀들이 들어와서
내 얼굴을 비웃고 간 후에
바로 발라두었다.
그러나 그걸 굳이 확인시켜주면
내 흉측한 입술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고
그녀는 또 한 번 비웃을 텐데.
어쩌면 그걸 노리고?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이 여자의 고집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절대로 순순히 물러날 여자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마스크에 손을 가져 간다.
“쿡...”
“......”
내 * 그럴 줄 알았어;
그냥 웃긴 게 보고 싶은 것뿐이잖아.
“이따 집에 가서 또 발라요.”
“네.”
그리고는 카운터에서 몸을 돌리다
다시 한번 멈추고는 이쪽을 쳐다보며 말한다.
“수정이는 이제 안 와요.”
“아...네.”
“어?”
“네?”
“별로 안 놀라네. 놀랄 줄 알았는데.”
“아뇨...뭐...”
이미 수정에게 들은 얘기.
채연의 입에서 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해서
굳이 놀랄 필요는 없다.
이미 그다지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별로 안 섭섭한가 ??”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수정이한테 일러야지.”
“서 섭섭한데...”
“이미 늦었어요.”
“아...”
나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별로 큰일은 아닌가 보다.
그걸 가지고 나에게
장난을 치는 걸로 봐선.
“무 무슨...일이라도...”
“됐어요.”
“네?”
“이제 와서 관심가지는 척 해봤자 소용없어요.”
“아니...”
진심이었는데.
무슨 일로 수정이 안 온다는 것인지
정말 궁금해서 그런 건데
그녀는 여전히 장난스런 말투로 받아칠 뿐.
“이제 안 올 거예요. 다시는요.”
“네...”
“절대로 다시는 안 와요. 죽을 때까지.”
“아...네...”
“모든 게 끝장이에요. 이제 다 끝난 거죠.”
“네...아 알았어요;”
이 여자 왜 이래;
고집스럽고 집요한 성격이란 건 알고 있다만
굳이 그 사실을 반복해서
나에게 환기시켜줄 필요는 없는데;
“약 발라요.”
“네.”
말을 마치고는
문을 열고 나간다.
그녀와 완전히 친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장난의 빈도는 훨씬 늘었다.
청소를 끝내고
카운터에 멍하니 앉아 있다.
이제 곧 교대자가 올 것이고,
언제나처럼 퇴근을 하겠지.
고작 두 달이 채 못되게 일을 한 것뿐인데
왜 이토록 지쳐가기 시작하는지.
알바를 그만둔다고 해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일이 힘든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흔들리게 만들고 있는 걸까.
화장실청소를 마치고 퇴근을 한다.
날씨는 쌀쌀함을 넘어선지 오래.
이제는 긴팔 티셔츠만으로도 안되겠다.
오늘 밤부터는 얇은 외투를 하나 더 걸칠 생각.
가을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
.
.
채연이 준 연고가
효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
잠을 자고 일어난 한나절 사이에
입술은 많이 차분해진 상태이다.
여전히 건들면 아프긴 하지만.
그럭저럭 밥도 먹을 수 있는 걸로 봐선
입 안도 많이 양호해진 상태.
입 안에다 연고를 처바르진 않았으니
이건 순수한 내 생명력.
그러고 보면
굳이 연고를 바르지 않았더라도
입술이 많이 괜찮아졌을라나.
밥을 먹고 씻은 다음
나갈 채비를 한다.
아직 시간은 한 시간 이상이 남아 있다.
티비를 켜고는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지만
볼 만한 프로는 없다.
스무 살 이후로는
티비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
단순히 시간을 때울 용도가 아니면
굳이 티비를 보지는 않는다.
불현듯
수정과 나란히 티비 앞에 앉아 있던
새벽의 일이 떠오른다.
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이제 오지 않는다는 그 말이었던가.
정말일까.
정말 오지 않을 건가.
시간을 대충 흘려보낸 다음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붓기가 많이 가라앉긴 했지만
마스크를 챙기는 것도 있지 않는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남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내기는 민망한 상태.
느긋하게 걸어 가게에 도착하니
시간은 열시 오분전.
늦지는 않았으되
그렇게 일찍 온 것도 아니다.
카운터에는 웬일로 사장이 앉아 있다.
“저 왔습니다.”
“......”
사장은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
얼굴을 돌려버린다.
아직도 삐져 있구나.
쫀쫀한 녀석같으니.
“오빠 왔네?”
“응.”
이제 막 학생들을 내보낸 듯.
자리를 정리하고 오던 경림이
인사를 한다.
경림이 돌아오자 사장은 자리를 피해 준다.
카운터에 의자는 두 개밖에 없으므로
인수인계를 하기 위해서는
한 명은 사라져야 한다.
오늘도 계산에는 틀림이 없다.
역시나 경림은 야무지다.
겨우 두 달도 안 되어
수 차례 빵꾸를 낸 나와는 달리
그녀는 한 번도 빗나가지 않는다.
“오빠 이번 주에 쉰다며?”
“응.”
“왜? 그때 뭐하는데?”
“그냥...”
그녀들과 술을 마시기로 했다는 것을
굳이 경림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녀들과도, 또 경림과도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므로
괜한 오해를 살 이유가 없다.
경림이 채연을 썩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사장님이랑 싸우면서까지 쉬는 거잖아.”
“그냥 쉬고 싶어서 그래. 이유같은 거 없어.”
“......”
역시나
경림의 예리함은 녹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이 참 부럽다.
나는 왜 그런 걸 잘 못하지?
“그래서? 그날 뭐할 거야?”
“조카 꼭지 돌때까지 술 퍼마실 거야.”
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니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사장한테 꼰지르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술이 마시고 싶어서 쉬었다는 사실을 알면
저 소심한 사장은 얼마나 오랫동안 앙탈을 부릴지.
“그냥 뭐...집에서 쉴거야. 요즘 좀 피곤한거 같아서.”
“흐음...”
경림은 여전히
의심스런 눈초리를 풀지 않는다.
그녀가 예리한 것도 있지만
내가 거짓말에 서툰 탓도 있을 듯.
“오늘 또 마스크 쓰고 왔네? 진짜 감기야?”
“감기 아냐.”
“그럼 왜 맨날 쓰고 다녀? 갑갑하지도 않아?”
“갑갑해.”
“......”
“......”
니 친구가 때려서 그래 이년아.
아씨 열받는데 그냥 확 다 불어버려?
아니지,
그럼 내가 그 찌질이보다
싸움을 못하는게 되니까...
“한 번 벗어봐.”
“뭐?”
“마스크 잠깐만 벗어 보라고.”
“싫어.”
“왜?”
“이거 내꺼야. 안 벗어.”
“니껀줄 아니까 잠깐만 벗어보라고.”
“아, 싫다니까.”
도대체 어제부터
벌써 몇 번째 듣는 ‘벗어봐’ 소리야.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라고.
“집에나 가 똥개야.”
“......”
말이 조금 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피차 스스럼없이 막말을 주고받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먼저 시비를 걸긴 처음.
역시나...
손바닥이 날아오는군;
“뭐야? 입술 터졌어?”
“......”
경림은 이미 내 입에서
마스크를 벗겨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걸 알고는 있었지만
왜 굳이 나는 반항했던 것일까.
진작 벗었으면 한 대라도 덜 맞았을 것을.
“진짜 많이 피곤한가보네. 입술이 다 터지고.”
“조카 피곤해. 조카 푹 쉬어야겠어.”
카운터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사장에게
일부러 들리라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많이 회복이 된 탓에
누군가에게 맞은 상처로 보이지는 않는 듯.
“그래. 푹 쉬고...흠...”
“푹 쉰다니까.”
“그날 밤에 같이 술 한 잔 할래?”
“......”
너도 술이냐;
안돼.
그날은 선약이 있거든.
“됐어 안 마셔.”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하고 들어가서 쉬면 되잖아.”
“싫어. 귀찮아.”
“아, 내가 산다고. 한 잔만 하자고.”
“안 해.”
“이런 개...”
“......”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욕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
표정을 보아하니 상당히 흥분한 상태다.
퇴근할 때까지 입닥치고 있어야겠군.
“사장님! 저 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사장에게만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퇴근해 버린다.
굉장히 화가 난 모양.
내가 생각해도
짜증나게 말한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어쩌라고.
술을 마시든 말든 내 맘이잖아.
아,
물론 술은 마실 거야.
너 말고 다른 애들이랑 큭큭.
혼자 킥킥대다 사장과 눈이 마주친다.
마주치기 무섭게 사장은 다시 얼굴을 돌린다.
조카 삐진 척 하기는.
가게나 한 번 둘러볼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문이 열린다.
언제나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들어서는
볼륨녀와
채연과
......
......
수정이 오늘 왜 왔냐;
이제 안 올거라며...
[출처] [펌]안마시술소 여자들 24.이제안와 |작성자 극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