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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눈까리깔어 |2012.11.23 18:00
조회 246 |추천 0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야훼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1~3)

 

하나님 아니죠?

 

야훼죠~

 

비겁하게 남의 이름이나 도용하면서 신행세를 하려고 하는 이유를 꼭 알아야 겠습니다.

 

 

신학적 입장(펌)

 

1. ‘야훼’ 이름의 유래에 대한 종교 언어학적 연구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름 ‘야훼’의 유래에 관한 연구는 고고학 특히 고대 근동 언어와의 비교를 통해 가장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야훼신앙의 유래를 ‘선조들의 하느님’ 혹은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의 사제였던 이드로가 섬기던 ‘켄족의 신’에게서 찾기도 하지만, 특히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우가릿어, 아카드어, 아람어들로부터 hwy, ya(w)um, yahu, ym, yw, -ya 등 비슷한 자음 혹은 소리들을 찾아 야훼yhwh라는 이름의 원형으로 계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밖에도 ya-huwa나 ya-hu(야-! 그분이시다) 등 고대 제의(祭儀)에서 하느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탄성이 이름으로 발전하였다고 하는 주장들도 있다.

중요한 점은 야훼라는 이름이 매우 오래 전부터 쓰였다는 점에서만 학계의 의견이 거의 일치할 뿐 야훼 이름의 원형으로 다수가 긍정할만한 것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성문자의 유래에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이 이름의 뜻을 어떻게 알아들었냐는 문제일 것이다.

 

2. ‘야훼’ 이름의 어원론(탈출 3,14)에 대한 문법적 연구

 

탈출 3,14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에흐예’(’hyh)와 ‘야훼’(yhwh)는 각각 hāyah동사 1인칭 단수와 3인칭 단수 위에 세워진 같은 이름으로 간주된다. 어근hwh는 hyh의 고대형(古代型)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탈출 3,14에 쓰인 ‘에흐예 아쉘 에흐예’(’ehyeh 'ašer ’ehyeh)가 내포한 hāyah동사의 형태, 시제, 내용 및 문장의 형식에 대해 관찰하고 이들을 통해 이름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제까지 쟁점이 된 것들을 간략히 종합해 보고자 한다.

 

1) hāyah(היה)동사의 형태: 사역형(hiphil)인가 단순형(qal)인가?

 

① hāyah 동사를 사역형(hiphil)으로 보는 경우

히브리 동사 hāyah의 단순형(qal)은 그 우선적 의미가 ‘있다, 생기다’(to be/exist, to become)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역형이 되면 ‘있게 하다, 생기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Haupt는 3,14ㄱ에 미미한 본문 파손이 있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마소라 학자들도 이 글자들에 정확한 모음을 붙이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 hāyah동사를 사역형으로, 그리고 두 번째 ’ehyeh를 3인칭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 즉 ’ehyeh ašer yihyeh로 본문을 고침으로써 “나는 생겨나는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한다”(I cause to be what comes into existence)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Albright는 근동언어에 관한 지식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동원해 Haupt의 주장을 지지하고 강화하였으며, Freedman은 이들의 이론 위에서 자신의 학설을 전개시켜 나갔다. 또 한편 Cross는 우가릿의 ‘엘’신에 대한 제의적 칭호에 나타나는 ‘엘-야휘’(’el yahwi = El who creates)가 발전하여 ‘엘’이라는 신명(神名) 대신 야훼라는 이름으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하며 3,14ㄱ의 원래 형식이 yahweh ’ašer yihweh(he causes to be what comes into being)였으리라고 한다. 즉, 그는 본문 안에 있는 두 개의 1인칭을 모두 3인칭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위의 가설들은, hāyah 동사의 사역형이 성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과 본문비평상 합당한 근거 없이 성서본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② hāyah동사를 단순형(qal)으로 보는 경우

 

대부분 학자들이 이 동사의 형태를 단순형(qal)으로 보며, 이 경우에는 동사의 시제와 성격에 관한 것이 주 관심사가 된다.

단순형 현재시제로 보는 경우: 이 경우 ’ehyeh ’ašer ’ehyeh는 흔히 “나는 곧 나다”(공동번역) 혹은 “나는 있는 나다”(구약성서 새번역)(영어로는 주로 I am who/that I am; I am who is)로 번역된다. 드 보(de Vaux)는 칠십인역(LXX)이 3,14ㄱ을 -εγώ είμι ό ὤν으로 번역한 데 기반을 두고 hāyah동사의 뜻을 ‘있다’(to be)로 간주하며 이 구절을 존재에 대한 단언이라고 한다. 만일 이 동사를 미래로 알아들을 경우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의 형식으로 명사든 형용사든 반드시 한정어를 가져야만 하는데 3,14는 그렇지 않으므로 ‘내가 있다’라고 현재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미래로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에 그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라는 반어법적 설명을 하기도 한다. Durham도 현재시제로 보지만 hāyah동사 안에 존재와 활동의 성격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하며 3,14ㄱ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being that I am being 혹은 I am the Is-ing one)로 번역하고 그 뜻을 “나는 항상 존재하는 자다”로 풀이한다. “활동하는 존재의 실재는 오직 현재형으로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단순형(qal) 미래시제로 보는 경우: 3,14에 나오는 ’ehyeh를 특히 3,12; 4,12.15에 나오는 “내가…와 함께 있으리라”(’ehyeh ‘im)와 연결시켜 미래형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더욱 지배적이다. 즉, 3,14를 “나는 미래에 현존할 것이다. 그러한 내가 될 것이다”와 같은 약속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하느님의 존재하심이란 곧 활동적 차원을 전제한다고 보면서 hāyah동사가 지닌 활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2) 어원론의 문장구조: 왜 이렇게 독특한가?

’ehyeh ’ašer ’ehyeh라는 문장은 성서에서 유일회적으로 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관계대명사 ’ašer의 선행사가 (be-)동사(형 이름)인데다가 주절을 해설하는 종속절이 주절의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런 문장구조 안에서 하느님 대답의 의도는 물론 그분의 속성을 알아내고자 하였다.

Freedmann은 3,14의 문장구조가 더 이상 잘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같은 말을 사용해서 설명하는 idem per idem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3,14는 탈출 34,6(“나는 야훼다, 야훼다”)처럼 원래 시문(詩文)이었는데 후대에 관계대명사 ’ašer을 집어넣어 산문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ehyeh의 hāyah동사를 사역형으로 간주하는 그는 따라서 3,14를 “나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창조한다”(I create what I create)로 번역한다. 즉 그분이 창조주 이심을 이런 식으로 강조하여 설명한다는 것이다. 김이곤은 idem per idem 형식을 받아들이며 ‘에흐예’를 사역형 미래시제로 해석하여 3,14ㄱ을 “나는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구원을) 존재하도록 할 것이다.”로 번역하고 3,14와 병행 내지 보완될 만한 성서구절을 고난신학의 맥락 안에서 관찰하면서 ‘야훼’라는 신명을 고유명사적 이름으로서보다는 ‘창조자’(One who causes to be, creator: 긍휼을 베푸는 ‘라훔’의 신. 탈출 33,19 참조)와 ‘붙드는 분’(sustainer: 고난받는 자를 붙들어 세우는 ‘샤따이’의 신. 탈출 6,2-3 참조)의 이미지가 조화되고 종합된, 신의 본질과 기능을 밝히는 표현으로 이해한다. 동사형 선행사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3,14의 원래 형식을 ‘ani-hu ašer ’ehyeh로 추정하는 Albrektson에게 반대하여 McCarthy는 3,14가 야훼yhwh라는 이름과 hyh와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의도적으로 hāyah동사를 두 번씩 사용하였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성서저자는 문법적으로 정상적인 형태를 버리고 동사를 반복함으로써 그 비정상적인 형태와 반복이 주는 놀라움으로 본문의 요점을 선명하게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Childs도 3,14를 하느님의 이름을 hyh와 연결시켜 하는 말놀이(paronomasia)로 본다. 즉, 이름과 의미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보는 것이다. 3,14는 대답인 동시에 대답의 거절을 담은 ‘파라독스’다. 하느님께서는 한편으로 모세에게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며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계획에 따라 미래에 당신 자신을 점차 더 드러내시리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Noth는 이런 종류의 반복법은 보다 더 자세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할 때 혹은 확실하게 파악된 무엇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을 때 쓰는 용법으로서 ‘불확정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것은 순수 의미에서의 불확정성이 아니며, 3,14ㄱ은 “나는 무엇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는 앞으로 더 밝혀지게 될 것이다” 또는 “내가 되고자 의도하는 그대로가 나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3,12; 4,12.15의 약속과 더불어 이 말은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행동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현재시제 안에서 미래적 전망을 보고 있다. Abba 역시 hāyah동사가 지닌 역동성에 관심을 모으며 3,14의 반복적 구문이 약속을 강조해 확인하기 위하여 쓰였다고 본다. 3,14는 “내가 참으로 있겠노라”(I will indeed be present)는 뜻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특별한 개인적 관계,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계약관계를 표현하는 이름이다. 이 거룩한 계약의 이름 안에는 따라서 미완료형의 특성인 계속성이 내포되어 있고, 새로운 역사의 장(場)마다에서 야훼의 본질과 목적은 새롭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3,14가 이름이라기보다는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동사형의 이름이 가능한 것일까? 학자들은 종종 호세 1,9에 대해 언급한다. 성서 안에서 탈출 3,14와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계약 양식과 이름이 합쳐진 구절인데, 그릇된 길을 간 이스라엘 백성을 빗대어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의 아들 이름을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 짓게 하시고, 이어서 당신을 ‘로-에흐예’(라켐)’, 즉 ‘(너희를 위해) 있지 않는 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로-에흐예’를 ‘로-암미’와 병행하는 이름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 3,14의 ‘에흐예’도 이름일 수 있고, 호세 1,9는 탈출 3,14의 내용을 부정하는 개념으로 쓰였다 할 수 있다.

 

정리: 탈출 3,14가 원래 시 형식이었다는 Freedman의 주장은 증명하기가 힘들다. 3,14의 구조는 idem per idem 형식을 이용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Childs나 McCathy가 말하는 대로, 히브리 어원론에서 자주 쓰는 말놀이 형식에 훨씬 더 가깝다. 이는 야곱(y’qb), 요셉(ysyp), 이스라엘(yśr’-el)이 각각 ‘qb, syp, śr’ 어근에 ‘요드’(y)를 앞에 붙여 만든 이름인 것처럼 hyh어근 앞에 ‘알레프’ 혹은 ‘요드’를 붙여 만든 이름(즉, ’+hyh=’hyh 혹은 y+hyh/hwh

=yhyh/yhwh)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미 호세 1,9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가능성을 보았지만, 3,14ㄴ에서는 ’hyh를 확실히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도 관계대명사 앞에 가장 자연스럽게 오는 것은 명사나 대명사이므로 본문의 형식으로 볼 때 ’ehyeh ’ašer ’ehyeh의 첫 번째 ’ehyeh를 고유명사로 생각하는 것이 우선적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성문자에서 볼 수 있는 모음은 훨씬 후대에 마소라 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것이기에, yahweh나 ’ehyeh의 원래 발음이 어떠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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