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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그것은 트라우마

안녕하세요.

 

우연히 지나가다 판춘문예에 글을 쓰게 됐네요.

사실 판춘문예에서 입상하는 것보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일들을 익명성에 기대어 적으며 스스로를 힐링하고 싶어서 쓰려고 해요. 그럼 이제 시작합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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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 재수학원이 막 개원한 곳이라 부족한 부분도 있었지만, 강의나 서비스 면에선 열의가 넘치는 학원이었다.

 

총 6개의 반이 있었는데 1월달부터 재수한 학생들이 1~5반까지 있었다.

3월에 등록한 학생들은 6반에서 잠시 있다가 3월 중순에 배치고사를 봐서 반을 다시 배정하기로 해서 6반은 사람이 꽤 많았다.

 

재수생들의 3월달은 참 특별하다.

대입에 있어서 이미 한 번 이상의 고배를 마신 적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재수학원에서 절대로 친구를 만들지 않겠다는 특이한 목표를 갖고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목표는 보통 길어야 이 주면 다 깨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는가.

어쩔 수 없다. 당연스레 주위 사람과 친해지게 되고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그건 우리반도 마찬가지였다.

 

첫 주엔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다가 어느새 밥을 같이 먹는 친구,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같이가는 친구 또 여자들은 화장실을 같이 가는 친구 등 친구들이 점점 생기게 된다.

 

나도 그렇게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중 특별히 가까운 친구가 3명이 생겼다.

 

몽이, 낙타, 별이라고 불렀다.

 

몽이는 별명에서 느껴지듯 원숭이를 닮았다. 조금은 살찐 원숭이.

낙타는 눈이 약간 작지만 미남형이었다.

별이는 볼수록 매력있는 그런 친구였고 우리들의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마침 우리 네 명은 학원 내에 있는 독서실 자리도 다 붙어있어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공부하다가 괜시리 옆자리에 장난도 걸고 쉬는 시간에 매점도 우르르 가서 사먹고 오며 즐겁게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배치고사를 보게 됐다.

나는 언어를 잘해서 언어 선생님의 반으로 몽이는 외국어를 잘해서 외국어 선생님의 반으로 가게 됐고 낙타와 별이는 6반에 그대로 머물게 됐다.

 

반이 바뀌면서 독서실 자리도 바뀌게 돼 낙타와 별이, 몽이와도 멀리 떨어지게 됐지만 쉬는 시간마다 만나서 예전처럼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흘러 6월이 됐다.

 

3,6,9 모의고사가 매우 중요해서 다들 열심히 공부하다가 6월 모평이 끝난 후 약간은 긴장이 느슨해졌을 때 한 신입생이 6반에 들어왔다.

 

여 학생이었는데 첫 날부터 임팩트가 엄청났다.

 

6반 외의 다른 반 학생들도 그 여학생의 얼굴을 한 번 보겠다고 6반 앞을 서성거리기도 했고 쉬는 시간에 한 번 말을 걸어볼까 하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별이와 낙타, 몽이와 6반에서 놀다가 쉬는 시간이 끝나면 각 자의 반으로 흩어지는 일상을 보냈기에 나도 당연히 그 여학생을 자주보게 됐다. 정말 예쁜 얼굴이었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예쁘네'하고 말며 6반에서 놀다가 다시 내 반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6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자 갑자기 뭔가가 내 옷에 튀었다.

 

옷에 무언가가 튀는걸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나도 갑작스레 내 옷에 튄 이물질을 보며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 이물질은 케잌에서 튄 생크림이었다.

6반의 한 학생이 생일이었는데 그 학생의 케잌을 자르다가 내 옷에 튄 것이었다.

그 케잌을 자른 학생은 예쁘다고 소문난 그 여학생이었다.

 

잠깜 표정을 찡그린 그 순간 그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일어서있고 그 여학생은 앉아있던 상태이기에 날 올려다보며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여학생을 보니 감정이 묘했다. 슈렉에서 나오는 장화신은 고양이가 불쌍한 표정을 지을 때의 그 모습과 비슷했다.

 

자기가 닦아주겠다며 휴지로 닦으려고 하는 그 때 내 옷이니 내가 알아서 한다고 정색하며 지나쳐버렸다.

 

그 때 너무나 당황해서 정색해버렸다.

정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숨을 쉬고 있는건지 지금 내가 눈을 뜨고 있는건지 감고 있는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가슴이 답답한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멍하니 별이와 낙타, 몽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에 하루종일 사로잡혀 있었다. 밥 먹다가도 갑자기 그 모습이 떠올랐고 강의 도중에도, 자습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떠올랐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자꾸만 떠올라서 그 날 하루종일 집중이 안되었다.

 

하지만 이주일 정도 지나자 자연스레 잊혀졌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던 때에 또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낙타가 토요일 저녁에 고민이 있다고 들어달라고 해서 선릉역에서 잠깐 만났다.

낙타는 별이를 참 좋아했다. 역시나 고민도 별이를 좋아하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는 것이었다.

재수가 끝난 후 고백하는게 현명할 것이라고 조언하는 그 순간에 낙타가 갑자기 누군가를 가르켰다.

 

내 뒤쪽을 손으로 가르키기에 뒤돌아보니 그 여학생이 머리를 매만지며 걸어가고 있었다.

 

웃기게도 나는 아무 이유없이 그 여자애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여자애와 사이가 오히려 나쁜쪽에 속했다. 케잌이 튄 그 날 나는 당황해서 얼른 자리를 떠나려던 그 순간이 그 여학생에겐 정색으로 비춰진 까닭이었다. 그런 사이인데 나도 모르게 그냥 뛰어가서 그 여자애 앞에 섰다.

 

그 여학생(을 토끼라 부르겠습니다.)이 날보며 약간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뭔가 말할 것이 있어서 뛴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약간은 어색한 상황에 토끼가 먼저 인사를 했다. 나도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토끼는 오늘 머리를 하고 왔는데 어떤 거 같냐고 물어봤다. 사실 머리를 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쁘다고 했다. 그러자 환하게 웃으며 다행이라고 자기가 볼 땐 별로 인 거 같아서 속상했다는 이야길 들으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게 됐고 그 사이 낙타가 와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아마 이 때부터 좋아하게 된 거 같다.

 

어떤 면이 좋은거냐고 물으면 지금도 뭐라 명확하게 대답할 수 없지만 확실한건 나는 분명히 그 때부터 토끼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학원에서 다시 토끼를 보게 됐을 때 인사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어쩌면 선릉역에서 대화했던 그 순간은 토끼에게 있어서 별 거 아닐 수 있으니까.

이런 고민을 하는 때 토끼가 먼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주었고 이런 사소한 것을 통해 점점 친해지게 됐다.

 

토끼는 낙타와 별이와 같은 반이라 자연스레 친했고 몽이는 몽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친해졌다.

그렇게 우리 5명은 항상 같이 다니게 됐다.

 

토요일은 12시까지 수업하고 1시부터 9시까지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이라 토요일에 가끔 놀러나갔다.

마침 근처에 대학이 있었는데 저녁마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도 많았고 재수학원생들이 축구하러 자주 가는 곳이었다. 맨날 앉아서 공부하다가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걷는게 소소한 낙이었던 우리들에게 그 대학은 참 좋은 장소였다.

 

어느 주말. 그 날도 우리들은 그 대학의 운동장을 걸으며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낙타가 한가지 제안을 했다. 낙타와 별이가 한 팀, 나와 토끼가 한 팀이 돼 누가 더 빠르게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별이와 토끼는 뛰는 거 힘들다고 빠지는 대신 응원을 하기로 했다. 응원의 방법은 이긴 쪽의 남자의 내기를 여자가 들어주는 것.

 

예를들어 낙타가 이기면 별이가 낙타의 소원 들어주기, 내가 이기면 토끼가 내 소원 들어주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여자들은 이기나 마나 한 내기였는데 내기에 참여했다.

 

정말 죽도록 뛴 거 같았다.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고 뛰었는데 양말 양 쪽에 다 구멍이 났다.

전력질주하다보니 그 트랙에서 한가하게 걷던 주민들이 '어머머머'하면서 길을 다 터주었다.

그렇게 모세의 기적을 체험하며 운동장을 뛰었고 결과는 낙타는 1분 17초가 걸렸고 나는 59초 걸렸다.

 

그렇게 이기고 나서 잔디밭에 드러누워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토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러다 숨이 멈출 것 같다는 두려움마저 드는 때에 토끼가 내 옆에 와서 누웠다. 그 때 엄청난 행복감이 밀려오며 웃음이 피어올랐다. 숨쉬기도 힘든 와중에 웃기까지 하다보니 숨쉬기가 더 힘들었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10분정도 지난 후에 음료수를 마시며 토끼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이미 소원을 이룬 거 같다고 하자 다들 '에이 뭐야 재미없게'하는 반응을 보였고 각 자 집으로 헤어졌다.

 

 

 

 

학원에서 자습을 하다 졸려서 복도로 나왔는데 토끼도 졸려서 그런지 복도로 나와 계단에 앉아 영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뭐하냐고 묻자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서 스트레칭도 할겸 나와있다는 말을 하며 나보고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했다. 나도 어차피 졸려서 나온거라 잠도 깰겸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토끼보다 한 칸위 계단에 앉아서 어깨를 주물러주다보니 샴푸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졌다.

의도치 않게 보이는 목선이 아름답게 보였고 모든 것이 황홀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없이 말했다.

 

"토끼야. 난 너가 참 좋다. 널 좋아한다."

 

토끼는 대답을 하는 대신 등을 더 가까이 내게 완전히 기대며 내게 누웠고 나는 꼭 안아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우린 참 재밌게 시간을 보냈다.

 

토끼와 낙타, 몽이도 모르게 둘이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고 같이 마트에 나가서 장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집 앞까지 바래다 주기도 했고 여느 커플들처럼 행복하게 지냈다.

 

그리고 추석이 다가왔다.

 

마침 추석 연휴에 내 생일이 끼어있었다.

 

명절을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내 생일을 아무에게도 말 안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에게도 말 안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 날.

 

평소와 같이 학원을 가는데 저 멀리 토끼가 보였다.

정말 먼 거리였고 눈이 좋은편도 아니지만 매우 멀리 있어서 점처럼 보이는 토끼를 보며 짤막한 문자를 보냈다.

 

"멈춰"

 

잠시 후 토끼가 핸드폰을 꺼내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학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더 당황해서 뛰어갔고 학원 정문 앞에서 만나게 됐다. 그러자 토끼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뒤로 도망갔고 나는 왜 그러는지 몰라서 갸우뚱하던 때에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시곤 빨리 들어오라며 나를 끌고 들어가셨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쉬는시간, 점심시간에도 6반에 가봤지만 친구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버버하며 사라지기 일수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도 들고 조금 화났다.

저녁시간에 그 이유라도 알아보려고 반에 들어가니 불이 모두 꺼져있었고 블라인드도 모두 내려가 있었다. 그래서 불을 키려고 스위치를 누르려고 했는데 스위치가 테이프로 고정되서 눌러지지도 않았다. 테이프를 떼려던 그 때 촛불이 켜졌다. 하나 하나 불이 붙여지며 초를 든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놀라움과 감동보단 안도감이 컸다.

'이 이벤트를 하기 위해서 하루종일 나를 따돌렸구나...'

 

토끼가 생일 축하 노래를 선창하자 다같이 따라 부르며 축하해줬다.

그렇게 즐겁게 케잌 하나를 나눠먹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추석은 천둥번개가 엄청났다.

토끼가 걱정돼 전화하니 어머니만 혼자 고향에 가시고 집에 혼자 있기 무서워서 애완견과 함께 이불속에 들어가서 안나오고 있다는 말에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문자가 와 있었다.

 

토끼 : "자기야~ 우리집에 나 혼자인데 너무 무서워~ 우리집에 오면 안돼?"

 

나 : "오늘 왔는데 오늘 또 서울로 올라가기가 좀 그렇네. 잠깐 상황을 보고 갈게"

 

토끼 : "오늘부터 집에 나 혼자 쭉 있어."

 

나 : "어머니가 안계신다면 오히려 내가 가면 안되지 않아??"

 

토끼 : "어머니가 안계시니까 오라는거지~"

 

나 : "나도 남자인데ㅋㅋ 내가 널 덮치면 어쩌려구"

 

토끼 : "나 잠 안재우려고~?"

 

이런 문자를 주고 받으며 짐을 챙겼다.

 

그러다가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곤 문자로 정말 미안하다고, 집안에 일이 생겨서 못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나도 남자이기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것을 상상만해도 당연히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를 생각해보니 조심스러웠다.

 

'재수가 끝난 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나는 분명 재수가 끝난 후라도 토끼를 좋아할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토끼는 토끼대로의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나의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재수 후에 우리가 헤어진다면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굉장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왔다.

그래서 순결에 대해 굉장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만약 내가 토끼와 헤어진다면 상처준다는 생각도 이것 때문이었다.

만약 우리가 육체적 사랑을 나눌 것이라면 그건 재수 후에 결정해야 할 일 같았다.

그리고 이 때의 결정을 지금와서 가끔씩 생각해보면 후회는 없다.

 

 

 

그리고 연휴가 끝난 다음 날 평소에 토끼가 갖고 싶어하던 이어폰을 사고 편지도 쓰고 하느냐 학원에 늦게 가게 됐다. 하지만 학원에서 토끼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수업 들을 때도 있었는데 저녁 시간 이후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토끼에게 어디냐고 문자를 보내니 친구 만나러 잠깐 나왔다고 하기에 알겠다고 하곤 내가 학원에 온 줄 모르는 토끼에게 깜짝 이벤트를 해주기 위해 선물을 들고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시간이 다 끝나갈 때 저 멀리서 토끼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한 남자가 보였다. 6반의 23살 형이었다.

 

난 오는 길에 만났나? 생각하던 그 때에 그 형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형은 깜짝 놀라며 이미 마주쳐서 어차피 숨겨지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행인들 틈에 숨었다. 그 형의 모습을 보던 토끼가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깜짝 놀라며 안절부절하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 이상한 행동과 표정들을 보며 예전 일이 생각났다.

 

전에 어느 날 저녁에 그 형과 토끼가 같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저녁 6시부터 10시가 될 때까지 사라져서 학원에서 찾는 소동이 있었는데 둘 다 맥주를 마시고 선생님들도 다 퇴근하는 시간에 학원으로 온 적이 있었다. 이 날의 생각이 떠오르자 가슴이 철렁했다.

 

 

 

손에 토끼에게 줄 이어폰을 들고 토끼에게 걸어가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너무 초라해서 씁쓸했다.

그 이어폰이 차라리 토끼가 눈치 못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토끼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이어폰을 쥔 손을 내밀었다.

 

놀란듯이 내 손을 바라보던 토끼도 손을 내밀었고 나는 토끼의 손 위에 떨어트리듯 이어폰을 주고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쓴 편지는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 뒤돌아서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토끼가 내 뒷모습을 보고 있을걸 알기에 혹여나 고개를 숙이고 걸으면 내가 울고 있는걸 알까봐 고개도 숙이지 못하고 수 많은 사람들 사이를 입술을 꽉 깨물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골목길로 접어들어 정말 엉엉 울었다.

 

핸드폰엔 그 형의 번호로 계속 전화와 문자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토끼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밤 10시 쯤 그 형과 만났다.

나의 오해라고 하는 그 형의 말에 그럼 형은 왜 날 보고 피했냐고 하자 우물쭈물 거렸다.

 

그렇게 가슴에 상처만 남긴 날이 지나고 다음 날이 밝았다.

대충 소식을 들은 토끼와 낙타, 몽이가 내게 쪽지를 가져다 줬다.

 

토끼와 그 형이 평소에 주고받던 쪽지의 내용들이었다.

 

그 형 : 그건 희망고문이잖아.

 

토끼 : 희망고문? 그게 뭔데요?

 

그 형 : 쉽게 말해서 어장관리?

 

토끼 : 아니에요. 그런 거.

 

앞 뒤 내용없이 딱 그 한 부분만 있어서 무슨 이야긴지 모르지만 내겐 기분 좋은 내용일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마주쳐도 인사도 안하고 말도 안했다.

 

과연 토끼는 날 좋아하고는 있었나?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내가 어장 속에 갇힌 물고기였을 뿐인가?

하는 생각이 너무 힘들게 했다.

 

자습실에서 혼자 앉아 mp3를 듣는데 소울스타의 잊을래 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널 사랑하니까 그게 이유니까
어떻게든 너만은 행복하게 살아줘
죽을만큼 아프면서 보내주니까
(I′ll pray for you)

잊어도 되겠니 지워도 되겠니
널 잊는다는게 내겐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이게 내 몫인걸...

 

이 부분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그 순간 평소에 자습실에 아무도 없을 시간인데 토끼가 자습실에 들어왔다. 난 고개를 숙이고 자는 척하려 했지만 토끼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왜 그러냐?'는 질문에 '너 때문에!'라는 말을 하지 못해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2013년 같은 하늘 아래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궁금했다.

과연 토끼는 날 좋아하긴 했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정말 어이없게도 엄마가 알고 계셨다.

 

"예전에 너 재수할 때 어떤 여자애한테서 전화왔었다.

 너 여자친구라고 하는데 (필자)가 많이 힘들어 한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길래 엄마가 그냥 끊은 적이  있었는데 너 재수할 때 공부 안하고 연애했니?"

 

이 말을 듣고 내심 기뻤고 또 슬펐다.

 

'내가 토끼의 진심을 몰랐구나... 내 오해였구나...' 그리고 토끼와의 추억이 담긴 여러가지 물건을 보던 중 예전에 받은 편지를 다시 읽게 되었다. 그동안 토끼라는 존재가 내겐 너무나 큰 트라우마였다. 떠올리기만 해도 괴롭고 그 당시에 유행하던 가요를 듣기만해도 너무나 괴로웠었기에 그 편지를 다시는 읽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구석에 박아뒀다가 다시 읽게 된 그 편지는 그녀의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2층집에서 다른 좋은 차 말고 마티즈라도 좋으니 애완견 한 마리 기르며 너와 행복하게 살고 싶어."

 

 

 

 

이젠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연락하기에 머쓱한 사이가 되었지만 토끼야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정말 미안해.

너의 마음을 왜곡해서 미안해.

그리고 정말 행복했었어.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을 싫어했는데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즐거웠어.

남이 쓰던 컵, 빨대, 음료수 등은 입에도 안대던 내가 너의 것이라면 거리낌 없이 썼었어.

잔정만 있지 정은 없다던 내가 너에게만큼은 모든 정을 다 주었어.

자존심이 강한 내가 너의 말이라면 자존심 따윈 중요치 않았어.

장보는걸 귀찮아 하는 내가 너 덕분에 즐거웠었어.

 

그리고 난 지금도 너가 좋다.

어쩌면 내가 이기적일지 몰라.

하지만 기억해줘.

 

난 너와 헤어진 그 순간부터 너가 좋아하는 보름달이 몇 번이나 뜨고 졌는지 정확히 세고 있었어.

너의 앞에 당당하게 서서 제대로 된 고백을 해야한다는 그 약속을 1329일째 잊지 않고 있어.

그동안 나도 고백받은 적도 있었지만 아직도 난 너만 바라보고 싶다.

 

아직도 꿈을 꾸면 너의 꿈을 꿔.

하지만 그 꿈을 깨면 현실과 꿈의 괴리감 때문에 먹먹할 때가 많아.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있어. 너에게 멋진 모습으로 돌아갈게.

 

그렇지만 그게 얼마나 걸릴지 사실 나도 모르겠어... 그래서 두려워.

하지만 그동안 너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 20대 중반도 안된 풋풋한 나이에 남들처럼 아름다운 연애를 하며 잘 살고 있길 바래.

 

그리고 훗날 너가 외로울 때 앞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물론 내가 너무 늦어서 너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해도 난 후회하지 않아.

내가 널 좋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만족해...

 

다시 만날 때 까지 안녕.

너무 늦지 않게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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