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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만주에서 결성된 독립군 무장 부대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 ③

참의부 |2013.03.26 15:11
조회 359 |추천 0

☞ 황민호(黃敏湖) 숭실대학교 교수

 

Ⅳ. 서간도지역 독립군단

 

1. 독립군단의 현황

 

만주와 노령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주요 독립군 부대 결성을 통해 활성화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서간도와 북간도지역에 중심적인 활동지였다. 서간도지역은 백두산 서북쪽 압록강 넘어 혼강(琿江) 일대와 송화강(松花江) 중상류지역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지역은 주로 집안현(集安縣)을 비롯하여 통화현(通化縣)·관전현(寬甸縣)·임강현(臨江縣)·장백현(長白縣)·무송현(撫松縣)·안도현(安圖縣)·흥경현(興京縣) 등을 포함하고 있다.

 

서간도에서 결성되었던 대표적인 독립군단은 1919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조맹선(趙孟善)·박장호(朴長浩)·김원섭(金元燮)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1919년 11월 이상룡(李相龍)·여준(呂準)·김동삼(金東三)·지청천(池靑天)·양규열(梁圭烈)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1919년 3월 안동현(安東縣)에서 김봉규(金琫圭)·박응률(朴應律)·나병삼(羅炳三)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1919년 11월 관전현에서 안병찬(安秉瓚)·김찬성(金燦星)·김승만(金承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大韓獨立團靑年聯合會), 1919년 장백현 팔도구(八道溝)에서 이은향(李殷鄕)·이태걸(李泰杰)·김찬(金燦)·김종기(金宗基)·윤덕보(尹德甫)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1920년 봄에 무순현(撫順縣)에서 편성된 광정단(匡正團), 회덕현(懷德縣)의 의성단(義成團), 관전현에서 오동진(吳東振)·백남준(白南俊)·최시흥(崔時興) 등을 중심으로 창설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이었다.

 

2. 독립군단의 활동

 

⑴ 서로군정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1919년 4월 부민단(扶民團)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등 서간도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기존의 조직을 확대하여 한족회(韓族會)로 개편함과 동시에 군사조직으로 군정부(軍政府)를 편성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다. 최고 지도자인 독판(督辦)은 이상룡, 부독판은 여준, 정무총장에 이탁(李鐸), 군정총장에 양규열,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김동삼 등이 선출되었다. 이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안공근(安恭根)·김병헌(金炳憲)을 특파원으로 파견하여 ‘군정부’라는 명칭에 오해가 있음으로 명칭을 임시정부 산하의 서로군정서로 변경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따라 서로군정서는 1919년 11월에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조직이 결성되자 서로군정서는 군자금 모집·선전활동·군사활동에 주력하였다. 군자금 모집은 주로 한족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실제로 한족회·군정서·신흥무관학교는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 조직이엇다.

 

˝신의주○○ 인산상회(仁山商會) 지점에 거동이 불심한 조선인 한 명이 숙박하고 있는 것을 당지 헌병분대 특무헌병이 ○○○ 그 자를 잡아 취조한 즉, 그 자는 용천군 부라면 중단동에 사는 임성준(林性峻) 24세된 자로 작년 봄에 지나(支那) 흥경현 능령보(陵嶺堡)에 가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어느날 음모조선인단체에 가입되어 가지고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한족회를 조직하고 상해가정부 군정서 소속의 회원이 되어 가지고 수금위원으로 임명되어 통화현 방면을 배회하며 독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차차로 조선 안으로 들어와 ○주에서 군자금 약간을 모집하야 합니하(哈泥河)라는 곳에서 신흥학교 생도대장 양모(梁某)에게 돈을 보내준 일을 자백하며 또한 그 자의 말에 의지하면 신흥학교라는 것은 군대조직으로 되어 대대장이니 중대장이니 하는 명칭으로 각각 1백명 가량의 부하를 두고 모두 군복을 입었다 하며, 또한 한족회는 총장·독판·암살대장·재무국·독립신문·학무국·법무국·교통국이 있어 가지고 각각 부분을 관리하는 국장이 있다는데, 국장이 되는 인물들은 평안도·경상도·경기도에 사는 인물들이 많이 와서 국장의 직을 가지고 있다더라.˝

 

위의 내용은 서로군정서 수금위원으로 신의주에 들어왔다가 일본군 헌병분대에 체포된 임성준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내용을『매일신보(每日申報)』가 보도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한족회·군정서·신흥무관학교는 모두 같은 계열의 조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군대조직이었으며, 한족회는 총장·독판·암살대장·재무국·독립신문·학무국·법무국·교통국 등으로 구성된 준자치기관적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

 

또한 서로군정서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족회가 중심이 되어 그 관할구역인 유하현(柳河縣)·화룡현(和龍縣)·통화현(通化縣)·관전현(寬甸縣) 등지의 한인(韓人)들에게 1호당 1원 5각(角)의 군자금을 부과하였는데, 그 호수는 1만여호에 이르렀다. 이밖에 지리적으로 인접한 평안도지역, 서로군정서 지도부와 연고가 있던 경상도 등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자금을 모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군정서의 선전활동도 한족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족회에서는 1919년 6월 24일 기관지인『한족신보(韓族新報)』를 발간하여 한인들의 독립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한족신보』는 한글 신문으로 1주일에 2회 발행되었고, 편집은 방기전(方基甸), 집필은 이시열(李時悅)·허영백(許英伯)·오치무(吳致武) 등이었다. 신문 내용은 주로 한인사회의 동향과 한족회의 활동을 소개하였으며, 향후 독립운동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논설을 게재하였다. 우리나라의 지리와 역사 등도 주요내용으로 다루었다.『한족신보』 는 1920년 1월 15일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관헌의 탄압으로 신문사는 강제로 폐쇄되고 인쇄기를 몰수당하였다. 이후 한족회는 신문의 이름을『새배달』로 고치고 발행인은 천세춘(千世春), 사장은『한족신보』의 집필을 담당한 이시열이었다. 발행 주기는 주2회였다.

 

서로군정서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독립군양성의 근간을 확립하기 위한 신흥무관학교의 운영과 확대였다. 서로군정서에는 3·1운동 이후 늘어나는 애국청년들 수용하고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근대적인 군사교육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5월 7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출발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교육을 시작했다. 초기의 학생은 최소한 40명 정도였으며, 음력 12월 18일에 연종시험(年終試驗)과 진급포상회가 개최되어 본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5명, 소학과 학생 중 반장과 우등자 4명이 포상을 받았다. 이후 신흥강습소는 1913년 5월 새로운 교사를 갖추고 교명도 신흥중학으로 변경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등 독립군 양성의 요람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은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교장 이천민(李天民), 부교장 양규열, 교감 윤기섭(尹琦燮), 교성대장(敎成隊長) 지청천, 교관 김창환(金昌煥)·성준용(成駿用)·이범석·김경천·신팔균·원병상·김성로(金成魯)·계용보(桂龍輔)·백종렬(白種烈)·오상세(吳祥世)·김승빈·손무영·박영희·오광선(吳光鮮)·홍종락(洪鐘洛)·홍종린(洪鐘麟) 등이었다.

 

한편 신흥무관학교는 졸업생을 중심으로 ‘의용대’를 조직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성과를 올렸다. 특히 채찬(蔡燦)이 이끈 제1중대는 1919년 5월 삼수군 영성주재소 습격과 1919년 7월 후창군 친일파 관리 처단 등의 성과를 올렸다. 또 1920년 5월에는 문상식(文相植) 분대가 경상북도 지역에까지 침투하여 관공서를 폭파하였고, 8월에는 유격대가 평안북도 강계지방에서 일본 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이는 등 매우 다양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간도침입이 본격화되는 1920년 9월 폐교하였으며, 지청천의 지휘하에 서로군정서에 편입된 3백명의 사관생도들은 안도현 삼인방(三因坊)에서 홍범도 부대와 함께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채찬 부대는 서로군정서의 주력군이 이동한 후에도 서간도 일대에 계속 주둔하면서 친일단체인 보민회와 일본거류민회 등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되었다.

 

⑵ 대한독립단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은 3·1운동 후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주로 의병항쟁 계열의 독립군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의병항쟁 계열의 여러 집단들이 통합된 조직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방대한 조직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에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의병항쟁 계열의 인사 560명이 기존의 단체를 해산한 후 조직하였다. 복벽주의(復辟主義)는 이들의 주요한 이념이었다.

 

중앙간부는 도총재에 박장호(朴長浩), 부총재에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咨議部長)에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관 조병준(趙秉準) 등이었다. 도총재부 산하에는 사무기구로 총단(總團)을 두었다. 총단장은 조맹선(趙孟善), 부단장은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재무부장은 전덕원(全德元) 등이었다. 박장호는 강원도의 의병대장이었으며, 백삼규·박양섭·전덕원 등은 평안도의 의병대장이었다. 핵심세력의 대부분은 유인석(柳麟錫)의 문하생이거나 지방의 양반 출신이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외에 1백여 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자 했는데, 만주에서는 거류동포 1백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관구(管區)를 두고, 10구마다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환인현(桓仁縣)·장백현(長白縣)·무송현(撫松縣)·임강현(臨江縣)·관전현·집안현(集安縣)·흥경현·통화현·유하현·본계현(本溪縣) 등에 지단이 설립되었다. 국내에도 지단 중 평안도와 황해도 설립 상황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이는 대한독립단의 중요 지도자들의 고향이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조직은 주로 만주지역의 독립군단과 연결하여 치안을 교란하는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만주지역 각 지단에는 재무부를 두었으며, 부유한 한인들에게는 15원에서 25원 정도의 군자금을 징수했다. 특히 재무부장 전덕원 등은 국내를 오가며 다수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실제로 대한독립단은 유인석의 문인들이 국내에서 조직한 단체들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했는데, 대표적인 경우는 현기정(玄基正)이 평양에서 조직한 공성단(共成團)의 활동을 들 수 있다. 공성단의 활동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현기정이 1919년 11월 평양으로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외에도 공성단은『독립신문』이나 독립운동단체의 각종 포고문 등을 국내에 배포했다.

 

대한독립단의 무장투쟁에 대해 살펴보면, 총단장 조맹선은 합이빈(哈爾賓)에 주둔한 러시아 백위군(白衛軍) 사령관 세미노프와 교섭하여 그 군대 안에 한인청년훈련부를 설치하고 체계적인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그리하여 1919년 8월 중순경에는 약 1천 5백명의 장정이 북만지역으로 파견되어 군사훈련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맹선의 노력은 일제의 탄압과 아울러 백위군이 군사훈련은 실시하지 않고 한인장정들에게 무리한 사역만 강요하는 등 백위군의 무성의한 태도로 성과를 거둘 수 없어 결국 한인청년훈련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조맹선은 한인청년훈련부가 실패한 후에도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오참(五站) 등지에서 새로이 한인부대를 창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실패하였다.

 

이밖에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통화로 부임하는 일본영사를 살해하였다. 1919년 9월 24일에는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에 있는 주재소 습격과 아울러 영림창과 면사무소를 방화하였다. 1920년 2월 23일에는 집안현 태평구(太平溝) 민단 지부장 강달주(姜達周), 3월에는 친일분자 강달수(姜達秀)를 처단했다. 1920년 3월에는 평북 벽동군에 있는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전소시키는 등 국경치안 교란과 친일파를 처단하는 성과를 올렸다.

 

국내 전투활동은 1920년 황해도 지방에서 전개되었던 구월산대(九月山隊)의 활약이 유명하다. 구월산대라는 명칭은 독립단원들의 전투활동이 구월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에서 연유하엿다. 1920년 7월 대한독립단의 파견대장 이명서(李明瑞)는 이근영(李根永)·박기수(朴基洙) 등 8명의 대원과 함께 구월산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전개하기 위해 황해도 은율군으로 들어와 동지를 규합하였다. 황해도에서는 김난섭(金蘭燮)·홍원택(洪元澤) 등을 포섭하였으며, 평안도와 황해도의 지단원인 이수영·이성룡·이항진 등을 소집하여 구월산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구월산대는 1921년 8월 은율군수 최병혁(崔炳赫)을 사살하고, 평북 의주경찰서 순사 김명수(金明洙)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草里面)에 있는 노성우(盧聖祐)의 집에서 구월산유격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경찰대의 습격을 받고 대장 이명서를 비롯하여 6명이 전사하고 3명이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적극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던 대한독립단은 연호(年號)의 사용이라는 이념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을 맞았다. 복벽주의세력은 단기(檀紀) 혹은 융희(隆熙) 채용을 주장한 반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인사들은 대한민국 연호의 사용을 주장했다. 이들은 각각 기원파(紀元派)와 국민파(國民派)로 대립하여 1919년 말기에 이르러 마침내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분열하였다.

 

기원독립단의 중심인물들은 대개 대한독립단의 중요 지도자들로 박장호와 백삼규를 비롯하여 전덕원(全德元)·이웅해(李雄海)·김평식(金平植)·백진해(白鎭海)·채원개(蔡元凱)·조맹선 등이었다. 이들은 대개 50대~60대 전후의 인사들이었다. 민국독립단은 조병준·변창근·신우현(申禹鉉)·유응하(劉應夏)·양기하 등이 주요간부로 활동하였다.

 

이후 민국독립단은 1920년경 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되었다. 기원독립단은 1922년에 광한단(光韓團) 등과 연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가 1923년 2월에는 분열되어 의군부(義軍府)로 개편되었다.

 

⑶ 대한독립군비단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은 장백현지역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였다. 결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1919년 11월 19일에 발표된 통첩에 본단 창립은 6개월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919년 5월경에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0월에는「대한독립군비단총단약장(大韓獨立軍備團總團約章)」이 발표되는 등 11월에는 간부의 임명이 완료되었다.

 

초기의 군비단은 함경도지역의 민족운동세력이 장백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조직한 독립군단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해 10월경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태걸(李太杰)·양현경(梁玄卿)·김정익(金鼎益) 등 7명을 파견하여 약장과 지단규칙을 발표하는 등 체제를 강화하면서 조직적인 독립군단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약장 제1장 제1조에 ‘본단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총재 각하의 명령으로 조직한다’라고 하여 군비단이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조직된 군사기관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군비단의 조직체계는 본부가 있던 장밳현 팔도구 남상성리(南江城里)에 제1지구 지단을 설치하였으며, 십삼도구 동흥리(東興里)에는 제1지구 지단 지부를 설치하는 등 3개의 지구를 설립하였다. 지단에는 지단장 및 지부장, 그 밑에 총무·재무·서기·통신사무원 등을 두었다.

 

국내조직으로는 북청(北淸)에 군비단 연락원인 주덕기(朱德基)가 파견되어 지단을 조직하였다. 단천에서도 조덕윤(趙德潤)·강명환(姜明煥) 등의 노력으로 지단이 조직되었다. 또한 충청도지방에는 군비단원 최용덕(崔鏞德)이「대한독립군비단약장」·「대한독립군비단지단규칙」·「경고아대한동포(警告我大韓同胞)」등의 유인물을 가지고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압록강변의 장백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군비단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1921년 이후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그중 이영식(李永植)이 이끈 제1중대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영식 중대는 제1소대장 고인식(高仁植), 제2소대장 김낙걸(金洛傑), 제3소대장 안용도(安瑢道), 특무정교 김계필(金啓弼), 참모 이병호(李炳浩), 하사 김원식·김윤성·김용도, 상등병 신현규·장성암·김영천·김명정, 일등병 오춘근·신학봉·조종천, 이등병 차병선·안원세·이용수·현지혁·박군삼·채윤홍·조정묵·양주완, 간사국원 조백륜·권응화, 모연원 김락범·이동률·김성률 등의 소속 대원들이 그 이름을 전하고 있다.

 

『독립신문(獨立新聞)』에 보도된 이영식 중대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1년 7월초 본부를 출발한 부대는 평북 후창군의 산간지역에서 일본군 1개 소대 병력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소위(少尉) 계급 장교 1명을 포함해 11명을 사살하고 보병소총(步兵小銃) 19정, 군도(軍刀) 1개, 탄환(彈丸) 3천 9백발, 혁대(革帶) 41조를 노획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장진군(長津郡)의 헌병주재소 한 곳을 습격하여 일본 경찰관 5명을 사살하고 보총(步銃) 5정, 군도(軍刀) 1개, 탄환(彈丸) 4백발을 노획하였다. 세번째 전투는 함경남도 풍산군으로 향하던 이영식 중대가 속신면(俗信面) 부근에서 일본군 1개 중대 병력을 만나 총격전 끝에 적병 25명을 사살하고 보총 2정과 탄환 160발을 노획했다.

 

대체로 이영식 중대는 1921년 7월부터 8월까지 평안북도 후창과 함경남도 장진·풍산·갑산 등지에서 작전을 전개하여 총 7회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 및 경찰대 127명을 사살하였으며, 보병소총 64정, 탄환 5천 1백 46발, 군도 8개, 혁대 43조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대부대를 파견하여 이영식 중대를 추적하였으나 기동성이 뛰어난 독립군을 토벌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군비단은 흥업단(興業團)·대진단(大震團)·광복단(光復團)·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 등과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한 대규모의 항일전(抗日戰)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 계획은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릴 태평양회의 결과 독립이 이룩되지 않으면 각 독립군단을 연합하여 일시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군비단에서는 장백현에서 각 독립군단 대표를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혜산진(惠山鎭) 하류를 군비단·대진단·태극단(太極團)의 혼성부대 4백여명이 담당하며, 혜산진 상류는 흥업단·광복단의 혼성부대 4백여명이 담당하고, 혜산진은 암살대 및 백산대(白山隊)의 혼성부대 2백여명이 담당하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결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3개 편성대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합세하여 혜산·보전(保田)·신갈파(新乫坡) 등 세 곳의 국경지대를 돌파하여 국내로 진공하기로 하였다. 군비단은 작전계획에 따라 각 지단과 지부에 작전계획을 통보하고 작전 중 필요한 방한용 견피(犬皮)와 족대(足袋) 및 군량미를 준비토록 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1920년 10월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이후 북정(北征)을 단행했던 북로군정서가 아직 진영을 확고히 하지 못한 상황에서 실행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군비단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동아일보(東亞日報)』에서는 아래와 같이 서간도지역에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들의 정황을 보도하면서 장백현지역에서 가장 그 형세를 떨치고 있는 단체가 군비단이며, 흥업단·서로군정서·광복단 등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병기와 복장을 준비 중이라는 보도기사를 게재하였다.

 

˝최근 국경대 안에 있는 독립단과 조선인 단체 중에 가장 그 형세가 떨치는 것은 장백현에 있는 군비단, 임강현에 있는 흥업단과 집안현에 있는 서로군정서, 관전현에 있는 광복단인데 수명 혹은 수십명의 단체들이 병기와 복장을 준비 중이라더라(신의주)˝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3·1운동 이후 서간도에서 조직된 군비단은 청산리대결전 이후에 궁극적으로 1920년대 후반 이후에도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이 지속될 수 있는 토대 구축에 기여했다.

 

⑷ 광복군총영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은 3·1운동을 전후하여 남만지역의 독립군단들이 통합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다.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大韓獨立團靑年聯合會)·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대표들은 1919년 12월경 관전현 향로구에서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기존의 독립군단을 해체하고 통일기구를 조직할 것을 중요 내용으로 하는 5개항에 합의했다.

 

〃1. 각 단체의 행동통일 기관을 설치하고 국내 왜적(倭敵)의 행정기관 파괴를 시행하되 각 단체의 개별적 명의를 사용하지 말고 반드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2. 연호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3.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상의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 법명(法名)을 요청할 것

4. 통일기관은 국내와 인접한 압록강 연안의 적당한 지점에 둘 것

5. 위의 통일기관 정비는 원칙적으로 각 단체가 평균적으로 부담하되 국내로부터 들어오는 특별수입금은 통일기관 군사비에 보용(補用)할 것〃

 

위의 내용에서 보면 광복군총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정하는 명의를 사용할 것과 대한민국의 연호를 사용할 것, 국내에 있는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할 것 등을 결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지역 독립군단 설립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이후 광복군총영은 김승학(金承學)·안병찬(安秉瓚)·이탁(李鐸) 등을 상해로 파견하여 위의 결정사항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주요 부서는 참리부(參理部)·사령부(司令部)·군영(軍營) 등이 있었다. 참리부장에는 조병준, 사령관에 조맹선이 임명되었고, 변창근(邊昌根)·오동진(吳東振)·홍식(洪植)·최시흥(崔時興)·최찬(崔燦)·김창곤(金昌坤) 등은 각 군영의 영장을 담당하였다. 또한 본부의 조직이 완비되자 군사적 목적만을 수행하는 특수조직으로 광복군총영이 결성되었다. 오동진은 총영장, 조병준은 경리부장 직책을 맡았다.

 

광복군총영은 1920년 1월 78일 조직체계와 성격을 밝히는「약장(約章)」을 발표했다.「약장」은 “한성(漢城)에 총영의 본부를 설치하고 각 도와 군에 도영과 군영을 설치하며 유격활동을 벌일 만한 곳에 별영(別營)을 설치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전국적 규모의 군사 조직을 통해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려는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광복군총영은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한 해만도 일본군경과 교전을 78회나 벌였다. 주재소를 56개소나 습격했고, 면사무소 및 영림창(營林敞)을 20개소나 소각했으며, 일본경찰을 95명이나 사살한 것은 주요한 성과이다. 광복군총영의 이러한 활약은『동아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26일 오전 독립단 벽동을 내습, 경관 한명과 밤중에 충돌, 독립신문 10장, 권고문 1장 등 여러 가지 물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개 10명에 지나지 못함. 광복군에 속하는 사람들로 오동진의 부하가 분명하였음. 별보(別報) 26일 밤 하북(下北) 경찰관 주재소 시기(柴崎) 순사 외 1명은 벽동군 오북면에서 9명의 광복단원을 만나 충돌이 있은 후 마침내 시기 순사는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더라.˝

 

이는『동아일보』1921년 6월 30일자에 보도된 광복군총영의 국내진공작전과 관련 보도 내용이다. 광복군에 속하는 오동진의 부하 10여명은 6월 26일 오전 벽동군을 내습하였으며, 오북면에서 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들은 무기를 소지한 이외에『독립신문』10장과 ‘권고문’ 1장 등을 가지고 있었다. 벽동군에 들어와 일본경찰 및 헌병과 충돌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잇으며, 일본경찰도 행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당시 광복군총영은 국내진격을 통해 일제의 국경치안을 심각하게 교란하는 한편, 선전활동을 통해 일반인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데도 기여했다.

 

광복군총영의 국내진공작전 가운데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0년 8월 임시정부 노동국총판 안창호(安昌浩)의 연락으로 미국의원단이 입국한다는 사실을 파악한 광복군총영에서는 서울·평양·선천·신의주 등지에서 특파대를 파견하여 대규모의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미국의원단으로 하여금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직접 확인케 하고자 하는 작전을 추진하였다.

 

평양에서는 평남경찰부 청사와 평양부청·평양경찰서에 폭탄이 작렬하였고 선천에서는 군청과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었다. 신의주에서는 역 앞의 호텔에 폭탄이 터져 호텔과 인근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서울에서도 거사가 준비되었으나 황금정(黃金町)에 있던 중국요리점 아서원(雅敍園)에서 작전을 논의하던 행동대가 일본경찰의 급습을 받아 거사가 좌절되기도 하였다.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추진되었던 광복군총영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으며, 국내외 동포들에게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이었다.

 

광복군총영에서 국내 유격작전을 주도했던 부대로는 천마산(天摩山)에 근거를 둔 철마별영(鐵馬別營)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 부대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주요 활동무대로 삼아 산림을 이용하여 활발한 이동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철마별영의 대원들은 광복군총영의 대원들이 국내로 진입하여 전투를 벌일 경우 이들과 합세하여 싸웠다. 뿐만 아니라 임무를 수행하고 만주로 돌아가는 대원들 안내와 엄호를 담당하였다.

 

광복군총영의 부대는 주로 40명~50명씩의 1개 부대가 국내로 들어와 다시 5명~10명으로 분산하여 부대별로 유격전을 전개한 후 다시 일정한 장소에 모여 대단위의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유격전에서 기동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복군총영은 설립 초기에 목표했던 대규모의 군사작전은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광복군총영은 1922년 8월경 통의부에 합류하였다.

 

⑸ 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大韓獨立團靑年聯合會)

 

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는 3·1운동 이후 요녕성 안동현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로 1919년 11월에 조직되었다. 이들은 주로 관전현과 평안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이하 대한청련)는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근간으로 조직을 확대해 갔다. 이 단체는 3·1운동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학생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박영우(朴永祐) 등이 만주로 피신하여 1919년 4월에 안동현 풍순전(豊順錢)에 모여 결성되었다. 이들은 항일투쟁의 전개를 결의하고 안병찬(安秉瓚)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총살한 안중근(安重根)의 변호를 담당한 바 있었으며, 3·1운동에 참가한 후 안동현에 망명해 있던 상황이었다.

 

대한독립청년단은 명칭으로 보아 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보이는데, 이들을 대부분 근대적인 교육받은 지식층이었다. 단장인 함석은은 일본 조도전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장자일(張子一)·박춘근(朴春根)·윤형보(尹衡保)·김기준(金基俊) 등은 평북 선천에 있는 신성중학, 오동진은 대성학교 속성사범과, 조봉길(曺奉吉)은 의주 양정학교, 정상빈(鄭尙彬)은 기독교계열의 숭실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의 간부진은 총재에 안병찬, 단장에 함석은 등이었다. 회원수는 약 30명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일과 청년단의 기관신문을 발행하여 대중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우영은 임시정부의 교통차장인 선우혁(鮮于赫)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안동현에 파견되었을 때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기관지로는『반도청년보(半島靑年報)』를 발행하였다. 한글판 등사본으로 간행된 이 신문은 임시정부의 정책과 활동을 널리 선전하는 기사를 주로 게재하였다. 주필은 함석은이었으며 5호까지 발행되었다.

 

이밖에 대한독립청년단은 1919년 8월에 안병찬 외 28명의 연서로 ‘중화민국 관상보(官商報) 학계제군(學界諸君)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 민족의 요구가 국제연맹에서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면 혈전을 도모할 것이라고 하면서 한중공수동맹(韓中攻守同盟)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은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이 체포된 이후 계속된 검거사건으로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한편 대한독립청년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안병찬은 국내외에 다수의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자 이를 통일하여 청년단체연합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은 안병찬이 체포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독립청년단의 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 등은 안병찬의 뜻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11월 1일 “청년은 국민의 중심이며, 국가의 기초이므로 청년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여야 한다”는「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 취지서」를 발표하여 연합회가 결성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이는 연합회를 결성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나 다름없었다. 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는 1919년 12월 25일경에 관전현 향로구(香爐溝)에서 50여명의 단원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연합회는 내외에 있는 각 청년단체를 연합할 것, 단원은 매년 금 2원씩을 출금할 것, 제 규칙의 제정, 역원을 선거할 것 등을 결의함으로써 새로운 조직 결성에 성공하였다. 당시 연합회 임원은 총재에 김승만, 부총재에 박춘근, 총무에 김찬성(金燦星), 편집부장에 함석은 등이었다.

 

대한독립단청년연합회에 참여했던 단체는 80여개 정도였다. 안동현의 대한독립청년단, 관전현의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 의주의 용만청년단(龍灣靑年團), 강계청년단·위원청년단·강계여자청년단·초산청년단, 의주의 산정청년단(山亭靑年團), 벽동청년단·창성청년단·신의주청년단·평양여자청년단·평양청년단, 황해도지역의 철산청년단·안악군청년단 등이었다.

 

이후 안병찬이 석방되어 연합회로 돌아오자 연합회는 조직을 정비하고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대한청련의 활동은 1920년 4월 19일에 개최된 제2차 정기총회에서 총재인 안병찬이 행한 진행 방침의 연설에서 그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 둘째로 의용단의 조직, 셋째로 일본인과 반역자의 처단, 넷째로 기관보『대한청년보(大韓靑年報)』를 발행하여 선전활동을 강화할 것, 다섯째로 임시정부 교통기관을 후원할 것 등이었다.

 

대한청련에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활동은 의용단 조직을 통한 무장활동을 전개였다. 대한청련은 이를 위해 군자금 모집과 무기구입에 노력을 기울였다. 군자금 모집은 우선 1920년 5월 백용서(白龍瑞) 등이 평북 벽동군 오북면 상동에서 이 지역의 유지 김준위(金俊胃)로부터 77원 90전의 군자금을 모집한 예를 들 수 있었다. 또한 관전현 소아하(小雅河)·만보개자(萬寶蓋子)·불대원(不大遠) 등에 몇몇 지부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일정액의 군자금을 징수했을 것으로 보인다. 회원들은 회비를 부담하였는데 제1차 총회에서는 매년 2원씩을 징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특히 회원 중 이탁과 김시점 등은 재산가였으므로 상당한 비용을 제공했다.

 

대한청련은 무기구입과 의용단 조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4월에는 이탁을 상해로 파견하여 권총과 폭탄을 구입했다. 교육부장 대리 오동진은 동지들이 모금한 660원을 지응진에게 주어 상해로 출발시켰다. 대한청련의 이러한 노력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7월에는 무기가 안동현에 도착한 후 일제에게 탐지되어 오학수·지응진 등이 체포되었다.

 

한편 대한청련은 임시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대한청련의 교통부장인 오학수는 임시정부가 설립한 안동교통사무국의 통신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편집부장인 장덕로(張德魯)는 참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오동진은 강변8군 임시지방교통국 참사, 교제부장이었던 김두만은 관전통신국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청련은 임시정부의 연통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연통제 조직 둥 평안북도 조직에는 안병찬·김시점·김승만·김두만·여순근·오동진·오학수 등이 독판·내무사·재무사·교통사·경무사·경감 등의 직책을 담당했다. 이밖에 대한청련은 제2차 총회에서 임시정부에 매년 6만원의 자금을 송금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1920년에는 총무인 김승만을 상해로 파견하여 8,040원의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대한청련은 1920년 5월, 일본 경찰이 관전현 홍통구(弘通溝)에 있는 본부를 습격하여 총재인 안병찬을 위시하여 서기 오능조·박도명(朴道明)·김인홍(金仁弘)·양원모(梁元模) 등 5명이 체포되었으며, 1920년 7월에는 상해로부터 운반된 무기와 탄약을 안동교통사무국 연와출장소(燕窩出長所)에 보관하였다가 발각되어 오학수 등 다수의 회원 체포로 타격을 받았다. 김승만이 대한청련을 단독으로 이끌었으나 1920년 민국독립단과 연합하여 광복군사령부로 발전적인 해체를 단행하였다.

 

이밖에 장백현과 인접하여 있는 무송과 임강현에는 백산무사단(白山武士團)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본단을 임강현 모아산(帽兒山)에 두고 각 방면으로 조직망을 갖추었다. 단원은 약 6천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단장은 이두성(李斗星), 총무는 김보환(金寶煥), 서기는 김성진(金成晉), 내무는 이영빈(李永彬) 등이었다. 백산무사단은 조직 내에 각 5부를 두고 재무·통신·외무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중 제2부장인 임선화(任善化), 제3부장은 남기락(南基洛)이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전투부대는 독판부(督瓣府)라 하였다. 조직원들 가운데에는 평안남북도 출신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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