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민호(黃敏湖) 숭실대학교 교수
Ⅷ. 독립군의 북진과 경신참변(庚申慘變)
1. 독립군의 고난에 찬 북진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이후 일본군의 대병력이 여전히 포위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단들은 일단 부대의 진로를 바꾸어 북만의 밀산으로 향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주력부대 병사 350여명은 김좌진의 지휘하에 안도현의 경계인 황구령촌(黃口嶺村) 부근에서 홍범도 연합부대와 서간도에서 이동해 온 서로군정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부대는 야포 1문과 기관총 2문, 병사 1인당 탄약 3백발~4백말, 그리고 우차 2량 등의 군수물자를 가지고 있었다. 주력부대 이외의 북로군정서 중 약 2백명은 무장을 풀고 평상복 차림으로 변장한 채 흩어져서 북만의 집결지로 향하였으며, 나머지 병력 50여명은 별도로 부대를 구성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이와 같은 이동 방식은 일본군 토벌대가 간도지역 곳곳에 산재해 있었고, 만주의 산간지리에 밝은 독립군 병사들은 소규모의 유격전에 능숙했기 때문에 분산 이동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황구령촌에서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북로군정서는 다시 부대를 재편한 후 병력을 나누어 이동하였다. 북로군정서의 병사들은 황구령촌을 출발하여 오도양차(五道楊差)를 거쳐 천보산(天寶山) 서쪽을 돌아 11월 중순경에 춘양향 소삼차구(小三差口) 부근에 도착하였다. 또한 홍범도 부대는 지청천이 이끄는 서로군정서와 함께 안도현 삼인반(三人班)과 대사하(大沙河)를 거쳐 북쪽으로 향하였다.
이외에 청산리대결전 기간 중에 흩어져 있었던 의군단 소속의 병사들도 연길현 허문리(許文里) 또는 화룡현 장재촌에 모인 후 다시 북로군정서와 합류하기 위해 연길현 춘양향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김준근(金準根)이 이끄는 신민단의 경우는 그 일부가 북로군정서와 합류하기 위해 춘양향으로 향했으며, 나머지는 왕청현 석현과 서대파를 거쳐 안도현 방면에서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였다.
김좌진이나 홍범도의 부대와는 달리 처음부터 나자구와 밀산 방면으로 이동한 부대도 있었다. 최진동이 인솔한 군무도독부·의군부·신민단·훈춘한민회 소속 민병대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나자구에 집결하여 최진동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라는 통합부대를 조직하여 부대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후 홍범도는 자신의 명의로 낙오되고 흩어진 독립군에 대한 소집령을 발표하였으며, 북로군정서는 격고문(擊鼓文)을 발표하는 등 독립군단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격고문에서 북로군정서는 ‘원수의 적을 꺾어 누르고 시국을 수습하고자 할진대 여럿의 계책, 여럿의 힘을 집중하여 일심을 도모하는 것이 유일의 양책(良策)이니, 우리 독립군 각 단체는 속히 협동’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편 독립군의 집결지가 된 밀산(密山)은 1910년을 전후하여 민족운동자들이 국외독립운동기지의 하나로 경영하고 있었던 지역으로, 홍범도도 1910년대 중반 이곳 봉밀산 일대에 주둔하면서 독립군을 양성한 바 있었다. 그러나 밀산은 독립군이 장기간 주둔하기에는 한인사회의 재정적 기반이 취약한 곳이었기 때문에 독립군 지도자들은 러시아지역은 연해주로 들어가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항일투쟁의 전략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연해주는 간도와 마찬가지로 1910년대부터 항일독립운동 세력이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였으며, 약 20만에 이르는 한인들이 대규모의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의 새로운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적지(適地)로 부상되고 있었다. 더욱이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소련정부가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해주지역은 만주지역 독립군에게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한 뒤 하나로 통일된 독립군 부대를 결성하기 위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조직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의 여단을 두었으며, 1개 대대는 3개 중대, 1개 중대는 3개 소대로 구성되었다. 소대의 총수는 27명이었으며, 전투병력은 3천 5백여명에 달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에는 공동으로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에는 김규식(金奎植), 참모장에는 이장령(李章寧),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이 각각 취임했다. 이밖에 김창환(金昌煥)·오광선(吳光鮮)·조동식(趙東植) 등이 중대장을 맡았다. 대한독립군단에 합류한 주요 독립군 부대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훈춘한민회·군무도독부·대한의군부·신민단·혈성단·야단·대한정의군정사 등이었다.
통합군단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독립군 장병들은 1921년 1월초 러시아 이만으로 들어가 자유시로 향하는 새로운 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이 청산리대결전 직후부터 장정(長征)에 올라 자유시까지 이동하는 행군은 실로 고난에 찬 여정이었다. 1921년 9월 대한독립군 북만주 통신부원 심만호(沈萬浩)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낸 보고에 의하면, 실제로 독립군 장병들은 한겨울에 솜을 넣지 않은 얇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많게는 수천리에서 적게는 수백리 길을 행군해야 했다. 간도를 떠난 이후 동포들의 후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로 고난에 찬 행군이었다.
2. 일제의 발악과 경신참변
만주지역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했던 계획이 무산되자 일본군은 간도의 무고한 한인농민들을 해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자행하였다. 이는 1920년대 일제가 한인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가장 참혹한 만행의 하나였다. 경신참변은 192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간 집중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후에도 일본군 잔류부대에 의해 5월말까지 계속되었다.
북간도를 침범한 일본군 제19사단 예하의 목촌지대(木村支隊)는 1920년 10월 22일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 일대에서 북로군정서의 병영과 7개동에 달하는 사관연성소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또한 백초구와 의란구, 팔도구에서는 150명의 무고한 한인(韓人)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0월 말에는 연해주로부터 침입한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대장 대강융구(大岡隆久) 소좌(少佐)가 거느린 77명의 병력이 용정촌 북방에 위치한 장암동(獐巖洞)에 들어와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전 주민을 교회에 집결시켜 놓고 40세 이상의 남자 33명을 바닥에 꿇어 앉힌 다음, 짚단 등으로 교회를 채운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교회는 즉시 화염에 휩싸였으며, 일본군은 불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을 모두 군도(軍刀)로 참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넋을 잃은 가족들은 일본군이 돌아간 후 숯덩이가 된 시신을 수습하여 겨우 옷을 입혀 장사를 치루었다. 그런데 5일~6일 후 일본군이 다시 이 마을에 나타나 무덤을 파고 시체를 한 곳으로 모으라고 명령하는 등 가족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갔다. 이에 가족들은 살기 위해 언 땅을 다시 파고 모든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놓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이번에는 시체 위에 짚단을 얹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시신이 숯이 되고 재가 되도록 태우는 이중학살을 하였다. 이에 시체는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가족들은 일본군이 철수한 후 할 수 없이 시신을 합장하여 분묘를 만들어야만 했다.
일제의 이러한 만행을 목격한 어느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그리고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Dr. S. Martin)은 이 사건에서 일본군이 살아있는 민간인을 불태워 죽이는 장면에 대해 그 비인간적인 만행을 생생히 고발하는 증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장암동학살사건 내용은 가해자인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살해하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고 숯이 되어 있는 것을 촬영하였다고 한다) 조의금 2백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 차례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 것은 사실이다. 본건은 혹은 학살사건으로서 선전에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 모름으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한 주의를 주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보면 간도에 파견된 일본군 토벌대는 독립군 소탕 작전에 실패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에 대한 분풀이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한인들이 겪었던 참상은 인륜의 도를 넘는 가혹한 것이었다.
장암동학살사건 이외에도 한인들에 대한 처참한 살상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10월 20일 의란구에 침입한 일본군 제19사단 석총대대(石塚大隊)는 이 지역에서 이동근 등 8명을 살해하였으며, 4일 뒤에는 제74연대가 양만홍 등 10여명을 죽이고 학교 1채와 민가 5채를 불태웠다. 11월 3일에는 일본군 제76연대가 북의란구에서 독립군 부대의 군자금 모집과 정보수집 등에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농민 이국화 등 16명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같은 날 이 부대는 목촌(木村) 대좌(大佐)의 지휘 아래 ‘불령선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김창홍·노우선·김열의 집을 비롯한 31채의 민가를 소각하였다. 11월 3일과 4일 태양촌에서는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정신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교사 노우선 등 2명과 이주향 등 농민 13명이 사살당했으며, 11월 5일에는 의군부의 총무 서우익과 익명의 서무부장, 이을·홍정필을 비롯하여 10명의 독립군 관계자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1920년 10월 19일에는 회령수비대장 성전(成田) 중좌(中佐)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화룡현 북장패촌의 촌장 이용점과 농민 장두환·신국현·김종민 등을 체포하여 풍도령(風度領)에서 살해하였으며, 화룡현 송언둔(宋堰屯)에 침입하여 집을 수색하고 지계순 등 14명을 학살한 후 석유를 뿌리고 시체를 소각하기도 하였다.
특히 백운평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백운평 마을의 23세대에 대해 여자들은 모두 밖으로 나오게 하고 남자들은 젖먹이까지 모두 집에다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으며,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검(銃劒)으로 찌르고 기관총으로 쏘아 살해하였다.
이밖에 1920년 12월 6일에는 연길현 와룡동에 살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을 구소하(鳩巢河) 신흥동(新興洞)으로 끌고가 신문(訊問) 중에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 가죽을 칼로 벗겼으며, 끝내는 두 눈을 칼로 도려내어 누군지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연길현 약수동에서는 살해된 시신을 다시 불태운 후 강물에 던졌으며, 부녀자를 잡으면 강간을 한 후 살해했다. 연길현 소영자(小營子)에서는 25명의 부녀자가 강간을 당하였다. 한인들의 참변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로 파견되었던『동아일보』의 장덕준(張德俊) 기자 실종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화룡현 신동(新洞) 사는 한인 마룡하(馬龍河)는 11월 4일 일본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6칸의 집과 123석의 쌀, 우차 1량, 돼지 2마리 등을 잃었으며, 몰래 탈출한 2명을 제외하고는 자신도 가족과 함께 참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편찬한『한국독립운동사사전』제3권 204쪽에 정리된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의 토벌은 재만한인들이 칩거하고 있는 연길·화룡·훈춘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피해는 독립군이 아닌 주로 양민을 대상으로 전개되었고 피해의 내용은 살인·방화 등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등 잔인하였다.
경신참변으로 일본군의 만행이 문제가 되자『매일신보』는 일본군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군의 행위를 옹호 내지 변호하는 다양한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1920년 11월 13일자 기사에는 간도지방의 선교사가 거짓말로 선동하여 배일하는 유언비어가 자꾸 돌아다녀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보도하였다. 11월 30일에는 경무국 발표를 통해 수정(水町) 대좌(大佐)가 간도에 주재하는 영국인 선교사에게 일본군의 토벌상황을 악의적으로 선전하여 양국의 국교가 원만하게 되지 못할 염려가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 반성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는 내용을 기사화하였다. 또한 이 기사에서는 토벌대가 잔인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전혀 거짓말이며 오전(誤傳)이고, 현재 일본군대가 숙영(宿營)하는 것에 대해 양민들이 환영하고 있으며, 영구히 주둔해 주기를 탄원하는 자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의 풍문은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 12월 22일자『매일신보』에서는 일본군의 만행을 변명하는 육군 당국자의 주장을 직접 게재하기도 하였다.
˝훈춘과 및 당도 방면에서 일본군대의 행동에 관하여 잔인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는 것 같이 실지로 본사 사람이 이야기로 어떤 외국신문에 게재 되었다는데 당국으로써는 그것을 인정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은 온전하여 참학한 행동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그의 적대자의 대하여도 항상 한방울의 눈물을 나누어서 잊지 못할 미덕을 가졌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참고하여 볼지라도 명백한 터이다. 더욱이 간도지방은 음모 조선인단의 최원지로써 그들은 항상 양민을 협박하여 군자금을 청구하며 한 걸음 나가서는 조선 내지에 침입하여 그의 독립운동을 해보고자 하는 반역자들이 있다 출병만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거류민 …가옥을 불지르는데서 일어난 것으로써 우리 군사는 이즘에 그들을 멸하기에 노력하기 이 화근을 아주 없이 하여 거류민으로 하여금 평안함을 얻기로써 하는 취지로써 반역하는 운동을 미리 방지하고자 함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 다음 우리 군대가 노유남여를 묻지 아니 하고 소살(燒殺)하여 그 참상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같이 보도하였으나 이것은 필경 우리 군대가 우리나라 국풍에 의지하여 후의로서 죽은 자를 화장하는 사실을 오해한 것인 듯하며 또한 연료가 부족한 까닭에 충분히 태우지 못한 것을 외국인 선교사로 하여금 촬영케 한 사실이 있는 것은 임의 보도한 바 있거니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마는 우리 군대에서 그와 같은 참학한 행동이 없는 것은 일반 국민 확실히 믿고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우리 군대 출동으로 인하여 음모 조선인 촌락이 그의 음모를 또 다시 근거지를 잃어버리게 된 것은 기쁜 일이요 지금 그 각 촌락으로부터 우리 군대가 영구히 주둔하여 달라는 탄원한 일이 있으니 그것으로서 일반의 동정을 알 수가 있다.˝
위의 글에서 보면 일제는 외국신문에서 일본군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양민을 태워 죽인 것에 대해 그 참상을 눈을 뜨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죽은 자를 화장(火蔣)해주는 것을 후의(厚意)로 여기는 일본의 국풍(國風)에 의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연료가 부족한 까닭에 충분히 태우지 못한 것을 선교사들이 촬영하여 생긴 오해라고 변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글에서는 주로 예수교 촌락과 학교가 책원지로서 소각당하는 피해를 입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외국인에게 의뢰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게 한 선교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매일신보』는 일본군대의 파견이 긍정적이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12월 11일자 기사에서는 태평천(太平川) 소육도구 선민거주민일동(小六道溝鮮民居住民一同)의 명의 제출되었다고 하는 ‘감사장(感謝狀)’ 전문을 게재하였다.
˝우리 조선민족은 수년 이래 이 지나 영토에 이주하여 누구든지 농사에 종사하면서 생명을 보존하여 오는 바인데, 작년부터 조선 내지로부터 소위 애국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자칭하는 불량배 들어와서 한국 독립을 칭탁하고 일반농민을 선동하며 군자금을 내여라, 혹은 의군을 모집함에 분주하여 금년 여름으로부터는 공공연히 군대적 행동을 하매 이르렀으매, 우리 농민의 다수는 이것이 올은 것인 줄은 알았으나 그 선동자의 협박의 못이기여 하릴없이 그 욕구하는 바에 응하여 다액의 금전을 내어주며 혹은 의군의 증병되었으나, 필경은 금년 가을의 지나관헌으로부터 엄중한 조사가 있었으므로 그 무장단체를 해산함에 이르렀고, 지금 또 귀 군대가 이곳에 파견되어 불량배와 지나 마적을 일체 소탕하고 우리 주민의 보호에 노력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중에는 음모배의 선동과 협박으로 인한 까닭이라고는 하나, 이전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한 자가 적지 아니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이번에 모두 관대한 처분의 받아서 무사히 반환된 것은 실로 감사하며 금후는 여하한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두 번 이와 같은 불량배의 감언에 선동되지 아니하여 각각 스스로 농업에 면려하여서 오늘날 받은 은혜의 만분에 일이라도 봉답하기로 이에 서약하나이다.
소육도구 선민거주민 서명˝
위의 내용에서 보면『매일신보』는 대체로 일본군대가 마을에 파견되어 불량배와 마적을 소탕하고 주민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과거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까지 관대하게 처분해주고 있어서 주민들이 ‘오늘 받은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고 봉답하기로 서약’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일제의 선전을 위한 왜곡보도의 일환이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매일신보』에서는 3월 6일 입경(入京)한 봉천성 동변도윤 겸 안동성 교섭원 하후기(河厚琦)가 일본이 출병을 단행하여 국경지방이 안정을 찾게 된 것에 대해 중국 측을 대표해 총독부 경무당국과 헌병사령부, 군사령부를 방문 감사의 예를 표할 것이라고 보도하면서 중국대표의 안면(顔面)에 무한한 ‘희색(喜色)이 현(現)하는 듯’하다는 보도로 당시의 상황을 왜곡하고 있었다.
이밖에『매일신보』에서 1921년에 들어서도 독립군의 활동에 대해 단편적인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한인들의 귀순업무를 취급하다 1921년 1월 19일 하관(下關)에 도착한 직전(直田) 대위(大尉)의 증언을 인용하여 김좌진은 다소간의 의학지식이 있어서 조선인 병자에게 모르핀 주사를 하거나 최면요법으로 치료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홍범도는 부하 3백명을 규합하여 감추어 두었던 무기를 꺼내 다시 반항할 것을 계획하고 있어서 일본영사관에서는 중국관헌에게 체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토벌 당시 동경성(東京城)으로 도주하였던 구춘선은 요사이 신문을 발행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음모적 선전인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령으로 도망갔던 조선인단은 다시 국경방면을 소란케 하기 위해 합이빈에 연락기관을 설치한 형적(形迹)이 있으며, 합이빈에서는 배일조선인이 조선민회에 두 번이나 폭탄을 던진 적이 있는 등 그 상황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 주장하는 합이빈총영사 송도숙(松島肅)의 말을 인용 보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1년 7월 24일과 26일자『매일신보』에서는 간도시찰단장 조희림(曺喜林)이 기고한 ‘최근의 간도사정’이라는 논설이 게재되었다. 이 글에서 조희림은 ‘마적의 악행(惡行)이 간간히 있으나 생활의 불안정을 감(感)하는 일은 없으며, 만약 상당한 기관과 충분한 설비만 유(有)한다면 공(恐)컨대 조선보다 우(憂)하다 할진데’라고 하여 간도지역이 안정을 되찾고 있는 것으로 보도하였다.
따라서『매일신보』의 이러한 보도 내용은 궁극적으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이 실패로 끝나자 조선총독부가 관제언론을 동원하여 이를 은폐·변호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경신참변 이후 국내외를 통해 일본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1920년 11월 6일 일본 정부는 중국은 간도지역에 군대를 증파하여 치안을 확보할 것과 이후 일본은 자위상 필요한 지방에 출병하여 임시적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방침을 중국 측에 통보한 후 12월 20일을 기해 주력부대를 간도에서 철수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후 1921년 1월 6일 일본 각의에서 ‘간도방면 철병선후책’이 통과되었고 주력부대의 철병이 확정되었다.
일본군의 철수가 확정되는 상황에서 간도총영사 대리와 두도구 분관 주임은 일본 외무성에 전보를 보내 치안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일본군 주둔을 요청하였다. 이는 11월 30일 일본각의에서 결의한 ‘훈춘사변에 관한 세 가지 해결책’에 반영되었다. 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간도지역에서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재류일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수비대를 남겨두며, 또한 해당 수비대가 철수할 것에 대비하여 간도지역 일본영사관 산하에 경찰력을 대폭 증강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12월 16일 19사단의 일부 병력을 ‘간도파견대’라고 하여 현지에 남겨두었다. 12월 31일 편성을 마친 간도파견대는 용정촌·국자가·백초구·두도구·의란구 등지에 파견되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수색작업과 귀순자 문제의 처리에 주력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1921년 2월 간도연락반을 편성하여 용정촌·두도구·백초구·천보산 등지에 주둔시켜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1년 5월 잔여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후에도 연락반을 연락원으로 개칭하여 계속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등 간도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여전히 군사력 위주의 강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