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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그 날... (집으로...)

shdoll79 |2013.05.10 03:00
조회 410 |추천 1

17년 전 고등학생 여름방학 때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제가 겪었던 일입니다.

 

그 날 따라 내가 왜 흰 빽바지를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학원을 가기위해 집을 나설 때만해도 비가 안 왔어요. 그래서 흰바지를 입었을 거예요.

비가 올 줄 알았다면 빽바지 따위 안 입었을 거예요.

 

학원을 마치고 나오니 한여름의 소나기가 퍼붓더군요. 우산도 없는데...

지갑에 현금은 하나도 없고 회수권(지금의 교통카드죠)만 있어서,

버스정류장까지 비를 맞으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사장 주변을 달리다가 소나기로 인해 갈색 진흙으로 변해버린 길에서 미끄러져

슬라이딩을 하며 넘어진거예요. 빽바지가 똥색 바지로 바뀌는 순간이었죠...

(참고로 저는 여자입니다.)

 

아픈것 보다 너무 창피해서 벌떡 일어나 저는 다시 뛰었습니다.

 

그런데... 앞이 잘 안 보이는 거예요...

진흙에 슬라이딩 할 때 렌즈가 빠져버린 겁니다.

 

저는 자다가 일어나면 손으로 침대를 더듬어 안경을 찾아 써야 할 정도로 시력이 나쁜 학생이었습니다.

제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쓰면 눈이 단추 구멍만큼이나 작아보였기에 렌즈를 매일 착용했죠.

 

집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는데 렌즈 없이는 바로 앞의 물건에도 부딪혔기 때문에

이대로 집까지 간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어요.

그러나 당시 저에겐 핸드폰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집까지 가야했습니다.

 

저는 조금이라도 더 잘 보기위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려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눈의 초점을 맞추었고,

비 때문에 더 흐려진 시야를 극복하고자

양 손을 펴서 눈썹부위에 올려서 비를 막으며 버스정류장으로 갔어요.

 

다행이 늘 다니던 길이라 버스정류장까지 도착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지요.

 

“쯧쯧, 우산도 없이, 어디서 굴렀는갑네~”

다만... 나의 바지를 보며 사람들의 쯧쯧거리는 소리를 참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죠.

 

그런데 막상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정류장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버스의 번호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아무리 눈의 초점을 맞추려 해도

시력의 한계인지 아니면 비 때문인지 날도 흐리고 버스번호가 보이지 않았죠.

그리고 도저히 이 몰골로 누군가에게 번호를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몰골로 버스정류장까지 온 이상

저는 이 모든 일을 혼자의 힘으로 극복하려 맘먹고,

버스번호를 보기 위해서 차도와 최대한 가까이 서서 목까지 쭉빼고 미간에 힘을 더 주어서

초점을 맞추어 버스번호를 보는 순간!

 

촤 아 악 ~!

 

사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차도와 떨어져 멀찍이 서 있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 이유를 너무 늦게 알아버린거죠...

 

갑작스레 퍼붓는 소나기로 인해서 도랑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차가 지날 때마다 엄청나게 뿜어대는 그 물에 저는 샤워를 하듯 얼굴과 온몸을 적시었어요

게다가 그 물이 하수구 물이 차오른건지... 냄새도 꽤 났어요.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쯧쯧”소리는 더욱 커졌고,

저는 그렇게 앞만 보며 도망치듯 버스위에 올라탔어요.

 

버스위에 올라타고 보니 만원버스더라구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중간에 제가 끼여있으면 내리는 곳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비집고 가서 내리는 문쪽 긴 봉을 잡고 서있었죠

(그 때는 지금처럼 다음정류장이 어디인지 친절하게 방송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 때 ...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만원버스인데,

제 주변은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동그랗게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는거예요.

제 앞에 앉아 계시던 할머도 코를 막으시며 저에게 그랬죠..

“학생! 뒷간에라도 빠지고 온거야?!

비가와서 창문도 못여는데 내 앞에 서 있으면 어쩌겠다는거야?!”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는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고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집까지 하염없이 달렸던 기억이 나네요.

 

집에 와서 저의 몰골을 본 엄마는 학원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물으시는데,

저는 아무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빽바지를 벗고 샤워하러 들어갔답니다.

 

그 후로 성인이 되어서 라식수술도 하고 제 차도 생기면서

이 날 겪은 일은 재미있는 하루의 에피소드로 기억되 있네요. ㅋㅋㅋ

 

추천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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