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소년]
1.그 소년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의 이름은 출석부 안에서만 존재했다.
그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돼지’로 불리었다.돼지,
돼지소년. 하지만 별명과는 다르게 그는 뚱뚱하지도 지저분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열 살 소년이었다. 수업시간에 열을 맞춘 책상 하나에 멀뚱히 앉아있는 그때만큼은,
적어도 그때만큼은 평범해 보였다. 일단 쉬는 시간 종이 치고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기 시작하면 소년의 특이한 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움츠린 어깨. 길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힐끔대며 주변을 살피는 눈동자.
그럴 때면 소년은 극도로 불안해보였다. 모두 각자 자기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는 수업시간이,
하루중에 제일 편안한 시간이었다.
눈에 띄게 지저분하진 않지만 어른의 손길이 타지 않은 인상을 주는 옷차림,
손질할 필요가 있는 긴 앞머리...
이 조용한 제자에게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선생님이 있었다면,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들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태껏 무관심 속에 살아갔던 소년은 열 살이 끝나갈 무렵 처음으로 그런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는 갓 스무살이 된 대학생을 연상시키는 앳된 외모를 가진 교사였다.
소년은 신입 교사인 그녀에게 첫 제자였고, 그녀는 소년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만난 천사였다.
어느 날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온 아들을 벽으로 몰아세웠다. 소년은 습관처럼 머리칼 안에 숨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도망갈 곳을 찾았지만, 매서운 눈길을 피할 곳은 없었다.
“너. 요즘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니?” “수업 끝나고 선생님이랑 애들이랑 교실을 꾸몄어요.”
“안된다고 했잖아, 넌!” 어머니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연이어 소리쳤다.
“너는 안 돼, 응? 알겠어? 집으로 바로 와. 누가 마음대로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다니랬어!”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이 소년의 팔에 파고들었다. 소년은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마주치면 더 화를 낸다는 걸 알아서였다.
소년의 어머니는 찢어지는 고음으로 몇차례 더 경고를 했다.
그러고도 그녀는 분이 안풀리는지 부엌으로 가선 물건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뭘 히죽대는 거야??! 네 방으로 가!!”소년은 바닥에 떨어진 책가방을 주워 들었다.
삐걱, 삐걱... 오래된 집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머니는 그것까지 모두 다 소년의 탓인 양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어머니를 뒤로 하고 계단을 올라가는 소년의 왼쪽 팔뚝엔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남아있었다.
오빠가 혼나는 소리를 듣고 두살 아래의 여동생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한뼘 정도나 되게 문을 열고 머리만 살짝 내민 여동생은 2층으로 올라온 오빠를 불렀다.
소년은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와 노란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늘 동생의 눈이 동글동글, 반짝반짝 빛나서 유리구슬같다고 생각했었다.
남매의 어머니는 딸에게 원피스를 입히는 걸 좋아했다.
덕분에 동생은 늘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 같았다.
"같이 놀래?"
부모의 사랑으로도 모자라 오빠의 관심마저 바라는 소녀...
소년은 동생을 지나쳐서 복도 끝에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왕!"하고 짖었다. 저게 뭐지?
소년은 우뚝 멈춰서 동생의 방 문 사이를 쳐다봤다.
동생의 발 아래로 갈색 털뭉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새끼 강아지였다.
일주일 전에 데려왔지만 한번도 가까이 가보지 못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강아지는 너무 어리고 작아서 밖으로 돌아다닐 수 없었고,
소년은 동생 방에 출입하는 일은 금지되어있었으니까.
태어나서 쭉 사랑만 받아온 강아지는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 작은 발로 소년의 바짓단에 매달렸다.
만져주세요. 예뻐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강아지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애정을 구걸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강아지는 이를 몸으로 표현했다.
털에 파묻혀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짧은 꼬리가 분주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는 동생은 양 볼에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괜찮아. 만져두 돼."
"......"
작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소년의 손을 덥썩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소년은 어어, 하는 사이에 동생의 방으로 한발, 두발 끌려가게 되었다.
동생의 방은 따뜻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은 분홍빛 커튼을 물들이고 있었고, 침대 옆의 바닥에는 동그란 모양의 카펫이 깔려 있었다.
동생은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강아지의 배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단지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히고 서서, 동생한테 잡힌 손을 강아지 털에 대고 있었을 뿐이다.
강아지가 예뻐죽겠다는 듯 웃고 있는 동생과 다르게 소년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만져봐."
그는 동생이 하는 것처럼 손을 움직여봤다. 손바닥에 뭉클한 느낌이 닿았다.
소년은 여동생과 강아지가 노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똑같아. 둘 다 똑같이 작고, 갈색이고, 체온이 높아서 따뜻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동자가 한곳에 오랫동안 머무른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때,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동생 방엔 들어가지 말랬잖아!!!"
이번에는 오른쪽 팔이다.
어머니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소년을 방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놀자고 했어. 오빤 잘못없어."
"뭐???"
"그, 그냥....강아지랑 놀고싶어하는 것 같아서. 나도....나도 오빠랑 같이 놀고 싶었어...."
"엄마가 말했잖아. 오빤 안 돼. 같이 놀면 안 돼!"
여동생은 강아지를 꼭 끌어안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동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랑 똑같은 머리색깔을 가진, 눈동자 색깔까지 똑같은 진짜 오빠인데...
어머니는 소년을 끌어내곤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소녀는 문이 닫힌 방에 홀로 남겨져선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 때문에....미안해 오빠....미안해...."
퇴근하자마자 집 분위기가 심상치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버지가 곧바로 딸아이 방으로 향했다. 앙증맞은 문패까지 달린 소중한 공주님의 방이었다.
그는 "아빠!"하고 달려와 품에 안길 걸 예상했지만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레이스가 달린 침대도, 커튼도, 인형들도 모두 감쪽같이 사려져버렸다. 남은 건 바닥에 남은 흔적들 뿐이었다.
놀라서 1층으로 내려간 그는 아내가 손님용 방을 청소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원래 있던 가구들은 정원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 가구들 옆에는 덩치 큰 남자 두명이 서성대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무슨 일있어?"
"난 못견디겠어요, 정말!"
"왜 그래."
"난 저 애가 끔찍해요. 더는 못하겠어..."
남편은 우는 아내의 등을 부드럽게 감싸안아 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나타나 울먹이기 시작하는 딸도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아들이 있는 윗층을 쳐다봤다. 그는 질렸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동생이 1층으로 방을 옮기고 나자 2층에 올라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됐다.
2층엔 오지 않는 손님을 위한 방과,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소년의 방만이 남게 되었다. 삐걱대는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도 소년이 유일했다.
동생의 방이었던 문에는 문패를 걸었었던 작은 못만 튀어나와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더이상 동생의 재잘대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복도를 지나서 끝에 있는 어둡고 음습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는 했다.
작은 소음도 들리지 않는,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주 편안했다. 이 세상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이 흘러갔다.
학교에서 소년의 몸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다쳤니? 어쩌다가 그랬어."
"......"
"......"
"......"
"넘어졌어?"
긴 침묵 끝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는 젊고 예쁜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소년의 팔에 있는 상처는 누가봐도 손톱자국이었다.
새로 생긴 빨간 상처 주변엔 몇개의 자국이 또 남아 있었다.
교사는 서랍을 뒤져서 반창고를 몇개 꺼내서 붙여주었다
소년은 아프지도 않는지 묵묵히 참아내며 앉아있었다. 어른이 힘줘서 잡으면 툭 부러져버릴 것처럼 어린 팔뚝이었다.
중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아직 여물지 않은 뼈는 간단히 부러져버릴 터였다.
그녀는 "누구니?"하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요즘은 왜 그냥 가? 선생님 좀 도와주지않고."
"집으로 오랬어요."
"어머님이 그러셨니?"
"저는 돌아다니면 안된다고 했어요."
"'저는'?"
너는 안 돼.
너는.
넌.
소년의 말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교사는 소년에게 여동생이 한명 더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생은 누가봐도 사랑받고 자란 표가 나는 아이였다. 늘 무채색의 옷을 입는 오빠와는 달리, 여동생은 공주님처럼 반짝거리는 새구두를 매일같이 바꿔신으며, 요정같은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노골적인 차별을 받고 있는 거라면...
교사는 마음이 아파서 숨 쉬기를 잠시 멈추었다. 덤담하게 말하는 소년이 너무나 가여웠다.
그녀는 교사로서 물어서는 안되는 질문을 머뭇거리며 꺼냈다.
"엄마아빠....사랑하니?"
"아니요.."
부모의 사랑을 부정하는데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교사는 소년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선생님이 도와줄게."
".......왜요?"
선생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서도, 소년은 단지 멍한 시선으로, 왜요? 하고 물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교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소년을 지금의 가정과 분리시킬 생각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상담을 통해 치료라도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긴 통화 끝에 만날 약속을 잡는 것으로 목적의 일부를 달성한 그녀는 우두커니 앉아선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좋은 부모님을 찾아줄게. 너를 사랑해주고 아껴주실 분들을..."
2.교사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는 너무나 쉬웠다. 모두 소년을 포기한 부모 덕분이었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 소년은 새로운 가정을 찾기 위한 절차를 밟아갔다.
상담 차 방문한 소년의 집에서, 엄마 치마폭에 안겨서 눈만 빼꼼 내민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를 보았다. 동그랗게 반짝이는 여자아이의 눈을 보며 교사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그녀에게도 오빠가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장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집과, 땅을 팔았고,
부모의 관심이 집중될수록 장남은 비뚤어지기만 했다.
그녀는 고등학생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고, 월급이 나오면 그마저도 오빠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녀의 눈에 오빠는 가족이 아니었다.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늘, 악마처럼 보였다. 꿈속에서 악마로 변한 오빠한테 밤새 쫓기며 시달리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악몽에서보다 더 끔찍한 오빠의 얼굴과 마주쳐야만 했다.
사춘기가 올 무렵부터, 그녀는 매일 소원을 빌었다.
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주세요.
친구들 부모님처럼 나를 해주는 부모님 곁으로...
하지만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 곁에는 오지 않았다.
결국 혼자 힘으로 일어서야만 했다. 수능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빠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몰래 훔친 아빠의 차를 타고 나갔던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무면허인데다가 음주운전이었다.
"선생님 말씀은, 우리가 나쁜 가족이라는 건가요?"
소년의 어머니가 고상한 말투로 되물었다.
"그런 뜻이 아니고요...."하며 교사는 움찔했지만, 그녀의 미소는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아직 미혼이시죠?"
"네."
"선생님도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보시면 알거예요.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걸...
천사같던 아이들이 자라는 건 순식간이에요. 이 조그마한 몸에 자아가 생기는 거예요."
소년의 어머니가 딸을 꽉 끌어안으면서 교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위에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 속에는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이 찍혀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보다 좀더 젊고 아름다웠고, 남매는 지금보다 어린 모습이었다.
아빠의 허리에밖에 못오는 작은 딸을 뒤에서 끌어안고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아버지의 모습은 더없이 인자해보였고, 그 옆에서 앉아서 웃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현모양처처럼 보였다.
두 사람을 닮은 딸은 뺨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만 봐서는 완벽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있는 소년이 있었다. 그쪽에만 비구름이 낀 것처럼, 소년의 얼굴은 긴 머리칼로 가려져 있었고 그 머리칼 안에서 우중충하게 빛나고 있는 눈동자는 초점없이 텅 비어있었다.
"완벽한 부모가 없는 것처럼 완벽한 자식은 없어요. 저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답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말씀이 옳아요. 제 아들이긴 하지만 저에겐 버거워요. 그 아이한테 맞는 부모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테죠."
"그렇다면....그애를 그냥 포기하시겠단 건가요?"
"내년이면, 또 그후년이면...무서운 속도로 자랄테죠. 그때까지 그애를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요."
".....포기하시겠단 거군요."
소년의 어머니는 부정하지 않았다.
집에서 나와서 넓은 정원을 걸어가는 동안에 교사는 울고 싶었다. 그녀는 넘실넘실 흘러서 넘치려고 하는 눈물을 다스리기 위해서 잠깐 멈춰야했다.
눈물 때문에 뿌옇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뒤뜰로 이어지는 곳에 어린아이 키만한 울타리가 주욱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울타리를 따라 걸어갔다.
그곳에는 축사가 있었다. 큰 규모는 아니었고, 차 한대가 드나들 정도의 크기였다. 교사는 호기심에 그 안을 기웃거렸다. 동물들을 키운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키우지 않는지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하지만 이곳을 만드는데 얼마나 정성들이고 아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마다 화환이 걸려 있었고, 귀여운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병아리, 강아지, 아기 돼지...
동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오리 한마리만 남아, 물그릇에 부리를 파묻고 물을 튀기고 있었다. 오리는 자기를 닮은 노란 병아리 그림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빙글 돌아서서 멀찌감치 가버렸다.
"그건 병아리가 아니라 오리에요."
어느새 나타난 소녀가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래?"
"아빠가 말을 키운다고 했는데...약속했거든요."
"말은 키우기 쉬운 동물이 아니란다."
"그치만 오빠가 다른집으로 이사가면 꼭 사준다고 했어요."
"오빠가 갔으면 좋겠니?"
"오빠는 엄마 말을 안들어서 매일 혼나요. 엄마가 화내는 것도 싫긴 하지만...그래두 오빠가 나빠요."
"왜? 엄마 속상하게 하니까?"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는 소녀의 반질반질한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 잘못이 아니란다. 때론, 그냥 그렇게 되는 것들이 있어. 아마 엄마도..."
그냥, 이유없이 미워하는 거란다.
이 세상엔 이유없이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들이 있단다. 어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부터 사랑하고, 어떤 아이는 미워지게 되는 거야.
그건 너희들 잘못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나빠서야. 네 부모님이 나빠서야, 내 부모님처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엄마도 오빠를 사랑하고 계실거야."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을 보며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교사는 이 아이한테만은 진실을 말해주지 않기로 했다.
오빠가 겪은 끔찍한 학대를 알 필요가 있을까.
"나중에 말을 사게 되면 오빠랑 놀러오세요."
"그래..."
"꼭이에요."
벌써부터 소년이 없는 집을 설계해가고 있는 이 가족은 악마인 걸까. 악마라고 하기에, 저들은 너무나 아름답게 생겼고 사랑스럽고 완벽한 가족같았다. 왜, 저 아이에게만 잔인한 걸까.
교사는 차에 앉아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소년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니? 지루하니까 따라오지 말래두."
"선생님하고 살면 안돼요?"
"응?"
"선생님하고 살고싶어요. 선생님이 엄마처럼 저를 키워주시면 안돼요?"
"그건....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제가 귀찮아요?"
"아니야. 이렇게 잘생기고 씩씩한 왕자님을 왜 귀찮아하겠어."
"그런데 왜 다른데로 보내려고 하세요?"
소년의 시선이 두려워서 교사는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돌렸다.
이 소년이 가엽고, 구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지만 부모가 된다니 상상도 안된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니, 그것도 초등학생을...
신호에 멈췄을 때 교사는 옆자리를 쳐다봤다. 소년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소방차 여러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불이 났나보네."
"아무데도 갈데가 없으면...갈 곳이 없어지면 선생님 집에서 살 수 있나요?"
"너한테 갈 곳이 필요하면 당연히 와도 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정말, 정말로 좋은 분들이니까."
또 한사람한테 버림받는 느낌이 들었던 걸까. 소년은 그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3.소년은 여전히 학교에 나왔다. 그는 여전히 긴 머리칼 안에 숨어서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와 어울리는 사람은 교사 한명 뿐, 선생님들도 그를 슬글슬금 피했다.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티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사는 제자의 개인적인 일에 신중을 기했지만 소문은 음식냄새가 퍼져나가듯 소리없이, 그러나 빠르게 학교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누구의 입이 가벼웠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지나가다가 들었어요.'
'누가 그랬는진 몰라요. 난 그냥 들은대로...'
'걔네 부모가 떠들어댔는지 누가 알아요? 엄한 사람 잡지 마세요.'
누구의 입이 무거웠는지만 밝힐 수 있었다. 교사들의 입을 통해, 아이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학부모들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는 전달되었고 조금씩 변질되어 갔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 안에는 진실과 과장이 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체육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소년은 우르르 무리 지어 들어오는 아이들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는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교사는 창문을 통해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걸음이 느렸기 때문에 소년은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체육 수업을 가르친 선생님이 손을 확성기처럼 만들어서 입에 대고 아이들을 불렀다. 얘들아, 줄넘기 가져가야지, 하는 따위의 부름이었으리라.
막 현관으로 들어가던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소년은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한 아이가 발끈하며 소년의 어깨를 탁, 하고 밀었다.
"야. 돼지. 선생님이 부르시잖아."
"네가 뭔데 잘난척이야?"
"맞아. 돼지 주제에."
순식간에 소년은 포위당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소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서서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돼지. 돼지. 돼지 소년. 큭큭큭."
어느 아이는 웃고 있었고, 어느 아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소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편들어주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교사는 더이상 못보겠는지 창문을 열고, "너희들!"하고 소리쳤다.
"선생님이다."
"도망치자."
소년은 친구들이 놀리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고, 교사는 그게 마음이 아프면서도 답답했다.
괴롭히지 말라고 소리라도 질러보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게 어린 양 처럼 도망도 못치고 당하고만 있지 말라고.
하지만 이번에도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고작 열살, 초등학생이었다. 진실을 알려주고 매서운 충고를 해주기엔 어린 나이였다.
그녀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늦겠다. 들어가봐."
소년은 그녀를 수업 종이칠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수업 종이 치고 그녀가 창가에서 떠난 뒤에야 그도 자리를 떠났다.
느릿느릿 복도를 걸어가는 소년의 머리 위로 스피커에서 나온 멜로디가 울려퍼졌다.
특이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지 과묵하고 소극적인 성격이라고 여겼었다. 그 원인은 부모의 학대와 무관심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교사는 수업을 받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복도에서 쳐다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다.
소년은 모범생처럼 얌전히 앉아서 칠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열심히 장난을 치고 있었다. 소년과 비슷한 아이는 이 반을 통 틀어서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새카만 강물에 둥실 떠올라,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의 주변에만 소리가 차단되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열살 소년 특유의 부산함도 장난기도 사라져 버렸다.
'학교 생활이 문제였었나...'
가족 문제도 문제지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마음앓이를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교사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서 소년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빈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 생각했다. 소년한테 친구를 만들어주자고.
친구 후보 1번은 반에서 가장 친구가 많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명준이었다.
교사는 명준이가 유치원에 다니는 동생을 끔찍이 아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동생이 있어서 그런지 책임감도 강하고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을 도와주는 착한 아이였다. 겉도는 아이에게 소개시켜주기에 적당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는 명준이를 조용히 불렀다.
명준이는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자기를 부르는 선생님의 예쁜 얼굴을 올려다봤다.
"명준이 오늘 바쁘니? 선생님이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네. 괜찮아요."
"그러면...선생님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요?"
"오전에 너희들이 운동장에 있는 걸 봤어."
".....죄송해요."
"아니야. 혼내려는게 아니야."
명준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교사는 명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서 그를 진정시키고 다시 물어봤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모두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러면 우리반이 더 화목해지고 학교 생활이 더 재밌어질 것 같아. 명준이 생각은 어때?"
".......걔두요?"
"그 친구가 싫은 거야?"
"아니요. 싫은 건 아닌데...걔는......."
"괜찮아. 말해봐."
"걔는........무서워요."
"무서워? 왜?"
"걘 사람이 아니래요."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애들이 그랬어요."
"하지만 명준아. 다른 친구를 놀리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아이들이 놀린다고 해서 너도 같이 그러면 되겠니?"
"죄송해요...."
명준이는 선생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명준이가 착한 아이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울리려던 건 아닌데...그녀는 명준이를 꼭 끌어안으며 울음을 달래주었다. 교사는 머뭇대며 한가지 질문을 더 꺼냈다.
"있잖아...너희들 그 애를 왜 돼지라고 부르는 거야?"
"모르셨어요?"
아이는 오히려 되물었다.
상담을 마치자마자 교사는 차로 달려갔다. 급하게 운전대를 잡고 아스팔트에 타이어 자국이 날 정도로 커브를 꺾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초등학생들이 낙엽처럼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문방구 앞에서 그녀의 차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제자를 무심히 지나쳤다. 운전을 배우고 이렇게 신호를 무시하고 속도를 높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도로 위를 아슬아슬 위태롭게 달려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소년의 친부모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끼이익...
그녀는 비뚜름하게 주차한 차에서 용수철 처럼 튀어나왔다. 곧 그림같은 저택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소년의 어머니는 딸과 함께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 옆에선 그녀의 딸이 자기 키 만큼이나 작은 물뿌리개를 들고 있었다. 소녀의 주위로는 새로 심은 꽃들이 꽃잎을 벌리고 햇살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교사를 발견하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는 딸을 자기 뒤로 숨기듯이 돌려 세우고 말했다.
"자꾸 찾아오지 마세요. 설마, 둘째까지 저희에게서 빼앗으실 셈인가요?"
"제가 빼앗았다고요? 어머님께서 놓아버리신거 아니었나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아들을 버린 매정한 엄마라고 손가락질 하려고 오신 거예요?"
"묻고싶은게 있어서 왔어요. 알아야겠어요."
소년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정원과 이어진 창문의 커튼을 모조리 내렸다. 교사는 이대로 돌아가야되는 건가 포기하려고 했지만, 소년의 어머니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작은 쟁반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걸 정원의 야외 테이블에 내려놓고 교사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말씀하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마자 교사는 눈을 빛냈다.
"혹시, 학교에서 별명이 뭔지 아시나요?"
"입이 가벼운 사람들은 어딜가나 있죠.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행을 먹고 사는 괴물 같아요. 정작 자기한테 그런 일이 닥치면 금세 허물어져 버릴 거면서, 남의 일이라고 히히덕대며 좋아하죠. 전에 옆집에 살던 여자의 아들이 우리 애들하고 같은 학교에 다녔어요. 그 여자만 아니었다면....아니, 결국엔 이렇게 됐을 테지만요."
그녀는 아들의 별명이 돼지인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애들 아빠가 어려서 목장에서 자라서 그런지, 애들이 조금 크고나니 동물들을 키우고 싶어했어요.
처음엔 평범하게 강아지로 시작했죠. 그러다가 저렇게 그럴싸한 우리까지 만들더라구요.
그곳에서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키웠어요.
닭과 병아리를 데려다가 키우고, 토끼를 데려오고....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데려온 게 귀여운 새끼 돼지였어요.
덩치 크고 살집 많은 돼지는 아무래도 무서워할 수도 있으니까 아이들 보기 좋으라고 일부러 고르고 골라서 가장 작은 새끼로 데려왔어요."
"그게...왜...?"
집에서 돼지를 키웠다고, 멸시를 담아 돼지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소년을 돼지라 부르는 아이들의 눈과 부모의 눈에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납득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런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즐기는 부자동네에서는 더욱이.
소년의 어머니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평온한 목소리로 교사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그 애가 마지막으로 죽인 동물이에요."
그 순간 그들의 등 뒤로 소방차 한대가 요란하게 지나갔다. 지나간 자리에는 사이렌 소리가 길게 메아리쳤다. 소년의 어머니는 첫번째 소방차가 지나가고 불과 몇 초 뒤에 연이어 뒤따르는 두 대의 또다른 소방차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병아리에서 시작했겠죠. 병아리를 사오면 한두마리씩 사오는게 아니니까. 그 작은 동물이 몇마리쯤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죠. 그 다음엔 우리가 키웠던 강아지였어요. 강아지는 집안에서 키웠기 때문에, 밖에서 키우는 병아리처럼 갑자기 사라지는게 불가능했어요. 그리고... 그 뒤로는 모른 척 할 수가 없게 됐죠."
"그런............"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척 했던 거예요, 우리 둘 다. 특히 남편은 믿고싶지 않아 했죠. 결혼하기 전부터 자긴 아들을 꼭 갖고 싶다고 했거든요. 자기를 쏙 빼닮은 아들을....그 애의 이상한 점들이 혹시라도 닮았을까 무서워했던 거예요. 자기 핏줄에서 유전된 걸까봐."
4."그렇다고 해도...자기 자식이잖아요, 아들이잖아요.”
“작년이었어요. 명절을 친척집에서 보내고 오래 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온집안에 날벌레가 날아다니더군요. 그 다음엔 악취였어요.
온 집 창문을 열어놓고 어디서 냄새가 나는지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2층에서 나는 냄새였어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내 아들의 방문을 열던 그 순간까지만 해도, 군것질거리를 몰래 가져갔다가 썩힌 모양이라고 생각했어요. 침대 밑이었어요. 거기서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어요.
갈색으로 짓물러버린 작은 시체를 끄집어내선 창밖으로 던져버렸어요. 그리곤 방에 병아리를 데려온 걸 혼쭐을 내주려고 돌아섰지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냄새는 더, 더, 더, 심하게 제 발목을 붙들었어요. 난, 그 강아지를 정말 가족처럼 사랑했어요. 우리 애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죠. 믿었어요, 우리 애들은 사랑스러운 애들이었으니까.”
그녀는 격앙된 감정을 다스리는 듯, 먼 곳을 응시했고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구역질을 하는 나를 끌어안고 있었고, 딸애는 강아지 시체를 보고 빽빽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요. 그 애는 그때 뭘 하고 있었는지 아세요? 번뜩거리는 눈알을 굴리면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어요.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데굴데굴 들리는 것 같았어요. 그 흔한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 말이라도, 거짓으로라도 잘못을 빌었다면 그 애를 이해해보려고 했을 거예요.
난 그 애한테 돼지라고 소리쳤어요. 이 돼지새끼, 저리 비켜,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내 눈 앞에서 꺼져버려! 네 어미한테나 가버려! 하고요.
그리곤 그걸 치우느라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애가 보이질 않았어요. 감쪽같이 없어졌죠. 내가 한 말이 있으니까, 남편은 나한테 책임을 떠넘겼고 난 눈물범벅이 돼선 이웃집에 달려가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열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애를 찾으러 뛰어다니기 시작했죠. 그 앨 어디서 발견했는지 아세요?“
“........아니요.”
“돼지 우리였어요. 이제 좀 몸집이 커진 그 가여운 돼지를 죽이곤 그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이웃사람들 모두 그 광경을 목격했죠. 여기저기서 구토를 해댔고, 어떤 사람은 신을 부르짖으며 무릎을 꿇었어요.”
“............그럴 수가........”
“선생님, 그 애가 그렇게 된 건, 그 일을 저지른 건 순전히 내 탓이었을까요? 우리의 핏줄이 잘못된 걸까요? 한가지 확실한 건, 난 그 애를 더 이상 보호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애한테서 내 가족을 지킬 자신이 없었어요.”
아주 긴 침묵이 흘렀다. 교사는 아직까지도 이 소문들이 사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소년은 단지 피해자일 뿐이었다.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다면 소년의 앞날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소년을 낳은 어머니가 진작 놓아버린 희망의 끈을, 그녀는 아직 놓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져서 하늘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붉은 빛 하늘을 불길하다는 듯 올려다 본 소년의 어머니는 찻잔을 달그락 거리며 치우기 시작했다. 교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제 돌아가세요. 진실을 알려드렸으니,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하고 축객령을 내렸다.
교사가 떠나자마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소년의 동생이 정원으로 뛰쳐나와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서로 손을 잡고 뒤뜰로 걸어가는 모녀의 다정한 뒷모습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느게 옳고, 어느게 그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자, 그곳에 서있을 구실도 사라졌다. 그녀는 차로 돌아가 힘없이 차문을 열고 주저앉았다.
구명줄처럼 핸들을 꼭 붙잡고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그때, 드르륵....드르륵....익숙한 진동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울리기야 몇분 전부터 울리고 있었지만 이제서야 자각한 것이었다.
그녀는 여덞통의 부재중 전화가 모두 같은 번호에서 왔다는 걸 확인하고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몇번의 신호음이 들렸고, 낯선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죠?"
"교감님 부부 아시죠?"
교감 부부는 소년을 맡아주기로 약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오후에 약속이 있었다. 교사는 시간을 확인하며,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서
얼른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았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교감님이랑 마지막으로 통화하신 분이라서요."
"그런데요."
"이쪽으로 좀 와주셔야겠는데요."
"거기가 어디죠? 조금 뒤에 약속이 있어서요, 거리가 멀면...."
"만나기로 하신 분이 교감님이신가요?"
"그걸 어떻게?"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경찰서입니다."
경찰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차를 세우고 가물거리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흐려지는 초점을 잡기 위해서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불타오르는 노을...
마치 넘실넘실 춤을 추는 지붕 위의 불길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
"당신, 지금 뉴스 봤어요? 운전중이래도 잠깐 세우고 틀어봐요."
소년의 어머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거실을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옆에선 딸은 인형을 끌어안고 쿠션에 몸을 파묻고 불안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주택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큼지막하게 잡히자, 소년의 어머니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음량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높이고 전화기를 그쪽에 댔다.
"들려요? 들리냐구요. 다 죽었대요, 그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까지!!"
"엄마 소리지르지마...무서워....."
"빨리 집으로 와요."
"엄마아...."
소년의 어머니는 눈을 부릅뜨고 뉴스화면을 쳐다봤다. 딸이 달려와서 품에 안겼지만 그녀에게는 딸을 안아줄 정신마저 없는 듯했다.
그녀는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앵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폭발 당시 집안에는 최 교감 부부와 그 아들이 있었고, 최 교감이 근무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한명이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진화작업이 신속히 이뤄지고 있으며....."
땅거미가 내린 집 주변은 암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많은 유리창들이 오늘따라 섬뜩하게 느껴졌다.
소년의 어머니는 일어나서 창문마다 커튼을 치고 잠그기 시작했다. 1층의 단속을 끝냈다고 생각한 그녀가 2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이었다.
딸아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오....오빠...."하고 누군가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소녀가 보고 있는 곳은 조금 전에 커튼을 친 창문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달려가서 딸을 품에 안으며 뒷걸음질쳤다.
끼이익....
어둠 속에서, 문이 혼자서 끼긱대며 열렸다.
보지 않아도, 확인하지 않아도, 소년의 어머니는 누가 찾아왔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기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지만, 전화기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전화기가 있는 곳과 문 쪽을 힐끔거리며 거리를 쟀고, 딸을 2층 계단에 올려놓고 전화기를 향해 달렸다.
"학교에서 배웠어요. 가족이 있는 집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라면서요."
우뚝.
소년의 어머니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변성기를 거치지 않아 소녀처럼 가늘고 고운 목소리, 그러나 높낮이도, 감정도 품고 있지 않은 나직한 목소리가 집안을 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 이쪽으로 오세요."
공포에 질린 모녀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스쳐갔다.
섬뜩한 빛을 품은 소년의 그림자가 어둠을 등지고 그들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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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 을구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