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의심이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기가 가장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존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인생을 자기가 아는 방법으로 보전하려는 의지였다.
그녀는 자기가 의존해온 틀을 지키려는 어리석은 긍정과
교활한 평화가 어떻게 사람들을 보수적인 이데올로기 안으로 끌어들이며 또한 자신조차 신뢰하지 않는 채로 그것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데 앞장서게 만드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의심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상처받지 않으려면 의심스러운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그 생각은 오랫동안 쥐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손안에서 여지없이 바스러지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언제 또 시동이 꺼질지 알 수 없는 자동차에 실려 흔들리며 말없이 앞만 바라보던 어머니는 불현듯 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갇다댔다. 낯설어진 세계, 그리고 사랑의 상실에 조의를 표한 셈이었다.
시계를 차고 섹스하는 여자들은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언제인지 잊지 않고 있다. 내일을 시작하기에 합당한 장소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믿지 않게 된 것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타자로서의 모든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이사를 가든 어차피 같은 세계 안이고 천국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던 어떤 여름 오후, 스러지는 햇빛 아래 나무의 긴 그림자가 마치 자신의 인생의 퇴락차럼 힘겹게 빛과 모양을 유지하려 애쓰며 바래가던 날, 어머니는 자기 앞에 다가와 있는 상실의 세계를 보아버렸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틀을 지켜야 하고 더이상 동의하지 않게 된 이데올로기에 묵묵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세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두운 극장의 의자에 앉아 모든 것이 흘러가고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고통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전될 것이었다. 하지만 원심분리기 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출되고 있는 부유물은 고통으로 보이는 고독이었다. 그 봄날의 피크닉이 오랜 우기 끝에 찾아온 찬란 뒤에 불길함을 숨겨놓았듯 모든 매혹은 고독의 그림자를 감추고 있었다.
세계는 고통을 실어나른다. 고통은 관계의 고독이고 고독은 개인됨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섞었을 때 어머니의 인생은 비로소 납득할 만한 것이 되었다.
정상이니 최고봉이니 은밀한 신경전을 벌였던 선배 세대와 달리 개인주의자들끼리의 배타적 친밀이라는 묘한 연대를 형성하여 서로를 사이좋게 견제하면서 공존하는 법도 터득하고 있었다.
그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는 간혹 소수라는 사실을 도덕적 우월함으로 삼아 권력적이 되는 인간들이 있었다. 개를 키우는 게 곧바로 생태주의의 실천이 아니듯이 소수라는 것 자체가 곧바로 정당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목하는 것은 다수에 의해 소외된 다양한 관점과 철학에 귀를 기울이고 개인의 고유한 권리를 존중하려는 의도일 뿐 소수라거나 소외된 사람의 의견이라서 무조건 중요한 건 아닌 것이다.
세상에는 '나는 나야'라는 아웃사이더 소수에서 시작하지만
'나는 남과 달라'라는 권력적 소수가 되어버리는 일이 흔했다.
어디에 고여 있던 옛 시간들이 묵은 기억을 담고 다시 흘러드는 것일까
게으름이 필요하지. 술 마시고 놀아야 해. 그런게 다 예열을 하는 과정이거든. 아무것도 안하고 허비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뒤에 집중력이 생겨난다고 보면 돼.
전문가란 한 분야의 정통함을 통해서 세상 전반에 대한 통찰을 갖춰야 옳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분야에만 통하는 전문성을 세상 전반에의 무지에 대한 정통성으로 삼는 게 전문가들이었다.
어머니가 적국에 부역하는 포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이데롤로기의 딜레마 속에 살았다면 아버지는 남의 나라에 태어난 소년이었다. 그곳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하며 그것을 상실이라고 불렀다. 가장 아름다운 매혹을 보아버린 뒤 그들이 보는 모든 것은 상실이라는 이름의 풍경이었다.
약간의 재능. 그게 있으면 죽으라고 안되는데도 포기를 못하거든. 작은 재능이야말로 신의 가장 큰 저주다, 매컬러스라는 여자가 소설은 별로지만 가끔은 맞는 말도 해.
마치 천문학자들이 어느 별에선가 시작되어 우주를 통과하는 동안 그 거리만큼의 과거를 갖게 된 빛을 바라보듯이, 그 빛이 담고 있는 천체와 그보다 더 먼 과거로 존재하는 별의 시간을 보듯이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더이상 아무런 회한도 그리움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까지를 보았던 것이다. 자신은 사라져버린 별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진 것은 완결된 것이며 완결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죽은 것이다.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고독 역시 슷로 의식함으로써 살아 있을 뿐이었다. 이유를 깨달았다거나 시간에 지쳤다거나 하는 명분은 어리석고 공허했다.
어떤 일이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종결되는 것이며 때가 되었다는 말은 그때를 알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내가 잠시 길을 잃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그 꽃을 발견하지 못했겠지.'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며, 운명이란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려 할 때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 실현된다. 때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도망치려 했던 사람으로서, 이 소설이 끝을 맺어 기쁘다.
누군가 말하기를 어떤 언덕에서 바라보면 나무는 없고 자라남만 있으며 강은 없고 흐름만 있으며 춤추는 자는 없고 춤만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