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속에서 인생을 배우다 _ ‘하나의 역사, 70억의 기억’ 라이프 사진전
옷깃 세우고 광화문에 가볼까?
요즘 같은 퇴근 길 날씨에는 발길이 쉬이 집으로 향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왁자하게 술을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요. 음~ 옷깃 세우고 우수에 젖고 싶다고나 할까요?
청량한 초가을 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걷다가 만나게 되는 갤러리, 그곳을 둘러보다 눈이 맞는 가슴 설레는 훈남(아, 너무 감상에 빠졌군요),이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흑백 사진들. 이 가을 저녁, 마음이 헛헛하고 낭만이 그립다면 퇴근을 서둘러 광화문으로 가보세요.
거리만 걸어도 왠지 들뜨게 되는 광화문. 멋진 전시까지 야간 개장을 합니다.
‘거리’와 ‘광장’의 기운을 기분 좋게 들이마신 마신 다음 세종문화회관 1층 전시관에 가면
열심히 일한 당신을 위해 ‘라이프 사진전’이 8시 30분까지 문을 열어두고 있답니다.
36년 창간, ‘라이프’의 사진을 만나다
‘라이프 사진전’이라니 ‘삶’을 테마로 한 대한 사진전인가 헷갈려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1936년 창간한 미국의 포토매거진 ‘라이프(LIFE)’가 소장한 사진 130점을 만날 수 있는 전시랍니다.
빨간색 배경에 흰색의 깔끔한 서체로 ‘LIFE’가 박힌 제호
(혹여나 Lifeguard나 자선단체로 착각하시면 안되요)는 아마 보시면 눈에 익으실 거예요.
‘라이프’지는 ‘타임(Time)’과 ‘포춘(Fortune)’을 창간한 미국 잡지계의 큰손 ‘헨리 루스’에 의해
탄생했는데요. 창간할 때부터 ‘사진’이 중심이 되는 매거진으로 명확히 못 박고 그 명맥을 이어왔답니다.
역사와 시대, 삶을 기록한 잡지 ‘라이프’의 흑백 사진들을 만나보아요.
사실 TV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시절, ‘라이프’에 실린 사진은 생생하게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 되었습니다.
창간 이후 TV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급박하게 돌아간 세계정세를 ‘라이프’만큼
강렬하게 담아내는 매체도 없었지요.
당연히 당시 ‘라이프’의 커버를 장식한다는 것은 모든 사진가들의 자부심이기도 했습니다.
TV에 밀려 폐간의 아픔을 겪은 ‘라이프’는 현재 인터넷으로 부활에 다시 만나고 있는데요.
온갖 화려한 미디어가 창궐하는 시대에 아무래도 전성기만한 임팩트를 가지진 힘들겠지요.
하지만 시대를 담은, 그 순간에만 집중한 ‘사진’만이 지닌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인생을 보기 위해, 세상을 보기 위해(To see life, To see the world)’라는 헨리 루스의 창간사에 발맞춰
전시관으로 들어서보는데요. 흑백사진이 지닌 차분한 흡입력, 그 분위기부터가 가을날과 썩 어울립니다.
시대의 인물, 그들의 대결이 흥미로워라
이번 전시는 ‘People’ ‘Moments’ ‘It’s Life’ 총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만나볼 ‘People’ 섹션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아이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시 구성이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인간 vs 인간’이라는 부제를 붙여 경쟁자였거나 협력자,
혹은 동반자로 엮을 수 있는 인물을 나란히 배치한 것이지요.
* 물레와 같이 있는 마하트마 간디, Margaret Bourke-White, 1946,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 알버트 슈바이쳐, W. Eugene Smith, 1954,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윈스턴 처칠과 아돌프 히틀러, 마티스와 피카소, 간디와 체게바라, 슈바이처와 채플린을 함께 짝지은 센스란! 무엇보다 ‘라이프’의 사진은 잡지 속에 실렸던 덕에 각 사진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덧붙여 있습니다 도슨트나 오디오 가이드 없이도 충분해 보이는 친절한 전시입니다.
* 백범 김구, Alfred Eisenstaedt, 1946,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 김구선생의 장례식 풍경, Carl Mydans, 1949,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한편, 이방인의 시각으로 바라 본 대한민국은 낯설고 또 반갑기도 한데요.
백범 김구 선생의 검버섯 피고 주름 가득한 얼굴과 그가 서거한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앞뜰 풍경을 담은 사진은 뭔지 모를 울컥함을 전합니다.
서거를 전한 기사 제목이‘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라고 하네요.
참, 저는 개인적으로 사진이나 그림 전시를 보면 소장하고 싶은 작품 하나씩을 꼭 하나씩 꼽는데요.
이번에는 1951년, 신인 배우 제임스 딘을 포착한 사진으로 선정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발길이 10초 더 머물더라고요. C-: 여러분도 자신만의 베스트 컷을 꼽아보세요.
작품을 더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된답니다.
전쟁, 그 기록의 시선마저 아프다
두 번째 섹션인 ‘Moments’에서는 ‘역사에 기억될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섹션은 마음이 아릿합니다. 36년 ‘라이프’가 창간되어 72년 폐간될 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이 치러졌고, 그 생생한 현장을 ‘라이프’가 담았으니까요.
‘전쟁잡지를 만들지 않겠다’라고 말한 헨리 루스의 다짐과는 달리 세상은
전쟁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공유하는 것도 마음 아프지만 전쟁의 참상을 포착해내며 ‘혹여 이 고통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사진작가의 고뇌도 함께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록이 있어 역사가 더 생생하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전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은 저로서는(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마찬가지 일듯 해요)
한국전쟁에 특별한 감흥이 없었는데요.
단 몇 장의 사진이 가슴을 울리고, 그 덕에 한국전쟁이 몇 줄의 글로 넘겨버리는 역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야할 역사라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으니 말이지요.
* 전장으로 가기 전 연인과의 작별 키스, Alfred Eisenstaedt, 1944,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 수병의 키스, Alfred Eisenstaedt, 1945,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전장으로 떠나기 전의 키스와 종전 소식 후의 키스를 나란히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특히 오며가며 한번쯤 보았을 유명한 사진, ‘수병의 키스’에 대한 뒷이야기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터라
더욱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이 둘이 연인인줄 알았건만, 사실은 종전을 알리는 소식을 들은 미 해병이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길을 지나던 간호사에게 키스를 한 장면을 기록한 사진이라고 하네요. 정말 절묘한 순간의 기록이지요.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참 소박하게
마지막 ‘It’s Life’ 섹션은 ‘이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앞선 두 섹션의 사진에 비하면 다소 심심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 공간이 있어 ‘라이프’가 더 돋보이는 듯 했습니다. 사실 전시장 입구에 프린트된 ‘역사에 기록될 기념비적인 사진부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평범한 일상까지’라는 말이 퍽 마음에 들었거든요.
작가 스스로도 고민했듯 자극으로 버무려진 사진이 아니라 잡지의 이름 그대로 ‘삶’을 기록하는 사진이
기본이 되어야 그 위의 갖가지 변주들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진은 평범한 일상마저 특별한 하루로 변신시키는 마법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 낙원으로 가는 길, W. Eugene Smith, 1953, (c) The Picture Collection Inc.
전시는 ‘라이프’를 대표하는 작가인 유진 스미스의 ‘낙원으로 가는 길’이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종전 기자로서의 후유증을 앓던 그는 2년 동안 사진을 찍지 못하다 다시금 사진기를 들고
이 사진을 찍습니다.
어두운 덤불에서 빛을 향해 걸어가는 자신의 아이.
사진전의 여운을 더욱 길게 남겨주는 신의 한 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사진전을 다 둘러보고 나니 두툼한 책 한권을 읽은 느낌입니다.
역사서이기도 하고, 위인전이기도 하고, 전쟁리포트에 연애 소설, 여기에 시 한 수까지 읽은 기분입니다.
어쩌다보니 사진의 미학보다 이야기에 더 빠져든 전시가 되었는데요.
흑백사진의 강렬한 울림은 여전하니 이만하면 뿌듯한 관람입니다.
사진이 아니라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라이프 사진전’. 이 가을날 분위기 있게 만나보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