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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설의 진짜 의미

마수드308 |2013.10.19 15:37
조회 191 |추천 2

뭐 일단 들어가기 전에 몇가지 전제를 밝혀 두자.

 

1. 문서설의 경우 본인이 지지하는 설은 아니지만, 반 이상의 의미는 있다고 본다.

참고로 본인이 문서설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언어학적인 문제 때문이다.

 

2. 직접 기록설은 이미 유대교가 폐지한 설이다. 따라서 의미가 없다.

유대교의 설명에 의하면 구전의 토라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토라를 기록하게 된 이유는 구전으로 암송되던 토라의 단어 수가 60만 단어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그 이전까지는 사실 기록이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서 모세보다 훨씬 후대에 적혀진 것이라는 점이 유대교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이 두가지 전제를 놓고 보자.

 

1. 문서설의 반증: 사실은 방어용 가설.

 

우리가 하나 명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즉, 문서설이 왜 하필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많이 인용되었는가 하는 부분인데, 사실 이건 엄청 웃기는 경우지만,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은 기독교를 긍정하면서 기존 관점을 부인해야 하는 입장" 이기 때문이다.

 

즉, 개보수를 위주로 하는 수정주의적 관점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반증을 보자. 먼저 문서설의 가장 오랜 J문서의 경우는 기원전 10세기를 주장하고 이후 조금씩 연대를 달리하여 최종적으로 기원전 4세기 문서 까지를 합쳐서 문서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4문서설이 가장 범용한 해석인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바로 히브리어의 문제이다.

 

기원전 10세기라면, 페니키아 문자를 받아들인 팔레스타인인들이 쓰던 언어가 히브리어로 차용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할수 있는데, 사실 히브리어는 하나의 방언(Dialect)로 볼수 있다. 허나 이 문형으로는 경전을 적을수가 없다는 것이 패착이다.

 

토라의 경우 급조되어 그냥 말만 받아 적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그런 형태의 계산성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문어체를 구성하는 언어적 형태가 일반적인 구어체 히브리어와는 다르고 다른 것과도 차이가 있다는 점, 즉 철저히 경전 제작용으로 생각된 언어라는 것이 바로 언어학자들의 분석이며, 때문에 비블리컬 헤브류라는 경전 기록을 위한 히브리어가 따로 나왔다.

 

기원전 4세기에 말이지. -_-;;

 

그렇다면 답이 되는 것은 뭐일까? 이 이전에는 문서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바로 포인트이다. ㅋ 즉, 신의 말을 일필휘지로 적어 내린 것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상상의 산물인 거고,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과 종교적인 합의를 통해서 문서의 편집본을 선정했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여기에 4문서설의 의미가 있다. 즉, 같은 기원전 4세기에 적어졌어도 네가지 기록 양식으로 적혀졌을 것이며, 각 문어체가 특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문서들의 조합에 의한 4문서는 "문서를 기록했던 네 파벌의 발상"을 증명할수는 있어도 "그 문서가 문서설이 주장하는 연대에 기록되었음을 증명할수는 없는" 함정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ㅉㅉㅉ

 

즉, 대부분 문서설을 통해 경전 기록 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이런 방어적 관점에서 기인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참 편리할 것이지만, 실제 역사는 그리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거지. ㅉㅉㅉ

 

 

2. 유대교의 주장: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

 

이런 상황이라면, 그 원전 작성자인 유대교인들은 뭐라고 하는지 보자. 일단 유대교의 주장은 기원전 5세기 경에 토라가 쓰여졌다는 주장과 거의 유사하다. 왜냐하면, 바빌론 유수 이후에 이 토라를 근거로 해서 미쉬나가 성립되었다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고, 이런 미쉬나(율법/실정법으로 종교적 율령의 기능을 함)의 성립에 대해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토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적으로 보면 이 주장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

 

바로 언어체계의 개발에 대한 문제인데, 일반적으로 이 언어체계의 개발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고..비블리컬 헤브류의 구성을 볼때 여러 방언들이 합쳐진 언어들에 대해 통합된 기록양식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포인트인데, 바빌론 유수 이후 100년도 안된 기간안에 이것을 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게다가 이 시절부터는 주해경전들, 즉 탈무드의 근간이 되는 미드라쉬나 게바라, 혹은 미쉬나와 보조를 맞춰야 했으며, 이중 미쉬나는 경전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랍비닉 헤브류라고 불리우는 미쉬나익 헤브류가 나오게 되는데, 아슈리 알파벳이라고 불리우는 특이한 캘러그라피 형식의 문서로 기록되었으며, 문법적으로 상당히 차이를 가지는 표현이 사용되어 차이점이 생긴다.

 

즉, 개신교 떨거지들이 가끔 주장하는 쿰란 사본과의 대조의 경우, 내용은 대충 비슷한데 디테일은 다 다른 형태로 기록된 것이 상당수 있다. 이걸 같다고 주장하는 사기가 기록언어의 차이를 모른다는 건데, 마소라 텍스트의 경우는 사실 이 미슈나익 헤브류를 근간으로 해서 써진 문서이기 때문에 표현이나 문어체, 세부사항이 차이가 있다.

 

달리 말하면, 4세기까지는 기록의 원형틀을 만들기 위한 전승과 사료 수집을 통해서 기록성을 보강하는 경우였고, 그 이전에는 랍비들끼리 박터지게 싸워 가면서 서로의 기록 정당성을 주장했던 것이라고 보여지는데, 바로 이것이 그 4문서설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볼수 있다.

 

즉, 반대로 유대교측 사료를 보면 기원전 7세기 저작설의 경우는 신빙성이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록한 놈이 누군가 하는 점이다.

 

 

하여, 결론적으로 보면 기원전 2세기 이후에도 이 문서들에 대한 수정 보완은 계속 이뤄졌을 것이라는 점이고, 타나크가 얌니아 회의에서 정경으로 묶이게 된 시점인 1세기 말엽까지도 이런 논쟁들은 사소하게 계속 되었을 것이다.

 

사실, 여기서 엄청난 아이러니가 있는데, 실은 그 타나크 성립을 두고 걔들끼리 얼마나 싸움질을 했을까에 대한 반증이 바로 다니엘서에 일어난다. 다니엘서는 긴 버전이 있고 짧은 버전이 있는 등 3~4개의 버전으로 나뉘는데 어떤 것은 히브리어 기록물인데 서로 다른 버전이고 다른 것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는등 제각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실 다니엘서의 경우는 얌니아 회의 전까지 경전의 여러 파생상태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반면적으로 증거하는 사료가 되며, 말인즉슨 1세기 말엽까지 정경이라고 우기는 경전에 대한 기준 자체는 딱히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증명된다는 소리다.

 

단, 타나크 이전까지의 상태는 문서 모음이 하나의 형식이 아니어서 토라를 공통과목으로 하고 케투빔과 네빔을 선택과목 정도로 생각하는 학파주의가 있었던 것으로 모든 유대교파가 모든 타나크의 문서를 경전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즉, 주요도가 떨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여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 연구 분야에 대해서만 집중했던 것으로 볼수 있다. 결국 상대파의 경전을 끼워 넣기 하려면 그만큼 문서 위격에 대한 인증이 필요했고 그것이 전승으로 남거나 다른 격의 문헌이 될지, 아니면 타나크 안에 포함이 될지에 대해서는 서로간에 합의가 아예 안된 상태였었다고 볼수 있다는 점이다. ㅋ 즉, 실상적으로 따지면 사실 모든 문서가 가치가 있는 격이고 위경과 외경 역시 가치가 떨어진다고 볼수는 없는 문서였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내릴수있는 결론이라는 점이다. 또한 반면적으로 위외경 문서의 경우는 일부 분파의 독자 기록 형태였기 때문이라는 결론 도출도 가능하고 말이지... ㅋ

 

즉, 토라를 비롯한 네빔 케투빔에 적용된 문서설 문제들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즉, 4문서설이 있다는 것은 사실상 네개 분파의 기록 양식이 도입되었다는 점을 증명하나, 사실 경전의 기록연대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관점에서 주장되는 것이라는 점이 명확한 것이고.. 따라서 "안티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서설보다도 훨씬 후대의 기록 연대가 합리적이며 문서설의 일부 가설은 취합하되, 합리적인 입장에서 연대가설은 지지할수 없게 되는 것이 현실이지. ㅉㅉㅉ

 

허나, 이 경우는 기독교인들과의 진화론 논쟁과 같은 양상을 보여준다.

 

왜? 결론적으로 문서설의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모세가 직접 기록했다는 걔네들의 개드립이 맞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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