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행정부와 새누리당, 더 정확하게는 서남수 교육부장관과 박승춘 보훈처장, 그리고 뉴라이트교과서포럼에 의해 조직된 한국현대사학회가 찬양·칭송·미화하기 위해 왜곡·날조·은폐시키려 하는 18년 장기집권 박정희 독재권력의 어두운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김재홍 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 교수의 최신 저서《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저자의 직접적 경험과 치밀한 취재를 통해 친일파의 후예, 군사정변 세력이 조작한 잘못된 신화와 삐뚤어진 우상을 깨고 우리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 나서기 위해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다!
● 세 번째 변신, 남한군 장교에서 남로당 프락치로
박정희의 세번째 변시는 광복군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남한군 장교가 된 후 극좌 공산주의 세력인 남로당의 군사부 프락치가 된 일이다. 박정희의 형을 비롯한 가족들은 그가 안정적인 교사직을 버리고 출세한답시고 만주로 건너갔다가 거지꼴로 돌아오자 그에게서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둘째 형 박상희가 그에게 친일의 죄를 씻으라며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했다. 김종필의 장인이기도 한 박상희는 1946년 10월 구미지역에서 농민봉기를 주도하다가 경찰 진압대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 후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남로당의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이 남한군 장교가 된 박정희를 유심히 관찰했다. 박정희가 형의 사망소식을 듣고 고향에 가보니 이재복이 유족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이재복은 고마워하는 박정희에게 마르크스·앵겔스가 펴낸《공산주의 선언》번역본을 주면서 남로당 가입을 권유했다.
1946년 10월 당시만 해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중앙인민공화국 등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계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좌익세력의 집권이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남한군 장교였지만 주저하지 않고 집권 가능성이 큰 남로당에 입당했다. 그렇게 군내 남로당 프락치가 된 것이다.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은 변신의 차원이 아닌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당시 남한은 단독정부 수립의 하나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시켰으며 우익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그 지도이념이었다. 국방경비대의 주요 임무는 좌익계열이 사주한 폭동이나 파업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런 국방경비대의 장교가 공산주의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반역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시 국방경비대에 침투한 남로당 조직은 1948년 한 해에만 4·3제주민란, 여순군사반란, 대구군사반란 등 일련의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여순군사반란이 일어난 후 군내 남로당 프락치 검거와 숙군 선풍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때 검거된 피고인들의 공통 죄목은 “1946년 7월부터 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내에 비필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하였다는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 박정희의 죄과는 ‘군병력 제공죄’로 적시되었다. 반란 기도 혐의로 기소된 박정희는 1948년 12월 20일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형을 언도받았으나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도 예의 눈부신 변신술을 발휘하여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남로당 비밀조직원의 명단을 몽땅 넘기고 그 대가로 혼자만 풀려난 것이다. 그 후 국방경비대는 1천여명의 장교와 하사관을 투옥하거나 처형하는 등 대대적인 숙군(肅軍) 조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리스트’가 요긴하게 사용되어 남로당 비밀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는 이렇듯 출세를 위해서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조국이든 동료든 배신을 밥 먹듯이 했다.
남로당 프락치 사건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6·25동란이 발발하자 현역 소령으로 복귀했으며, 이후부터는 강경한 좌익 척결주의자가 됐다. 그의 좌익 척결은 자신의 전력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더욱 강경으로 치달았다.
● 네 번째 변신, 남로당원에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로
♣ ‘밀사’ 황태성의 오판과 슬픈 종말
5·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8월 말경, 북한은 상업성 부상까지 지낸 거물 황태성을 남한으로 밀파했다. 그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경북도당 조직부장 출신으로 1946년 10월 대구 민중봉기를 주동하다가 월북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박정희의 형이며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에게 중매까지 성사시킨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이었다. 박정희의 형수이며 김종필의 장모인 조 씨 쪽과도 물론 잘 아는 관계였다.
박정희는 10년 연상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사상운동을 해온 인텔리 황태성에게 수시로 인생상담을 받았다. 황태성도 어렸을 적부터 다부지고 영리한 박정희를 친구 동생 이상으로 아끼고 정겹게 대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국가수반에 오르자 북한의 대남공작부서와 황태성이 뭔가 ‘대협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오판했을 가능성은 그만큼 충분했다.
그래서 황태성은 간첩이기보다는 남북 고위당국자 간에 직접 소통하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는 ‘밀사’일 수도 있었다. 간첩은 극형을 면하기 어렵지만 밀사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것이 다시 따져보아야 할 대목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황태성도 결국 반공법상의 간첩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박정희의 가족사에서 매우 가까웠던 그도 당시 쿠데타정권의 좌익척결 이데올로기에 먹이가 되고 만 것이다.
♣ “남한 실권자가 된 박정희 만나 평화통일 설득하겠다”
1961년 5·16쿠데타 집단이 정권 장악에 성공하자 북한의 대남 정보공작기관도 아연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일단 남한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 대북정책기조가 장면 행정부에 비해 강경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도영을 제치고 실권자가 된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신상명세를 보고 그들은 다시 한 번 긴장했다. 옛 남로당의 남조선국방경비대 프락치 출신이 아닌가? 대남공작 총수격인 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겸 연락국장 이효순은 박정희에 대한 인적 정보자료를 총동원시켰다.
˝대구 구미 출신, 일제강점기에 소학교 교사, 만주국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만주국군 소대장, 광복군 합류, 남조선국방경비대 장교로 남로당 지하조직책, 형 박상희도 남로당 조직원으로 1946년 10월 영남지방 민중봉기 때에 구미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진압경찰에 피살.˝
그들이 결정적으로 놀란 것은 박정희가 남로당 조선국방경비대 지하조직원으로 입당할 때 보증인이 당시 북한 정권의 고위간부였다는 사실이다. 전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 박정희와 매우 깊은 인연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북한의 대남공작 총수 이효순은 무릎을 쳤다. 박정희가 전향하면서 남로당의 군내 지하조직에 막대한 희생을 준 장본인이지만 그래도 이용할 수 있는 끈은 충분히 된다고 판단했다. 황태성이 박정희의 형 박상희와 친구며 동지였다는 보고 자료도 남아 있다.
황태성이라면 확실한 사회주의자 가족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영남지방 좌익계열의 중심인물이었다. 큰아들 황경옥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사회주의자로 1949년 대구 지하항쟁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처형되었다. 차남 황기옥은 세브란스 의대 재학 중 월북해 평양 의대를 졸업했다.
이효순은 수상 김일성에게 황태성과 새로이 남한 실권자가 된 박정희의 인연을 소상히 보고했다. 이효순은 얼마 전 남한의 영관급을 단장으로 한 장교단이 서해의 북한 구역 용매도에 들어와 비밀접촉을 요청하고 돌아간 일이 있음을 밝혔다. 의도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 남한 측이 뭔가 대화를 시도하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김일성은 남로당 출신 중에서 남한의 집권세력과 인연이 닿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지금 남반부 실권자가 된 박정희를 어렸을 때 지도했던 동무가 황태성 전 무역성 부상입네다. 박정희의 형과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래 지금 황태성 동지는 무얼 하고 있디요?”
“무역성 부상을 하다가 몸이 안 좋아서 1955년 9월에 퇴직하고 그 후 죽 요양 중입네다. 폐가 안 좋아서 한 쪽 것을 떼어내는 수술을 한 모양입네다.”
“그래 갖고야 어디 어려운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본인이 의지만 있으면야 뭐… 워낙 남반부에 객관적 여건이 좋은 동무입네다. 지금도 거기 친척이 있고 옛날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꽤 있고요.”
이효순은 지금의 남한 정권을 볼 때 황태성처럼 안성맞춤인 자원은 천우신조라고 생각했다. 다만 황태성의 건강상태가 걱정되긴 했다. 김일성과 이효순은 황태성을 불러 면담하기로 했다.
황태성은 김일성과 이효순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사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서겠다고 열정을 보였다.
“민족의 통일을 앞당길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제가 가서 인연이 있는 그 사람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수상 동지의 뜻을 박정희에게 전하고 대타협을 이끌어내면 평화통일로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같은 민족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협력하면서 평화통일을 하루빨리 이룩하자고 설득하겠습니다.”
황태성은 경북 상주 태생으로 일제 치하에서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다닌 인텔리였다. 제일고보 4학년 때 항일동맹휴학을 주동해 퇴학처분을 받았고 연희전문에서도 2학년 때 퇴학으로 쫓겨났다. 일제 치하에서 내내 항일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다.
그는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이던 신간회(新幹會)의 김천지역 책임자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의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돼 2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해방 후엔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 영남지방 좌익계열의 중심인물이었다. 1946년 10월 대구지방 민중봉기를 주도하다가 경찰의 검거를 피해 지하로 숨었다가 1년 뒤 월북했다. 이때 고향 친구이자 동지인 박정희의 둘째 형 박상희는 진압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
황태성은 일찍이 친구 박상희에게 자신의 여동생의 친구로 옆집에 사는 신여성 조 씨를 중매해서 결혼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조 씨는 황태성의 여동생과 함께 일제강점기 여성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의 회원이었다. 박상희는 황태성의 말만 듣고 맞선도 보지 않은 채 결혼을 승낙할 만큼 서로 신뢰하는 사이였다.
▶ 김재홍 著,『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동굴’ 속의 권력 ‘더러운 전쟁’」, (株)책으로보는세상 編, 2012년 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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