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화감.
“오랜만에 바다로 놀러오니까 딱 좋다, 그치?”
“응! 바람도 산들산들 시원하고……. 딱 좋네.”
낚시를 좋아하는 대식오빠의 권유에 못 이겨 오게 된 여행.
1박2일 섬 여행을 가자고 하는 저의가 의심스러웠지만, 이제 만난 지 100일도 넘었고 오빠도 나름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아서 썩 내키지 않는 척 승낙했다.
그리고 막상 와보니 섬 경관도 좋고 날씨도 좋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청춘남녀 둘이서 여행왔당가? 참 보기 좋네잉…….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는디…….”
어촌 사람들의 감회어린 시선, 다 안다는 능글맞은 시선을 받으면서 부두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다낚시에 필요한 낚싯배 한척을 빌렸다. 잘 빗어 넘긴 머리, 쌍꺼풀 진 눈, 이마에 자리 잡은 일자 주름, 성기게 엮은 밀짚모자까지.
인상 좋은 할아버지 한분이 배 운전을 해주시고, 낚시도 도와주신다고 하셨다.
내심 둘이 로맨틱하게 있길 기대했는데, 오빠는 벌써부터 낚시 생각에 희희낙락이다.
자기를 ‘노씨’로 부르면 된다 하신 할아버지가 어서 올라오라며 독촉했다.
“아따 나도 간만에 낚시좀 해야 쓰겄네잉……. 자……. 짐은 다 실었고, 싸게싸게 옥돔이 잘 잡히는 곳으로 가장께”
대식오빠가 바다에 시선을 빼앗긴 채 미끼 준비를 하는 동안, 난 뱃전 주위를 살펴봤다.
그런데,
지나치게 깨끗했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배를 급히 청소한 것처럼,
뱃전에 으레 널려있을 어망 조각들도 하나 없이, 낚시용품들이 구색을 갖춰서 각자 위치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다.
예약하고 온 게 아닌데 이렇게 준비가 잘 되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지저분한 것보단 깨끗한 게 낫지. 괜한 걱정 할 필요는 없다 싶어서 웃어넘겼다.
“재연아! 이거 봐봐! 오빠가 낚은 거라니까? 좋았어! 오늘은 회로 배 터지게 먹자!”
노씨 할아버지의 말대로 그곳은 정말 옥돔이 잘 잡혔다.
낚시를 던지는 대로 올라오는 옥돔의 향연에 대식오빠는 나는 자연인이라며 기고만장, 빨리 날 칭찬해 라는 눈빛을 쏘아댔다.
오빠가 낚시 하는걸 난 별로 안 좋아해서, 이번 기회에 ‘잘 하지도 못하는 낚시 그만하고 이제 데이트 합시다! ‘ 라며 핀잔을 주려했지만, 결과가 저렇게 나와 버려서 맘에도 없는 칭찬을 하게 됐다.
“평소엔 잘 못하는 것 같더니만……. 오빤 바다낚시 체질인가 봐. 오늘 저녁 기대할게!”
그러던 도중 조종석에서 타기를 잡고 계시던 노씨 할아버지가 안에서 뭔가를 들고 나왔다.
“우리 마을이야 예전부터 소금이 유명한디……. 배도 아주 달고 맛있제잉. 꼴랑거리는 배 위에 있느라 속도 거북하고 목도 마를것인디, 이 배즙좀 마셔보랑께”
마침 목도 말랐는데 이게 연륜인가 싶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잔을 건네받았는데,
두 잔밖에 없었다.
혹시나 먼저 드셨나 해서 선실 안을 흘끔 들여다봤지만 다른 잔도, 남아있는 배즙도 보이지 않았다.
“저희만 마시면 죄송하죠, 남는 잔 있어요? 조금씩 덜어서 같이 마셔요.”
“오빠 말이 맞아요. 운전해주시느라 수고하시는데 우리만 마시면 미안하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따를만한 잔을 찾고있는 우리에게 노 씨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댁들이야 잘 모르겄제……. 우덜이 여서 음료수를 사먹겠능가 과자를 사먹겠능가? 여흥거리도 없고 그냥 일하면서 놀고 그냥 나는 대로 캐서 먹고 그래 사는거제……. 나는 평소에도 배즙 많이 먹응께, 싸게싸게 먹어부러야.”
도시랑 시골은 그렇게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조금이나마 사라져서,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말끔히 비우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2. 짐승과 인간의 차이.
<1>
눈 주위를 불로 지진 것 같고, 눈동자를 바늘로 찌르는 감각.
온몸을 짓누르는 무기력함과 머리가 울리는 둔중한 통증에 점점 정신이 돌아왔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아니, 눈을 떴는데 보이지 않는다.
눈을 뜬 순간 누군가 눈동자에 입김을 강하게 분 것 같은 섬뜩한 감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아우 우헤 오아?”
아니 이게 뭐야, 라고 말하려했다.
하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울부짖음.
보이지 않는 눈, 나오지 않는 말.
떠듬거리는 손으로 온몸을 더듬어 내 몸을 살펴봤다.
머리엔 거친 천이 눈 주위로 둘둘 감겨있었고,
입었던 옷은 그대로, 몸 어디에도 쓸리거나 다친 생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배즙을 마시고 난 후에 정신을 잃었었다.
거기에 뭔가 들어있었겠지. 수면제 같은,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반응하는 수면제는 처방전이 필요할 텐데? 대식오빠는 어디로 있지? 여긴 어디고? 노씨 할아버지
가 꾸민 건가?
어딘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상상은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들 중 최악의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된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끝으로 치닫는 상상을 붙잡다 내가 미치기 전에.
<2>
몸을 짓누르던 무기력감과 고통은 거의 다 사라졌다. 하지만, 감각은 돌아오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 난 내 몸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눈 주위를 감고 있던 거친 천을 걷어내고 만져본 내 눈 주위는 화상을 입은 듯 짓물러있었고, 그 주위는 군데군데 수포가 일어나있었다. 이게 다 나으면 눈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내가 지금 시력을 잃게 된 원인인 것 같았다.
왜 눈이 안보이게 됐는지, 일단 그 이유를 아주 조금을 알게 됐지만 그로 인해 생긴 궁금증은 내 머리를 다시금 터질 것 같게 만들었기에, 다시금 궁금증을 억누르고 내 몸을 살펴봤다.
정신을 잃기 전에도 몸을 더듬어봤지만 분명 입에 뭘 물려 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말이 나오지 않았지. 하고 생각하던 와중에, 입안에의 이물감을 느꼈다.
아니 그건 이물감이 아닌,
공허감.
내 입에 당연히 있어야할 내 ‘혀’ 가.
내 혀가 느낌이 이상했다.
잘려나갔다.
어금니 앞쪽부터, 설소대와 혀끝까지. 입안 어디에서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 어어 해애……. 오아! 어이이어…….”
어떻게 해, 오빠 어디 있어. 라는 말은 내 머릿속에만 맴돌았고, 난 다시 말이 되지 못한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철컥, 딸깍. 문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3>
“약은 잘 듣던가요?”
“누구 약인디 안듣겄소잉, 먹자마자 허벌나게 자버리는디 잠꼬대까지 하더랑께요. 저기 개쌍도놈들이라도 다 들어불제라……. 아따, 지소장님이 오신 뒤로 얼마나 민주적으로 바뀌었능가 나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당께요.”
들려오는 목소리는 두 명, 한명은 젊은 목소리, 무덤덤한 서울말투를 썼다. 그리고 다른 한사람.
‘노씨 할아버지…….’
수만 가지 상상을 하면서 도출해낸 이 사건의 원흉, 노씨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다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력은 빙초산을 이용해서 없앴습니다. 명암은 구분할 수 있겠지만, 사물식별은 무리고요. 외견적 흉터는 자연 치유되면 겉으로는 표시가 안 날겁니다, 물론 시력을 잃었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면 눈동자가 풀리겠지만요. 그리고 혀는 반을 절제했고, 봉합은 다 해놨습니다. 하지만 발성기관이 남아있으니 짖을 수는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주세요”
“남도의 새콤달콤한 음식엔 역시 빙초산이 안 들어가면 섭하제잉……. 지소장님도 남도사람 다 되부렀당께? 그런디……. 목을 못 쓰게 만들어불면 되제, 뭣한다고 혀를 잘랐당가?”
“그전에 혀를 깨물어서 자살한 경우가 있었잖아요, 경험이 있으면 바꿔나가야죠. 사람 의지가 참 간사해서, 혼자 숨을 참는 걸로는, 자기 목 조르는 걸로는, 절대 자살할 수가 없거든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그렇게 했어요. 그러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 해야죠.”
“KIA~ 역시 배운 사람이라 다르네잉... 뭐 잘 알겄수다. 그전에 있던 색시들처럼 관리 잘 할텡께 지소장님도 가끔 오셔서 몸 풀고 그러쇼잉”
“나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 거 알잖아요? 그냥 처분할 때 되면 연락해줘요, 난 그거면 되니까. 거기 아가씨? 고생이어도 시간 지나면 나아지니까 나중에 봐요.”
내 시력을 앗아가고, 내 혀를 잘라간 그 사람이 나가고, 방 안에는 노씨 할아버지와 나만 남았다.
“색시? 안자고 있는 것 다 안당께? 이 상황에 잠이 오면 그거야말로 참 일꾼 아니당가? 우덜은 색시한테 많은 것 안바란당께. 그저 잘 먹고 잘 자면 그것으로 충분하당께.”
“혹시나 말여……. 도망가려 생각할 수도 있는디, 안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여……. 문 열쇠는 나만 가지고 있고, 창문은 열어놓을거지만 어린애도 머리만 간신히 디밀정도밖에 안됭께 색시는 응딩이부터 걸려서 못나간단 말이지비……. 창문 열려있으니까 소리 질러서 다른 사람 부르려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디, 이 주위 사람들은 다 한 가족 한 마음이니께 크게 소용은 없당께. 글고, 우리 집 개는 말여, 얼마나 나 말을 잘 듣는가 집안에서 짖는 소리 나면 같이 짖게 교육시켜부렀어. 개소리 나면 색시 방부터 먼저 찾아가볼것인디, 탈출하려는 시도가 보였다 하면……. 그땐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겄어. 알겄능가?”
“아아 혀가 잘려서 말을 못하니께 얼추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나가본당께. 밥은 제때 되면 넣어줄건디 시계를 못보니께 내가 주는 시간이 대충 밥시간인지 알드라고잉”
딸깍, 철컥.
차라리 미칠걸 그랬다. 누구도 오지 않고, 버려져서. 미쳐서 굶어 죽는 게 행복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은 너무나도, 뼈저리게도 가혹했다.
<4>
하루에 세 번, 식사가 들어온다. 된장국과 밥과 반찬이 하나가 된,
개밥.
그나마 밖에서 햇볕을 쬐는 개보다 나은 점은 수저가 있다는 걸까.
세 번 밥을 먹으면 하루가 지났구나 하며 한숨을 쉬는 것.
그게 내 하루 일과가 되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
방문은 잠겨있고, 편의는 점점 커져간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더듬어서 기억한 이 방의 한 구석에는 일반 요강보다는 약간 커다란 요강이 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망설이는 건,
이걸 누가 치우지? 창밖으로 던질까? 저 크기로는 밖으로 못 나가는데.
그런 고민을 하는 날 비웃기라도 하듯, 내 배는 어서 빨리 탈분하라며 날 재촉한다.
그러길 수차례.
내 인내심은 생리적 한계를 이기지 못했고, 난 그 요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몸에서 나온 그것의 혐오감에 몸서리치며 난 밖을 향해 울부짖었다.
‘이걸 처리해주세요’ 라는 뜻을 담아서.
먹고,
자고,
싸는.
인간이 아닌, 생물로서의 생리적 욕구를 모조리 관리 당하면서.
난, 짐승이 되었다.
3. 톱니바퀴.
<1>
눈가에 수포도 다 아물고, 스스로 몸이 다 나았다고 생각되던 날, 그들이 나를 데려온 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내가 공부한 지식, 내 생각과 의지는 그들에게 전혀 필요치 않았다. 그저 그들이 내게서 필요했던 건 내 몸.
노씨 할아버지를 필두로, 코를 후벼 파는 홀아비냄새를 풍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거쳐 갔다.
외국인들을 데려오려고 했지만 오지 않았다 했다.
그전에 데려온 색시들은 몸이 성치 않게되서 별로였다고 했다.
색시가 이런 데까지 와서 고생하지만, 그래도 색시가 있어서 우리에겐 참 복이라며,
그들은 밤 낮 할 것 없이 나를 능욕했다.
낚싯배를 타던 날 노씨 할아버지가 이야기했던 게 이런 뜻이었을까.
그들에게 난 간만에 들어온 즐거운 여흥거리였고, 그걸 구해다준 노씨 할아버지는 역시 믿고 쓰는 능력 있는 촌장이었다.
사지 멀쩡한 색시를 이나이먹고 언제 올라타 보겠냐며 웃는 할아버지 아래에서
퍼덕거리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인생 별것 없구나 싶었다.
<2>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난 잠에서 깨어 다리를 벌렸다.
한동안 반응이 없어 왜 안 올라오지 하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여전히 무덤덤한 목소리. 지소장이라 불렸던 그 사람이었다.
“애 아아에 이어으어어에어어! 에아 아으 오애우에우!”
배변하고 난 후 처리해 달라 울부짖을 때마다 내가 짐승만도 못해졌단 게 사무쳐서 언제나 다물고 있던 입도 감정이 격해지니 말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난 그에게 소리쳤다.
왜 나에게 이러는 거냐고, 제발 날 풀어달라고.
그는 훗, 하고 가볍게 웃더니 사락 하는 소리가 나고, 무언가를 내게 건네줬다.
“이거 종이에요. 보이지 않으니 잘 쓰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번 써봐요. 그동안 궁금했고, 알고 싶었던 걸 가르쳐줄게요,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으니까.”
분노가 몸을 휘감았지만, 그래도 그나마 이곳 사람들 중에서 이성적으로 말하는 사람 같아서 떨리는 오른손을 감싸 쥐고 궁금한 것을 적기 시작했다.
나를 왜 가둔 건가.
대식오빠는 어디로 갔는가.
범죄에 왜 가담한 건가 의사면 가장 인도적이어야 하는데
날 풀어줄 수 있는가 절대 당신이 가담한 것을 이야기 하지 않겠다.
인간으로 살게 해주세요.
제발 날 풀어주세요
제발
그것도 안 된다면
죽여주세요.
처음엔 억누른 분노로, 마지막은 애원조로, 빌다시피 쓰고 있었다.
죽여주세요. 까지 적는 내 손을 뿌리치고 그는 종이를 가져가서 차분히 읽고 난 후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문화상대주의라는 말이 있어요, 서로 다른 집단의 자생적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 자생적 질서에 인도주의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어도, 쉽게 말해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한들, 그 자생적 질서 밖에 있는 방관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도 있는거에요. 우리나라에서 개고기를 먹는걸 어느 나라에서는 손가락질하죠. 그래도 상관없이 먹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살아요. 똑같은거에요. 그것도 하나의 ‘질서’ 인거죠.”
“인권의 기본은 경제력에서 나와요. 어떤 문화를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로 고치려한다면, 그 보편적 인권을 보장해줘야하는게 당연하죠. 거기에 필요한 게 경제력이고요.자생적 질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진거에요. 그중 하나가 부서지면 이 나간 톱니바퀴처럼 엉망이 되고 말죠.”
“이 섬을 보세요. 젊은 사람이라곤 어디하나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요. 유흥거리도 없고, 인구유입도 없는 점점 죽어가는 섬이죠.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마저 없어진다면 그대로 무인도가 될 거에요. 젊은 사람이 유입되어야 하는데, 오려하지 않으니 방법은 하나뿐. 즉, 이렇게 데려오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은 실향민이 되고 이 섬의 근간은 파괴되는거에요. 고향을 지키려는 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죠.”
“내가 이곳 사람들을 도와주게 된 이유도 같아요. 여기 있는 동안은 나도 이 ‘자생적 질서’에 톱니바퀴로 같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방식에 협조하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시켜 주는거에요. 그쪽이랑 같이 오게 된 남자 분은 오히려 저에게 고마워해야 할 거에요”
“제가 수면제를 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남자 분은 망치로 머리가 깨지고, 줄 톱으로 목을 자르고, 손가락을 불로 지지고, 바다에 떠다니는 신세가 됐겠죠. 그쪽도 지금처럼 몸 성하게 있지는 못했을걸요? 그전에 계셨던 여자 분들은 후두를 불로 지지고, 허벅지 아래를 도끼로 쳐서 도망 못 치게 했었죠. 그래서 오래 못살았어요. 감염을 막을 사람이 내가 오기 전에는 없었거든요.”
“그에 비하면 지금 남자분도 멀쩡히 살아있고, 그쪽도 사지 멀쩡히 삼시세끼 잘 먹으면서 지내고 있으니 정말 처우개선이 많이 된 거죠.”
쓰레기다.
내게 올라탄 그 사람들보다, 아니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이런 사람이 인세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느껴질 정도로
쓰레기다.
무식의 발로로, 그전까지 해왔으니까 사람들을 납치한 그들과는 다르다.
이성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고 협조하는 이 인간은 내가 죽일 거다.
오늘 내가 죽게 되어도 이 짐승 같은 삶을 살 바에야 이 마음이 짐승인 새끼를 같이 죽일 거다.
손을 내 뻗는 순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우악스러운 손길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아따 슨상님 뭣한다고 미주알고주알 다 설명을 하고있당가? 퍼뜩 처리해불고 밥 먹으러 가야제라?”
젊은 목소린데 처음 듣는다. 손목을 잡힌 채로 엉거주춤하게 있던 내 등 뒤에서
찢어죽일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재인씨 밖에서 기다리지 왜 들어왔어요, 그래도 마지막 소원은 들어줘야 마음 후련히 가지 않을까 해서 들어준거에요. 가더라도 알고가야 답답하지 않을 테니까요.”
!? 마지막?
목을 찌르는 바늘의 감촉을 느끼고
정신을 잃었다.
4. 終
정신이 들었다.
일어난 기척을 숨기고 청각에 집중해 지금 상황을 살펴봤다.
“아따 요새 바빠서 난리도 아니랑께요, 닭이 위에 앉아놓으니까 우덜이 아주 눈에 가시로 보잉께 못 잡아먹어서 안달해분당께요”
“집중 단속기간인데 이렇게 따로 와도 괜찮아? 우리 섬이야 몇 명 없어서 처리는 금방 되겠지만……. 그래도 오래 자리 비우고 어디 갔었는지 캐묻고 그러면 골치 아파질 텐데…….”
“그럴 줄 알고 올해 김장할 때 소금 필요한것좀 사러온다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놨당께요”
“2월인데 소금을 벌써 구하는 건……. 뭐, 별 문제 없다면 그걸로 됐어. 좋은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방법인지 가르쳐줄래?”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다리 아래로 느껴지는 촉감을 느꼈다.
바닥은 차가운 콘크리트, 매끄럽게 마감이 되어있고, 그 위에 조그마한 알갱이들이 조금씩 남아있는걸 보니 창고인 것 같았다. 나와 그들과의 거리는 목소리가 울리는 걸로 봐서 약간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고, 공간은 넓은 것 같다. 뒤쪽으로 살짝 눈을 돌려 보니 밝은 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걸로 봐서 그쪽이 출구.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안쪽이다.
손은 묶여있었지만 발은 별다른 구속이 되어있지 않았고, 난 그들의 방심하는 틈을 찾으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 뒷산에 대식이 처리한 거 들으셨소잉?”
“땅에 묻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가장 무난한 처리법이 아닐까? 예전에 우리 섬에서 목 자르고 바다에 버린 게 TV에 나와서 다른 처리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KIA~ 이번에 내가 목포에 아는 성님한테 끝내주는 방법을 배우고 왔제라……. 그전까지 그쪽 업계에서 처리하는 방식은 토막 내서 녹여 버리거나 발목까지 양생해서 바다에 버리는 방법을 썼는디, 이번에 발상의 전환을 했당께요? 머리를 양생해서 버리면 그게 아주 끝내준다 하더만요.”
“머리를? 물에 못뜨는건 어디를 양생하던지 똑같으니까 크게 상관없지 않아?”
“아따 성님이 뭣을 모르시네잉……. 발목까지 양생해서 버린 시체 건져서 치열검사랑 머리카락 남은 거 검사해서 사람 찾은 경우 못 봤소……. 그래서 좋은 방법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생각이 딱! 난거지라. 머리를 양생해서 버려불면 그 공구리 깨면 이고 두개골이고 다 깨져부러 찾덜 못한당께요. 참으로 심플하고 사람 손도 적게 드는 처리방법을 찾아부렀소잉. 이것좀 잠깐 도와달랑께요. 여따 물 붓고 살살 저으면서 회죽 만들고 있으면 내가 양동이 찾아올랑게”
지금이 기회다.
탈출해야한다.
한계 끝까지 당겨진 것처럼 긴장하고 있던 몸을 튕겨내며
뒤돌아 달려 나갔다.
빛이 빨리 가까워지는걸 보니 문이 멀지 않았구나.
나가면 소리부터 질러야한다.
말이 나오지 않아도,
울며불며 소리치는 여자를 모른척하진 않으리라.
혹시 모른다. 우리처럼 여행 온 사람들이 날 봐줄 수도 있다.
살아야한다.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발소리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진다.
거의 다 왔는데
덥석.
“색시. 머리 감고 가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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