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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어느 일본인의 뿌리찿기

콜로라도 |2014.02.25 20:58
조회 14,187 |추천 8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정종이 임금에 즉위한 1398년 그해 일본의 스오지방(지금의 야마구치현)의 한 영주가 왜구를 소탕하고 납치된 조선인 100여명을 반환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문을 좀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의 이름은 오우치 요시히로였다.

 

 

일본 좌경 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그 공적을 말하였다. 임금이 의홍(義弘)에게 토전(土田)을 하사하고자 하다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과 간관(諫官)의 의논으로 그만두었다. 의홍이 청하기를,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백제(百濟)의 토전(土田)을 청하였다. 임금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그 가문의 세계를 상고하게 하니, 세대가 멀어서 징험할 수가 없었다. 잠정적으로 백제 시조(始祖) 온조(溫祚)고씨(高氏)의 후손으로 하여 토전(土田) 3백 결(結)을 주기로 의논하니.....   그는 자신이 백제 임성태자의 후예(임성태자는 백제 성왕의 아들로 장차 백제가 신라를 치려고 왜에 원군을 데려오기 위해 파견된 왕자였다. 그는 열심히 군사를 모았으나... 이미 성왕이 김무력의 손에 죽자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머물며 다다라씨라고 하였으며 일본의 좌경대부(4품)의 벼슬을 받아 대대로 스오지방의 장관을 지냈다. 삼국사기,유사에는 나오지 않고 일본서기에서만 나와 과거엔 학계에서 부정당했지만 최근 백제사 연구에 있어 일본서기를 필터해서 받아들이고 있어 수백향 등과 함께 실존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강항선생의 간양록에는 임정태자로 기록되어 있다.)라며 그 뿌리를 찿고 싶으며 옛 백제땅에 자손들이 머물 토지를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정종은 이를 통해 일본을 제어하려는 마음으로 허락하려고 했으나 권근등이 오랑캐에게 땅을 내줄 수는 없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오우치 요시히로가 보낸 사신은 땅은 본래부터 원하지 않으니 오우치 가문의 뿌리만 찿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역사서를 뒤젔으나 우리나라 상황상 과거의 사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상고가 불가능했다. 이에 오우치의 사신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백제의 왕성인  고씨(백제의 왕성은 부여씨다 이를 통해 중국역사에만 통달하고 정작 자국의 역사는 등한시한점을 알 수 있다.)를 하사해 고의홍이라 불렀다. 그러자 사신은 크게 감사해하며 돌아갔다. 고의홍이라는 이름을 받은 오우치 요시히로 그는 누구인가   6년전인 1392년 일본 교토의 무로마치에서는 남북조가 하나가 된 것을 기념한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한창 술잔이 기울무렵 막부의 장관인 관령 시바 요시유키는 공을 세운 장수들을 칭찬하며 그 가문의 위대함을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1등공신인 오우치 요시히로의 앞에서는 "그대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대는 겐지씨(미나모토씨)도 아니고 헤이지씨(다이라씨)도 아니지 않는가"라고 비웃었다.(겐지씨와 헤이지씨는 일본 장수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칭한 왕족출신의 명문가였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처음에는 참았으나 다른 장수들까지 비웃자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고 한다.   "나는 백제의 왕자인 임성태자의 후예이니 그 역사가 겐지나 헤이지 보다 더 길고 명문인데 어찌 나를 이다지도 비웃는가...."   그는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에 장군과 다른장수들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1356년에 스오지방의 장관인 오우치 히로요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스오지방 옆의 규슈는 남북조시대의 혼란속에서 피튀기는 전쟁을 벌여왔고 여기에서 패배한 장수들은 왜구가 되어 고려를 약탈하고 있었다.(최근 연구에서  태조 이성계에게 토벌당한 아지발도는 단순한 왜구가 아닌 일본 규슈의 소영주 혹은 일본 남조의 왕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기 아버지인 히로요는 그 싸움을 은근히 부추기면서 왜구들에게 보호세를 받거나 고려에서 끌려온 사람들을 싸게사서 비싸게 파는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들인 요시히로에게 자신의 가문이 백제의 왕족이었다는 사실을 자주 이야기 했다. 어린 요시히로는 그 모순적인 상황을 이야기 하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무로마치 막부는 규슈의 장관으로 이마가와 로슌을 임명했는데 로슌은 군대를 모으기 위해 스오지방으로 왔다. 당시 최고의 문화인이자 교양인이었던 로슌은 요시히로의 스승이 되었는데 특히 전란을 끝내야 진정한 평화가 오고 노예무역 또한 사라지리라고 한 말은 요시히로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러나 히로요는 노예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기에 로슌을 돕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못해 적은 군대를 요시히로에게 내주고 로슌과 함께 규슈로 보냈다.   요시히로는 로슌의 밑에서 용감히 싸워 남조측의 군대를 격파했고 한편으로 왜구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왜구들이 1370~80년대에 고려로 반포기 상태로 공격해오는 일이 잦았고 결국 최영장군과 태조 이성계에게 무너졌다.   위기를 느낀 히로요는 자신의 둘째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요시히로를 호적에서 파버렸다. 그러나 요시히로는 충분한 경험과 군대를 가진 장수로 성장해 있었다. 그는 로슌의 지지하에 아버지를 공격해 연금하고 동생을 죽여 스오를 차지했다. 그리고 수년 후 규슈는 평정되고 남조는 항복했다.   그는 로슌의 말을 믿어 곧 평화가 올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로슌은 히로요가 가진 노예무역에 욕심을 내고 당시 거대세력인 야마나씨와 결탁했다. 이에 요시히로는 크게 실망했고 로슌과 결별해 당시 무로마치의 장군이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협력해 로슌과 야마나씨를 무너뜨렸다. 이에 요시미츠는 크게 기뻐하며 기존의 4개의 지방장관에 더해 2개지방을 더 내려주었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이제 대영주가 된 것이다.  

 녹색으로 칠해진 지역이 오우치 요시히로의 영토였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대영주가 되자 자신의 뿌리를 확인받고 싶어했다. 그래서 왜구의 잔존세력을 이잡듯이 훓어 일망타진하고 왜구의 시기를 종결지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을 찿아내 본국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얼마안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지방 영주들을 모두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미 이마가와 로슌과 아시나씨는 무너뜨렸고 다음이 바로 오우치 요시히로였다. 1399년 관령 시바 요시유키는 요시미츠에게 요시히로가 조선에게 신하를 자칭하고 막대한 금품을 하사받았다고 모함하였다. 자신의 뿌리를 찿기위해 파견한 사신이 그만 토벌의 명분이 된 것이다. 오우치 요시히로도 교토에 첩자를 심어두고 있어 그 계획을 눈치챘고 결전을 준비했다. 그는 각 지방의 영주들과 연락했고 일본 동부지역과도 손을 잡았다. 그리고 5천의 병력으로 사카이에 요새를 쌓고 결전을 다짐했다. 그러나 원군은 오지 않았고 시바 요시유키의 3만병력과 6개월간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사카이는 수십여년 간 폐허가 되었다. 이를 오에이의 난이라고 한다.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스오지방도 집어 삼키고 싶었으나 오우치씨는 결사항전을 다짐해 결국 이를 포기하고 6개지방 가운데 2개지방만 남겨주는 조건으로 용서하였다. 그리고 오우치 요시히로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이에 그의 후계자는 탑을 쌓아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오우치 요시히로가 잠든 탑....

 

 

 

어쩌면 토전을 요청한 것은 혹시라도 모를 멸족을 막기위해 피신처를 마련하려 한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오우치 요시히로는 중앙의 귀족이나 장수들에게 출신을 추궁당하는 등 지방무사로 무시당해왔기에 자신의 가문을 자주 확인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어쩌면 정종의 생각대로 그를 통해 일본을 제어해보려는 조선의 의지가 발휘될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스오지방은 일본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오우치씨는 연산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제왕족이라는 이유로 무역등에서 특혜를 받으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연산군과 가까워 중종반정세력에게 밉보여 대마도에 그 혜택을 빼았겼다. 그리고 1523년 호소카와씨와의 무역전쟁에서도 패배해 그 세력이 쇠퇴했고 결국 1551년 신하인 스에 하루카타에게 찬탈된 뒤 괴뢰로 머물다가 모리,오토모씨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그러나 그 자손들은 오우치, 혹은 도요타씨로 일부 살아남아 오늘날에 이르렀고 현 당주(종손)는 지금도 백제왕족의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김제시 홍보특사로 선정된 오우치씨 부부  
추천수8
반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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