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9년 궁궐에 흔치 않은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날 시골사람 손귀생이란 자가 서울에 왔다가 창덕궁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광연루 옆의 못까지 다다르고 거기에서 궁궐 경비에게 잡혔다.
일개 백성이 허락없이 궁궐을 들어왔으니 이는 엄청난 일이었고,
순금사에선 이에 대한 처벌로 곤장 80대로 정하고 왕에게 결재를 받으려 했지만
태종은 별일 아니라며 처벌을 무마해버린다.
"태종께서 명하시길 이들은 무지한 시골사람이라 악의가 있어 그런 게 아닌 실수로 그런 것인데,
그걸로 장 80대나 때리는 게 말이 되느냐 불문에 붙이고 그대로 돌려보내라 하였다. -태종실록-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과거 조서란 자가 대언이 되어 숙직을 했을 때, 시골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와 같이 숙직을 하고
다음날 아침 돌려보냈는데, 그 사람이 큰 궁궐에서 혼자 헤매다 왕이 잠자리를 드는 침전의 뜰안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근처 궁녀들이 그를 발견하고 놀라 막 뭐라하고 그걸 태종도 알게 되었다.
일찍 일어난 태종은 이를 신하들이 알면 반드시 법대로 처리하려 들테고, 그럼 벌을 받을 수 있으니 목격한 궁녀들에게 그를 그냥 돌려보내고 이 일을 함구하여 신하들이 모르게 하여 유하게 넘어가라고 했다. 이에 시골인은 임금의 배려로 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태종 13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들이 타구(막대기로 공을 치며 노는 놀이)를 하는데,
공의 이름을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하고, 다른 건 효령군, 충녕군 이라 하며,
그 공을 치며 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공이 다리 밑에 빠지자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하니,
효령군의 유모가 그를 듣고 관아에 고하고, 형조에서 아이들을 잡아들어 옥에 가두고 보고를 한 것인데 이를 들은 태종이 어이가 없다는 듯.
'아이들이 10세 남짓에 불과한데 이게 무슨 큰 일이라고 그리 난리냐.
앞으로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일로 아이들을 잡아들이거나 하지 말라.
혹시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관련된 법률이 있으면 모두 불태워라.' 하였다 -태종실록-
다음으로 그 태종의 아들인 세종 21년의 일이다.
세종이 정사를 보고 있는데 형조에서 절도죄에 관한 보고가 올라온다.
노비 김선삼이 절도죄를 저질렀고, 당시 노비의 절도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니 집행하게
해달라 하였는데. 세종은 사형은 너무하다며 그 형을 감해줘버린다.
이에 신하들이 절도하고도 중형을 받지 않으면, 또 마음대로 도적질을 할 것이라며 세종의 명에 반대하자. 세종이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백성이 기근을 만나서 죽은 자가 많아 내가 이를 참고 볼 수가 없는데,
어찌 또 형벌로 죽이겠는가.' 하고 벌은 가볍게 감형되어 관노 김선삼은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세종은 26년 노비를 보호하는 법을 만드는데.
노비가 죄가 있다고 그 주인이 노비를 구타하거나 죽이는 일이 자꾸만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에대해 세종이 전지하기를,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상하(上下)의 구분을 엄격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만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고 임금이라도 죄없는 자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법이다.
노비라도 하늘이 내린 백성이고,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내린 백성을 부리는 것도 고마워해야할 지언데, 주인이라고 어찌 제 멋대로 형별을 행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이 되어서 이를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겟는가. 나는 이를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이젠 노비가 죄가 있고 없고간에 신고하지 않고 주인이 함부로 판단해 구타, 살해하면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29년 이런일도 있었다
어느날 단순 절도가 아니라 무기를 들고 도둑질을 한 도적들이 잡혔는데.
이 도적떼에 미성년자가 끼어있었던 것이다.
당시 김춘과 은삼이란자는 나이가 18세였고, 이영산은 형을 따라 도적떼에 가입했는데 나이가 13세였다. 이에 세종은 김춘과 은삼은 사형이 아닌 장형과 유배로 죄를 경감하고,
13세에 불과한 이영산은 아예 모든 죄를 용서해 줍니다.
당연히 신하들은 난리가 나고, 황희도 이 도적은 다른 도적과 비교가 안 되는 악질이라
어리다고 용서해주면, 후에 커서 반드시 죄를 도 저지를 거라며 감형이 불가하다 하였다.
모든 신하가 반대하자 결국 세종도 사형을 허가하는 듯..하다가,
조금 있다가 '다시 생각해봐도 사형은 너무하다' 며 형의 집행이 불가능하다 말하였고,
의정부에서 며칠동안 계속하여 형을 집행해야한다 요구했지만 세종의 고집으로 결국 김춘 등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세종은 식량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