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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관련 친일 자료

펠릭스 |2008.09.05 21:14
조회 464 |추천 0

민족문제 연구소 친일종교인 자료 중..

올해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발표했었던 보도자료 중 친일 종교인 부분을 캡쳐 했습니다.

 

 

 

=> 절대적인 친일파 숫자에서도 개신교가 가장 많지만, 그 당시에는 개신교가 지금처럼 큰 규모의 종교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굉장히 높은 비율이라고 하겠네요.


=> 민족문제 연구소 친일종교인 자료 발표 관련 개신교 반응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3&articleId=35556

 

“일제시대 교회, 민족배신 솔선수범”

http://media.daum.net/culture/leisure/view.html?cateid=1025&newsid=20050918161204311&cp=dailyseop

=> 일제시대 개신교계는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습니다.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사왜곡

http://media.daum.net/culture/leisure/view.html?cateid=1025&newsid=20050919105403454&cp=dailyseop

=> 해방후 개신교계는 자신들의 친일 과거사를 왜곡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조선 장로호

 


조선 장로호가 언급된 기사 발췌

 

[특집 한국교회 부끄러운 과거①] “일제시대 교회, 민족배신 솔선수범”
http://media.daum.net/culture/leisure/view.html?cateid=1025&newsid=20050918161204311&cp=dailyseop

5. 백귀난행, 부일협력

한 국교회는 적극적으로 부일행위를 했다.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의 악의 전쟁에 협조했다. 신의주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는 교회조직을 전쟁보조 기구로 개편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회록에 따르면 장로교회는 1937년부터 3년 동안 국방헌금 158만원, 휼병금 17만2000원을 모아 바쳤고,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위문회 181회를 치렀다.

1942년에는 '조선장로호' 라는 이름이 붙은 해군함상전투기 1기와 기관총 7정 구입비 15만317원 50전을 바치고,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는 신도의식을 거행했다. 1942년에 열린 제42회 총회의 보고를 보면 장로교단은 교회당 종 1540개와 유기(鍮器) 2165점과 12만여원을 모으고 마련하여 일제에 바쳤다.

.

(중략)

.

감리교회는 1944년에 교단 상임위원회의 결의로 '감리교단호' 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세 대를 살 수 있는 돈 21만원을 헌납했다. 모금은 '성도의 헌금 전액과 교단 소속 교회 병합에 의한 폐지 교회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충당하는' 방법에 따랐다. '교회병합 실시 명세표'를 만들어 전국 교회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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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3.1. 운동에 기독교의 역할이 있었다구?

출처: http://www.antichrist.or.kr/bbs/board.php?bo_table=free_talk&wr_id=25437

 

도대체 기독교가 삼일운동에 대해서 준비한게 뭐가 있던가?
끝까지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다가 전날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고 막판에 마지못해 개인적으로 서명한 16명의 기독교 인사에 빌붙어서 천도교에서 목숨걸고 주관한 거사를 가로채겠다는 심보는 예수가 가르쳐 준거던가?

이승훈목사가 천도교에서 운영자금5천원을 꿔 올때도 기독교에서는 뭘 하고 있었던가?
더구나 서명한 16명의 목사, 전도사들은 모조리 변절한 처지에, 낯짝엔  철판을 둘렀는지 어찌 인간의 얼굴을 하고는 저렇게 석판에 새겨서 자기네 공과로 치장하는가?

더구나, 일제가  삼일운동의 주동자로서  천도교를 말살 시킬때 기독교 목사들은 뒷짐지고  일제에 아부하면서 교세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지?

지금 보니, 천도교에서 빌린 돈을 안 갚을려고 그랬구나?  ....

아래글을 읽어보라....개신기독인들아....


◎ 2004/3/13(토) 23:14
■ [이덕주]3·1운동 때 진 빚을 갚자  

교 회 밖에서, 특히 좌파 성향의 역사학자들이 삼일운동과 관련한 기독교의 역할을 서술할 때 소극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이를 바탕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가 삼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할은 크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저들은 대략 세 가지 사실에서 근거를 찾는다.

첫 째 삼일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인들이 대체로 소극적인 자세로 임했다는 것이다. 운동 참여를 권고받은 목사들이 즉각 응하지 않고 “기도해 보겠다”고 주저하였으며, 거사 전날 손병희 집에서 모인 민족 대표 모임이나 거사 당일에도 현장에 참석치 않은 사람은 기독교측 인사들뿐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비판한다.  

둘 째, 기독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투항주의적 자세다. 이는 다른 민족대표들에게도 적용되는 혐의지만, 탑골공원에서 대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려던 처음 계획을 포기하고 요리집으로 장소를 옮겨 약식으로 선언식을 하고 경무청에 연락을 취해 자발적으로 연행됨으로 ‘영웅적’ 모습을 기대했던 청년 학생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고 비판한다.  

셋째, 기독교측 인사들이 천도교 돈을 받은 대목이다. 그 때 기독교측 인사들은 천도교측에서 제공한 ‘5천원’을 받아 활동비로 썼는데 이 대목을 과장하여 “목사들이 천도교 돈을 받고 움직였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이 런 주장들에 대해 무지의 소치라고 무시하기에는 당시 역사적인 상황 증거가 분명하고, 사실 관계에서 그렇게 해석할만한 오해의 소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런 상황과 사실을 재해석함으로 오해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 변명 섞인 재해석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 째 문제는 민족대표들이 ‘종교인들’이었다는 점을 알면 풀린다. 특히 기독교측 인사 16명 중 13명이 목사와 전도사였다. 성직자들에게 정치와 민족도 중요하지만 신과 교회보다 앞설 수 없다. 독립운동 요청을 받은 목사가 “기도해 보겠다”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둘째 문제 역시 종교인의 행동 규범을 알면 풀린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며 그 수단도 평화적이어야 한다. 기독교 인사들이 처음 천도교와 합작을 꺼린 것은 동학혁명에서 보여준 천도교의 폭력성 때문이었고 선언식 장소를 옮긴 것도 폭력 시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올 뿐 궁극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 기독교계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지향하였고 그 결과 삼일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셋째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것이다. 당시 천도교는 3백만 신도에 1년 헌금만 10만원을 거둬들일 수 있는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갖고 있었지만 기독교는 10만 수준의 교세에 교회 재정은 상당 부분 선교사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민족대표로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기에 교회로부터 ‘공적인’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측 대표 이승훈 장로는 천도교로부터 ‘빌리는 형태’로 활동비 5천원을 가져온 것이다. 오래 전(1969년) 교회사가 김양선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 5천원 가운데서 현순 및 안세환의 여비 2,700원, 안동현 연락소 설치비 1천원은 천도교와 공동 부담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 반액인 1,850원과 33인중 기독교측 대표자의 가족생활비, 교통비 및 통신비로 사용한 1,300원, 합계 3,150원은 반드시 갚아야 할 돈이었다. 이승훈이 그 뒤 어떻게 했는지 알지 못하나 지금이라도 그 환보 여부를 조사하여 결제를 깨끗이 끝내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꾸어 쓴 돈이기 때문이다”

과 문인지 모르지만 아직도 “반드시 갚아야 할” 그 돈을 갚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교세가 역전되어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한 기독교는 이제라도 선배들이 빌린 돈 ‘5천원’을 (요즘 시세로 환산하여)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난한 조상이 옳은 일을 하다가 진 빚을 여유가 생긴 후손이 갚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빚부터 갚고 나서 종교간 평화를 운운할 것이다. 종파와 교파가 다르고 이념과 신조가 달랐어도 민족 구원이라는 종교적 동기 하나로 손을 잡았던 우리 조상들의 돈거래를 결제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 몫이다. 이른 시일에 기독교교회협이 되든, 한기총이 되든, 바라기는 두 기관 총무가 손을 잡고 인사동 천도교 본부를 찾아가 80년 전 빌린 돈을 갚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감신대 교수

(1733호 2004.2.29)

 

윗글에 대한 반론....

첫 째 문제는, 삼일운동이 비폭력 순수만세운동이었다는 점과 2달전부터 준비해 왔다는걸 감안한다면 기도해보겠다면서 거사전날모임에도 코빼기도 안비친게 종교인이었기 때문이라는 변명은 후안무치의 언동이며,다른 민족대표 종교인들을 모독하는 언사이다.

둘 째 문제 역시 종교인의 행동 규범을 알면 풀린다고??? 다른 17명의 대표들이 폭력운동을 결의했단 말인가? 원래 방침은 폭력적 거사였는데, <기독교계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지향하였고 그 결과 삼일운동은 비폭력 평화운동의 전형으로 남게 되었다.> 라고?

감신대 교수요, 목사라는 작자가 저런 허무맹랑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오히려 타 민족대표의 종교인자격과 폭력성을 은근히 암시하면서 내비치는 작태는 종교인은 물론 인간으로도 불려지기를 포기한 언사이다. 신학교 교수가 저모양이니 배출되는 목사들의 수준과 자질이 의심받는건 당연하다.

그냥 사과하면 될걸, 꼭 자기네 들이 잘했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려는 자들이 소위 신을 믿느다는 개 신교목사들이다.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잘못된 환상을 버리지못하는 건방진 발상에서 비롯된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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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삼 김활란, 한국교회 빛낸 100인?

선정위원도 명단에 올려 '자화자찬'…역사의식 부재 논란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118

한국기독교성령100주년대회(총재 피종진)가 '한국기독교성령100년사 선정위원회'(명예선정위원장 민경배)를 통해 발표한 '성령의 사람100인' 명단에 양주삼, 김활란, 최태용, 윤하영, 백낙준, 고황경, 채필근, 이명직 등 대표적인 친일인사가 대거 포함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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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한복판에 오뚝 서 있는 친일기독교의 상징

http://media.daum.net/culture/leisure/view.html?cateid=1025&newsid=20050902180007792&cp=dailyseop

 

역사는 안다!...기독교 목사들의 매국친일 행위!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7&articleId=297289

 

김길창 신사참배 앞장 선 친일 거물 목사

http://www.antichrist.or.kr/bbs/board.php?bo_table=free_board2&wr_id=170208#c_170645

http://bluecabin.com.ne.kr/split99/3376.txt

 

개신교인 김활란의 친일발언들.. 이대 학생위 "친일파 김활란 동상 철거하라"

http://life.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44915

=> 위 기사에서 발췌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총장의 친일 발언 
 "반도여성 한사람의 투사로서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영광"  


이대 학생위는 김활란 초대총장의 일제 강점 당시 친일 발언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 - 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동양지광, 1939. 6월) : … 과거 조선의 부인운동은 어쨌든 화려한 시기가 있긴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구호에 불과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선일체의 대업 속에서 정말로 확고하게 현실성이 있는 부인운동이 전개되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여성의 무장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부민관 대강당 1941.12.27)
: … 저 흑노(黑奴) 해방(노예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의 싸움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동아 10억의 민족을 해방하고 광명으로 인도 하려는 도의의 전쟁이다. 우리 총후의 반도여성은 지금 이 도의 전쟁에 한사람의 투사로서 가담하고 있다는 광영(光榮)을 가졌다.

 

*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년 12월 이화여전 교장 ) : …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중략)…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 거룩한 대화혼을 명심 - 적 결멸에 일로매진 ( 1943년 8월 7일 매일신보 논문 ) : … 이 기회에 대동아 건설을 위하여 동아 10억의 민족을 저 앵글로색슨의 손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우리 황군이 도의의 싸움을 하고 있는 이 때에 반도 청년에 이러한 영예를 내리옵심은 더욱 기쁜 바이며, 또한 행복된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배속으로부터 대화혼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존엄하옵신 황실을 받들어 모시고 생사를 초월하여 대군을 위하여 순국 봉사하는 그 마음 오직 우리 황국신민만이 특히 제국 군인만이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 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년 12월) : … 학병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제군은 오늘 이때를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가라! 전선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 총후의 여성들은 제군들이 안심할 만큼 만사를 해내일 각오가 굳은 바이니, 바라건대 모쪼록 빛나는 전공을 세워 조선학도의 참다운 일면을 길이 청사에 빛내여라! …

 

*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매일신보, 1943.12.25) : 1943년 12월 전시교육임시조치령에 따라, 이화여자전문학교를 폐교하고 '여자특별연성소'라는 농촌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뀐 것에 대하여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

 

* 감격과 가중한 책임 - 진두에 나설 여학생의 결의 (매일신보, 1938년 6월 9일자) : 1938년 6월 당시 조선YWCA의 회장으로 있던 그는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여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라며 일본YWCA에 가맹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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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당시, 개신교의 친일 사례

http://www.antichrist.or.kr/bbs/board.php?bo_table=free_board3&wr_id=7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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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백범 김구 선생님은 개신교인이 아님

(개신교인들이 흔히 백범 김구 선생님을 개신교인이라고 홍보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백범 선생님은 개신교 신자가 아닙니다. 아래 자료를 참고하세요. 종교는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을 뿐이죠.

 

아래 내용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공식 홈페이지에서 발췌했습니다.
출처: 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1t02


인물로서의 백범의 큰 특징은 또한 '성실성' 과 '열성'이 매우 강한 것이었다. 백범은 어떤 일을 맡거나 하고자하면,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매우 성실하게 열성껏 하는 품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범이 실제로 맡아서 한일은 무엇이든지 잘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맡은 일을 열성껏 성실하게 집중해서 해내기 때문이었다.


백범의 품성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실질'을 매우 좋아하는 것이었다. 백범은 공리 공론을 가장 싫어했으며, '실질'적 논의 와 '실천'을 중시하고 좋아하였다. 백범이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의 여러 가지 종교를 모두 섭렵했을 때에도, 그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켜주고 독립을 지원해주는 종교 내용의 '실제'를 취하였지만 그 종교의 이론에도 집착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범은 종교적 배타성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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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른 사이트에서 김구 선생님에 대해 다룬 자료입니다.
출처: http://delta.sunmoon.ac.kr/sunmoonboard/sinhak/25/50.htm

위 출처에서는 표와 마지막 문장을 발췌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 발췌=>

백범이 동학, 유교,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 무려 5개의 종교를 섭렵한 것은, 서구적 이원론과 흑백논리가 아닌 동양의 체관과 달관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백범에게 있어서 종교란 오직 나라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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