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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은 필수 친정은 선택

양성평등 |2004.01.02 09:34
조회 1,919 |추천 0

 

딸 가진 죄인이란 말, 결혼한 여자들은 정말 듣기 싫은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친정 부모님이 시부모님들한테 죄송하다는 말을 할 땐 정말 열 받는다.

거기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 것에 대해서도 딸자식 잘못 키운 죄라며 용서를 구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대체 우리 엄마는 왜 시부모한테 당당하게 할 말 못 하고 저렇게 비굴하게 굴까?

내가 남보다 못한 것도 아니고, 어디 하자가 있어서 속이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화끈하게 맞짱은 못 뜰망정 왜 저렇게 시부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할까?

나야 며느리리라서 할 말을 다 못 하지만, 사돈끼리는 동급인데, 왜 할 말도 못 하고 그렇게 굽신데냐고 친정엄마에게 따지면, 친정엄마 왈,

“딸 가진 죄인이니까!”

그럼 우리 엄마가 죄인이면, 난 엄마를 죄인으로 만든 원흉인가?


내가 결혼해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두 가지가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엄청 많지만)

하나는, 여자는 죄인이다. 그래서 남자 집에 시집와서 그 집안 조상 모시고, 그 집안의 대를 잇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난 그런 말 한번도 안 들어 봤어요’ 라고 말하시는 분이 계실 수도 있는데, 그런 분은 행운아다. 그런 행운아가 우리 며느리들의 50%만 되면 이런 글 쓸 필요가 없다)

두 번째는 제 하자는 유구무언. 아랫사람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즉, 닥치고 부모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여자 = 죄인’이라는 공식이다.

나 지금까지 별 단 적 없고, 남한테 크게 죄 지은 적 없다. 남편 꼬드기려는 년 머리채 한번 잡은 적은 있지만, 내가 머리채를 잡은 건 그 년이지 아버님이 아니다. 고로 난 아버님에게 죄인이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여러분 중에서도 죄인이 되어야 할 죄를 지으신 분이 있는가?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건 시댁을 대상으로 한 죄가 아닐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결혼과 동시에 죄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그 집안 죄인이 되려고 이 남자와 결혼한 것이 아닐진데 왜 그럴까?

혹시, 죄인이란 말에 반발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죄인은 인격적 존중, 자유, 자율이 없음을 의미하는 뜻으로 좀 과격한 표현을 썼는데, 그냥 대충 넘어가 주시라.

저 공식은 바로 남성중심적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다. 즉,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 남편과 내가 진정으로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혹시 궁금하시면 아이들에게 물어봐라. 아이들은 우리 가정의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처럼 저런 말을 직접적으로 듣지는 않았어도, 시댁과 아내들과의 관계에서 여러 형태로 드러난다.

여자는 모든 면에서 친정부모보다 시부모를 우선시해야 하고, 친정 일보다 시댁의 일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시댁의 제사나 시부모 생일을 그냥 지나가면 큰일 난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할 경우, 여자들은 전전긍긍하며 참석 못할 사유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아내들이 친정 부모 생일날 참석 못 한다고 전전긍긍하고, 남편들이 아내처럼 노심초사 하는가?

우리의 많은 남편 중에 인격적으로 훌륭하여, 또는 아내가 너무 이뻐서 아내가 말하기 전에 친정 부모님의 생일을 잘 챙기는 사람 있다. 그럼 아내는 감동의 도가니탕 속에서 100일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정말 신문에 광고를 내서 많은 남자들에게 모범사례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의 많은 남편들은 아내의 눈총과 협박에 시달려 마지못해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내들이 시부모 챙기는 노력의 반도 안 되는 성의를 보이며 친정부모 생일을 챙겨준다. 그리고 100일 동안 생색낸다.

그러면 여자들 참 서운하고, 억울하다. 생각 같아서는 니가 우리 부모한테 한 만큼만 나도 니 부모한테 해줄 거다, 라고 오기를 품기도 한다.

그런데 그 오기의 반만이라도 실행하는가?

절대 못 한다.

왜? 그러면 자기만 더 피곤해질 것을 아니까.


그럼 왜 시댁은 필수인데 친정은 선택이어야 하는가?


이것은 여자가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 귀속되는 시스템이라서 그렇다.

옛날, 농업이 주업인 시대에는 이 논리가 일정 맞는 부분이 있었다.

친정집에서는 먹을 입을 하나라도 덜어야 하고, 시댁에서는 일손이 하나라도 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중요한 시대에서 결혼은 자손은 통한 노동력의 확보가 최고의 목표였다. 물론 여타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그것은 결혼을 통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칠거지악의 하나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겨나도 할 말 없다고 유교의 많은 성인들이 공증까지 서셨다.

이것은 여자의 친정집에서도 똑같은 논리로 며느리를 대했기 때문에 불만 있다고 친정으로 복귀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여자들을 보호하는 센터도, 법적 장치도 없던 시대에 시댁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받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존이 목적인 시대에 나와 남편의 평등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아무리 나를 낳고 키워준 부모라지만 친정 식구까지 챙길 현실적인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자의 힘에 의존하는 노동력의 시대가 아닌 첨단과학을 살고 있는 문명시대다.

그동안 산업화의 결과로 가족 구조도 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으로 완전히 분화되어 버렸다.

이것을 애통해하셔서 끊임없이 대가족의 미덕을 옹호하시며 회귀하시려는 분들이 종종 보이시는데, 이건 우리 부모님 세대 때 사회구조에 발 맞춰 스스로 해오신 것이니 너무 우리들 탓은 하지 마시길 바란다.

이렇게 농업의 시대에서 산업화 시대를 거쳐 오면서 우리들의 생활은 참 많이 변했고 편리해졌다.

장작불에 밥 하고 냇가에서 방망이질 하던 때에서 세탁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종류의 가전제품들이 생산되고, 가정에서 소비되면서 가사노동의 형태도 변하고 여자들의 생활에 많은 혜택을 주었다.

난 개인적으로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최고의 혜택은 전 세계의 (물론 아직 비문명화 된 곳도 있지만) 수많은 여성들의 가사노동의 강도를 많이 줄여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첫째로 손꼽히는 교육열이 높은 나라다.

그래서 우리의 부모님들은 딸들에게도 교육을 시키셨다. 아마 지금의 20대에서 30대의 여성 중에선 대학과정까지 나온 여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학교에서 여자는 죄인이라 시집가면 시댁에 복종하고 끽 소리 없이 살아라, 그렇게 배웠나?

아니다. 남녀는 평등하고, 여자도 자신의 꿈을 가지고 노력해서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된다고 배웠다.

물론 사회와 가정에선 남성중심의 가부장제가 판을 치고 있었지만, 그것이 미혼일 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엄마가 불쌍하고, 그래서 나는 저렇게 안 살아야지 다짐했을 뿐이다.

사회에서 남녀차별을 당할 때는 모른 척 하거나 정 안되면 때려치우고 시집가면 되지, 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는데, 지금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불평등을 온몸으로 겪게 되는 것이다.

날 낳아준 부모한테 한번도 해보지 않던 지극정성을 시부모한테는 해야 하고, 복종해야 하고, 나보다는 남편을 우선으로, 중심으로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리고, 여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에.


50년도 안 되는 세월 동안 세상은 정말 변했다. 이건 100살 된 할머니도 아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시댁에 대해 갖는 반감과 억울함은 우리 사회의 의식이 사회발전을 따라가지 못 해서 일어난 불균형의 한 부분이다. 사회 구조는 개인주의를 요구하는데, 사회 구성의 기본 베이스인 가정은 여전히 농업사회인 남성 중심의 대가족제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은 그 마인드에서 10%도 발전하지 못 했다. 이건 수많은 지식인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의 시대에서 오직 어머니들의 삶의 희망이자 목적으로 애지중지 길러온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남편들이다. 그들은 그 희망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출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누군가를 서포트하고 배려하는 법은 배우지 못 했다.

남자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한 마디로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다.

이런 불균형을 인정해서 자신들한테 이득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아내들에게 니가 참아라, 그게 효고 여자의 도리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를.

그래도 나아진 게 있다면, 아내들이 시댁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면 얌전히 듣기라도 한다는 거다. 옛날의 남편들 같으면 택도 없는 소리겠지만, 그래도 이젠 아내들 눈치 정도는 보지 않는가.


출발은 같았다. 남자나 여자나 부모에게 애지중지 길러져서 교육도 받았고, 미래를 꿈꾸며 노력도 했고, 또 열심히 사회생활도 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가정이란 이름으로 묶이면 불평등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 현실을 빨리 바꿔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이들이 보고 있으니까.

아이들은 학교에서 보다 집에서 더 많이 배운다. 부모의 모습 속에서 남녀의 성역할을 보고, 행동 양식을 보고, 앞으로 자기가 꾸릴 가정의 모습을 미리 학습한다.

아내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남편의 행동을 우리 아들이 따라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들 가슴에 대못이 박히듯 우리 딸들의 가슴에 박히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들의 가정을 바꿔야한다.

남자들은 결코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아까도 말했듯이 바뀔 이유가 없으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우리 가정을 바꿀 사람들은 가정의 진짜 주체인 여자들이 해야 한다.

가정 내 불평등이 나타나는 양상들이 하도 많아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자기 가정의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끈기 있게 남편들을 설득해야 한다. 뭐 하다가 성질나면 협박도 해야 하지만.


누가 여러분에게 넌 너의 시댁의 죄인이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시부모님께 충성해, 라고 말한다면 90%는 반발할 것이다. 내가 왜 죄인이야? 미쳤냐? 이렇게.

그런데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은 90% 이상이 맞는 말이라고 믿으며 거기에 순응하며 사셨다. 그래서 열녀문이니, 일부종사니. 시댁귀신이니 하는 살벌한 말이 나온 것이다.

이것만 봐도 50년도 채 못 되는 사이에 우리나라 여성들의 의식이 높아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착한 여자들이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해 온 중요한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를 부정하게 된 것만 봐도 우리들의 가정은 더욱 더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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