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나는 문학인이다.
[ 朴寅煥 ]
출생 - 사망
1926.8.15 ~ 1956.3.20
출생지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한 시간쯤 지나 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 테너 임만섭(林萬燮)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듣고 명동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시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시인은 여름에도 정장을 곧잘 입었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어느 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를 잡지 사진으로 보고는 그걸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시인 김차영(金次榮)은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 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 봄가을엔 우윳빛 레인코트, 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라고 증언한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도 늘 외상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술이야?” “어이구, 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 꽃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도 없이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박인환은 통속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 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 번은 수도극장(뒷날 스카라극장)에서 그레엄 그린 원작의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의 시사회가 열렸다. 문단 선후배들이 모여서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도중에 박인환이 벌떡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백철 씨 저걸 알아야 돼. 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 그것은 그야말로 느닷없는 일갈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철이 박인환에게 또 당했군!’ 하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이미 문단에서 대가로 대접받고 있던 백철로서는 난데없는 봉변이 아닐 수 없었다.
해방을 맞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 원으로 뒷날 월북한 시인 오장환(吳章煥)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스무 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한다. 얼마 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여는데,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던 헌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이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 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로 나뉘어 있다. 어느 게 정확한 것인지 확인은 불가능하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인데,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 《오르페온》, 《판테온》, 《신영토》, 《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김광균(金光均), 이봉구, 김기림(金起林), 오장환, 장만영(張萬榮), 정지용(鄭芝溶), 김광주 등 시인 소설가들, 《신시론(新詩論)》 동인 김수영(金洙暎), 양병식(梁秉植), 김병욱(金秉旭), 김경린(金璟麟) 등과 조향, 이봉래 등의 『후반기』 동인들, 화가 최재덕, 길영주 등이 ‘마리서사’의 단골손님들이었다. 특히 김수영과 박인환은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김수영은 서구적인 것에 경도된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며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부치며 경멸하고, 박인환은 또 그대로 김수영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전쟁이 나고 환도할 때까지 박인환은 대구, 부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경향신문>의 사회부 기자로 활동한다. 그는 다소 경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재기 넘치는 사람이고, 사람을 끄는 특별한 친화력 같은 것이 있어 주변엔 문인뿐만 아니라 각계의 친구들이 많았다. 그의 친구들 중에 그보다 십여 년 연장자들이 많은데, 이는 그가 자신의 실제 나이를 숨기고 사, 오세 많게 부풀린 탓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박인환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다가 돌아오면 암울한 시대를 증언하는 시들을 써 내려갔다. 박인환은 그렇게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를 가로질러 갔던 것이다. 그는 시를 쓰고, 영화평론을 쓰고, <경향신문>과 <평화신문> 등에서 사회부, 문화부 기자 노릇을 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수중에 돈도 없고, 집엔 쌀도 없는 가난한 시인이었다. 그것들은 ‘생활적인 직업’이 못되었던 것이다. 1955년 그는 대한해운공사에 취직을 하더니 ‘아무 계획도 기대도 없이’ 남해호라는 외항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갔다. 석 달 뒤에 귀환한 그는 「아메리카 시초」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박광선(朴光善)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한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 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를 하고, 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로 진학하는데, 이 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어 공부 대신에 일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시인들의 시집을 열독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한다. 부친의 강요로 3년제 관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진학하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온다.
“사실 안 된 말이지만 나는 아들이 죽기 전까지 문학을 하는지 뭘 하는지 몰랐다. 나는 그 애가 의사나 교사 같은 직업을 갖기를 바랐고, 강요하기도 했다. 1년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평양의전에 들어간 것도 내 강권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명이 짧아 애석하더니 세월이 약이다. 자식이지만 청렴하고 의리가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박광선은 살아있을 때 아들의 이른 죽음을 몹시도 애석해했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그는 보기 드문 애서가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라고 나중에 장만영은 회고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다니던 시인 김규동의 사무실에 가끔 나타나 “오석천(吳昔泉)선생을 만나야 한다.”고 우물쭈물 앉아 있다가 김규동이 자리를 비우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경제나 정치서적까지 슬쩍 집어 들고 가기도 했다.
「목마와 숙녀」는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대표작이다. 그는 ‘잡지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전화(戰禍)의 황량한 명동거리를 누비며 거침없는 언설과 재치를 뽐내며 시대를 가로질러 가던 시인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송지영, 김광주, 이봉구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세월이 가면」을 써낸 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이상(李箱)을 유난히 좋아한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한다(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 17일이다). 박인환의 기억의 착오였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지 박인환은 씩 웃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였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 세였다.
그의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감겨준 것은 송지영이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인환 [朴寅煥] - 인생의 통속을 꿰뚫어 본 혜안 (나는 문학이다, 2009.9.9, 나무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