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성노예 당사자.......

사과한마디... |2014.08.10 23:18
조회 150 |추천 2

<성노예 당사자 할머니의 증언> 역사의 진실은 꼭 밝혀야...

 

저는 경상남도 하동에서 꽤 부자집의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는 나를 일본 문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일본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정교사를 통해서 한자와 한글은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또 창씨 개명도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해 놋그릇을 공출하게 했는데, 저의 아버지는 그것도 하지 않고, 밤에 남몰래 집에서 일하는 일꾼 몇을 데리고 논을 깊이 파서 그 곳에 놋그릇을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들통이 나서 아버지는 경찰서에 끌려가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매일 저는 면회를 갔지만 면회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박 구장이 집으로 와서 제가 일본 방직공장에 가면 아버지는 석방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제가 공장으로 가는 그 날 아버지는 바로 석방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 않으면 저의 아버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15세였습니다.

저와 함께 악양면 면장딸도 함께 갔는데, 그 면장은 주재소 소장으로부터 악양면에서 처녀공출량을 할당받자 주재소 소장의 따귀를 때리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 이유로 면장의 딸도 저와 함께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에 의해 부산까지 와서 부산에서 큰배를 타고 일본의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습니다.

내려보니 보초가 있는 큰 창고에 약 천명 정도 되는 처녀들이 갇혀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15일 정도를 보내고 굉장히 큰배에 태워졌습니다.

우리가 시모노세키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대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광동으로 갔고, 태국, 방콕, 사이공, 싱가폴을 경유하여 인도네시아 쟈카르타에 내렸습니다.

저는 23명 정도의 여성들과 마랑의 육군부대에 배속되어, 그 부대가 이동하는 대로 따라다니며 운명을 같이 하였습니다.

저하고 함께 간 면장 딸은 뉴기니아로 배치되어 갔습니다.

 

위안소는 대대마다 하나씩 있었고, 한 위안소에 여자가 20~30명씩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여럿이 한 방을 썼는데, 군인들이 올 때는 포장을 친 각방을 이용하였습니다.

하루 평균 5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50명 이상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고 기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후 다시 군인을 상대하게 합니다.

 

그래도 성기가 부르트고 도저히 아파서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게 되면 주사를 팔에다 놓아주었는데, 알고 보니 마약 주사였습니다.

그 주사를 맞으면 덜 아팠습니다.

토, 일요일에는 100명도 넘는 군인들을 아침 9시부터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시작하기 전부터 4~5대의 마약 주사를 제게 맞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양쪽 팔에는 이렇게 흙덩이로 뭉쳐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도 피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팔은 지금 잘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일본군은 그 짓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들어와 그들은 술을 먹고 폭력을 휘두르고 자기들 뜻대로 응하지 않는다고 칼로 찌르고 해서 제 온 몸에는 칼자욱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한 장교가 칼자루로 제 팔을 쳐서 뼈가 으스러져 지금 제 팔의 뼈는 제 뼈가 아닌 다른 뼈입니다.

가슴에는 아직도 칼자국이 크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담배불로 지져서 제 아랫배 양쪽에는 큰 흉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지낸 지 한 1년 정도 지났을 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저는 죽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말라리아 병에 걸리면 먹는 약인 '근결합'을 한 알 한 알 모았습니다.

40알이 모이자 저는 그것을 한 입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천장이 기우뚱하더니 그 뒤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제 주변에는 제 동료들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2일 동안을 누워 눈, 코, 입, 귀로 피를 쏟으면서 기절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휴유증으로 소화제가 아니면 지금도 음식을 소화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즈음 23명의 여성들 중 14명은 죽고 9명만 살아있었습니다.

일본 군인들은 여성들이 몸이 병들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면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 나라는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몰랐습니다.

어느날 영국군인지 미군인지 모르지만 연합군이 우리를 인수했습니다.

그것도 패전이 임박하자 우리를 방공호에 가둬서 아마도 몰살하려고 했나봅니다.

일본 군인 중에서도 양심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한국인 군속에게 얘기해서 연합군에 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몰살을 막을 수가 있었습니다.

자카르타로 우리를 데리고 와서 수용소 같은 시설에서 약 1년 동안 배를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호열자가 발생했다면서 우리를 한 달 동안 배 안에서 내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난 후 연합군 인솔자는 제게 1000원을 주면서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마치 귀신이 나오는 흉가 같았습니다.

이웃 사람들 얘기로는 아버지는 결국 석방되지도 못하고 옥사하셨고, 어머니는 목 매달고 자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 혼자였습니다.

반겨주는 사람도, 붙잡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때 저는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결심을 했습니다.

일본놈들에 의해 마약중독자가 되었는데, 돈을 들여 마약을 사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두문불출하고 마약을 끊었습니다.

7개월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제 이와 잇몸은 모두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신문에 날 때마다 저는 그것을 오려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국가가 그런 일 없다 강제적으로 하지 않았다 등의 망언들을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고를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제가 아니라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부끄러워 할 줄은커녕 범죄를 인정도 하지 않고 있으며, 사죄도 배상도 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민간 모금을 해서 우리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하더니 위로금을 반대하니까 이제는 보상금(보상과 배상의 차이 - 배상은 잘못에 대한 손해를 지급하는 것, 보상은 불쌍한 처지를 도와주는 것)을 지급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돈 받기 위해 그렇게 아픈 과거, 생각만해도 온 몸이 떨리고 꿈마다 나타나는 그 악몽 같은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40년의 침묵을 깨트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일본이 바른 역사,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범죄에 대한 적당한 사죄와 법적 배상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상을 받으면 받는 즉시 찢어버린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정당한, 합법적인 배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 명예도, 제 동료들의 명예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며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로, 병에 걸려 희생당한 우리 동료들이 고이 잠들 수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http://www.k-comfortwomen.com/에 있는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

추천수2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