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관용적 사회의 위험성!
나는 갑작스런 십이지장천공의 고통으로 응급차에 실려 서울에 소재한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나서, 뜻밖에 죽음과 맞서 싸우고 있는 암병동실에 2주간 입원해 있었던 사람이다. 물론 나는 그 수술 후 무사히 퇴원을 했지만 그 후유증이 최근 발생하여 응급실에 다시 가서 치료를 받고 이틀 만에 다시 퇴원하면서 유명연예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물론 나는 고인과 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자살이란 단어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마음에 글을 작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유명 정치인 및 경제인 그리고 대중적 관심이 집중된 연예인들의 자살은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장이 매우 크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연예인들의 자살이 미치는 영향은 모방 자살로 연결되어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나는 평소 자살에 대해 사회적 관용적 태도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자살론자들은 한계적 현실에서 개인의 부득이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동정론 및 옹호론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자살은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지었던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면죄부와 같은 인식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걱정스럽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켕은 자살의 유형을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운명적 자살 등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우선 이타적 자살은 자신보다 남을 이롭게 하는 희생적 자살이 있다. 대체적으로 집단을 위한 자살로 일본의 사무라이나 논개 등의 자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로 이기적 자살은 이타적 자살과 반대의 개념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다. 개인이 집단과 유대 관계가 약해져 발생한다고 한다. 셋째로 아노미적 자살은 한 사회가 다른 사회 구조로 변화될 때,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혼돈된 가치에 의해 이뤄지는 자살이다. 마지막으로 숙명적 자살은 사회의 억압에 견디지 못한 개인이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본인이 가장 경계하는 자살은 바로 둘째의 이기적 자살에 대한 것이다. 가족을 포함하여 주변인에게 미치는 고통과 슬픔보다 자신의 현실적 고민을 도피하려는 이기적 심리가 작용한 자살에 대해 나는 좀 더 냉정해지고 싶다. 어찌되었던 자신은 근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부족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각 병원의 암병동에서 수많은 암환자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한 모금의 물과 하루 한 끼의 식사에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그들은 누군가의 장기 기증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맞서 싸우고 있다.
만약 여러분들이 현실의 고통으로 어쩔 수 없는 자살충동이 일어난다면 암병동에 가서 환자들의 얼굴과 가족들의 얼굴을 보라.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도록 해라. 과연 그대들의 인생과 생명이 종이 한 장보다 못한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생명과 육체를 지니고 있는지 단 한번만이라도 확인하고 자살을 선택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일시적인 순간적 충동으로 자살을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모독이다. 아니,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짓다가 자살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것이나 면죄부를 주려는 우리 사회의 관용적 자살의 풍토에 깊은 반성을 촉구하고 싶다. 죄 값과 죽음은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가급적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짓지 말고 죽어서도 자신의 죄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사회에 정착된다면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이것이 내가 암병동 생활에서 터득한 조그마한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