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서 은희는 한 남자 아이에게 깔려 있었다.
한 아이가 일어나면 또 다른 아이가 은희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았다.
남자 아이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욕구를 채운 후에야
은희의 곁을 떠났다. 웃고 떠들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그 일을 당한 후
은희는 자신이 벌레처럼 더럽고 추하게 생각되었다.
망가져버린 자기의 인생에
아무런 꿈과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은희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붉은 빛깔의 액체가 콸콸 쏟아지는 것을 보며
은희는 차츰차츰 의식을 잃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보니 병원이었다.
부모는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지역의 성폭력 상담소를 찾았다.
은희는 그곳 상담사에게
성폭행 관련 상담 치료를 받게 되었다.
물론 상담 선생은 친절했다.
은희를 향해 계속 위로가 되는 말을 해 주었다.
그러나 그 상담사가 해 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딘가 무척 공허하고 피상적(皮相的)으로만 들렸다.
가만히 지켜보니 '어차피 내가 당한 일도 아닌데 뭐......'
하는 식의 태도를 속에 깔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결국 상담 선생과 다투고 말았다.
마치 가슴 속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은희는 소리를 질렀다.
"다 집어치워! 그 따위 가식적인 소리 그만 좀 하라고!"
결국 상담 선생이 교체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희는 시큰둥했다.
상담을 받게 된다 한들 기대하는 마음은
눈곱만치도 생기지 않았다.
'당신네들이 뭘 하든 내 속의 고통을 없애 줄 수는 없어.'
상담 교사는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철두철미한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상담 교사는 고개를 숙이고
은희에 관한 기록을 찬찬히 살펴 보면서 질문을 던졌다.
"뭘 해줬으면 좋겠니? 내가 널 어떻게 해 주면 좋을까?"
저 말 뒤에 지루한 질문들이 이어지고,
입에 발린 괜찮다는 말들이 이어지겠지.
은희는 그런 상담 교사를 쳐다보면서
조소하듯이 마음 속으로 대답했다.
'다 그만두고 그냥 집으로나 빨리 가게 해 줘요..'
그런데 상담 교사가 갑자기 홱 고개를 들어서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은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쳐다본 후에
교사는 천천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쌍년."
너무 놀라서 은희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상담 교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얼굴로
은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넌 쌍년이야. 나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쌍년!
왜? 내가 상담 교사라서
너한테 값싼 위로의 말이라도 해 줄 걸 기대한 거니?
넌 참 나쁜 년이야. 못 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 네가 뭘 했는지 한 번 생각해 봐.
네 목숨 포기하면 너 하나만 고통 받고 모든 게 끝날 것 같았니?
네가 그 짓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 마음은 어땠을 것 같니?
자식이 자기보다 먼저 죽어 없어지는 걸 보는 게
부모에게 어떤 마음인 줄 알기나 하니?
자살도 살인이야!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건
감히 생각도 못 하면서 네 목숨 죽이는 건
파리 목숨 다루듯 쉽게 생각되었니?
죽으면 네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아주 영원토록 편안할 것 같아?
사람을 죽이고 네 주변 사람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는데?"
상담 교사의 추상같은 태도 앞에
은희는 절로 고개가 푹 숙여지고 말았다.
상담 교사는 날카로우면서도 또렷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연꽃이 자라나는 환경을 본 적이 있니?
연꽃은 지저분한 흙탕물,
탁하고 어두운 물 속에서 자라고 꽃을 피워.
흙탕물에서 자라나지만 그 오염된 분위기에 물들지 않고
때가 되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주변의 그 탁하고 더러운 환경조차
환하게 만들 정도의 아름다운 꽃을.
단순히 아름다움 뿐만이 아니야.
다 자라난 연꽃은 꽃부터 잎사귀, 뿌리까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인간에게 유익한 식물이야.
그 진흙탕 더러운 환경에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세상에 유익함을 줄 몸으로 자신을 피워낸 거야."
그런데 널 좀 봐. 넌 도대체 뭐니?
하물며 말 못 하는 연꽃조차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려 하는데
넌 뭐니? 조금이라도 네 환경을 바꾸기 위해
노력이나 투쟁 같은 걸 해 본 적이 있니?
네 앞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넌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해 봤니?
환경을 탓하고, 상황을 탓하고,
그저 네 자신만 생각한 게 다 아니니?
솔직히 말하면 너란 년은 한낱 식물에 불과한 연꽃,
말 못 하는 그 연꽃만도 못한 한심한 인간이야!"
상담 교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 준엄한 호통 앞에 은희는
괴상하게도 속이 후련해지는 것이었다.
마치 손이 닿지 않는 등 부분을
누군가가 대신 긁어주었을 때의 시원함처럼.
그날의 상담은 그렇게 훈계만을 잔뜩 들은 채 끝나고 말았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은희는
굉장히 혼란스런 기분이 되었다.
마음 한 켠에서는 자신에게 욕을 하고 훈계를 한
상담 교사에 대한 반발심과 의구심도 들었다.
'내가 겪은 일 같은 걸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책에서나 읽은 지식 따위 가지고 약을 팔아?'
은희는 작은 목소리로 가만히 혼잣말을 했다.
"선생이라는 인간이 입만 더러워 가지고......"
그러나 은희의 머리 속에서는 어쩐지 상담 선생이 한 말
한마디가 계속해서 떠나지를 않는 것이었다.
'지저분한 흙탕물 속에서 꽃을 피우는 연꽃.'
상담 선생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은희는 무언(無言)의 저항을 했다.
상담 선생이 무슨 질문을 해도 대답하지 않았고,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았다.
지난 번 상담 시간에 막말 섞인 훈계를 들은 데 대한
소극적인 반항의 행동이었다.
상담 선생은 그런 은희를 잠시 지켜보더니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너 같은 이기적인 년 하나가
나한테 인터넷으로 상담요청을 하더라.
자기 나이가 스물 다섯인데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출을 해서 술집 여자로 일을 했대.
그러면서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과거로 돌리고 싶다고.
자기 이래서는 결혼도 못 할 것 같고,
애도 못 낳고 살 것 같다고.
자기 같은 과거 가진 여자랑 누가 결혼을 하겠느냐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년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니?"
그 술집 여자의 사연은 은희의 호기심을 무척 자아냈다.
상담 교사는 찬찬히 입을 떼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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