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혹은 그렇지 않건
사람은 기억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한 독자로부터 3일째 신문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지국 직원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 집을 떠올려 보았다. 녹색대문의 다가구 주택 2층에 거주하는 50대 회사원이 독자이며, 이른 새벽녘에 신문을 챙겨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배달하는 집이다. 전체 두 가구가 살고 있고 1층 대문 안 마당에 신문을 던져놓기 때문에 외부 사람 중 누군가가 일부러 대문을 들어가 가져가면 모를까, 신문이 없어질 리 만무한 곳이었다. 오늘 새벽에도 신문을 분명히 넣은 기억이 났다. 어떻게 된 걸까. 근 2년 가까이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독자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것도 3일째라니….
이튿날, 그 집에 신문을 넣으려고 보니 대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잘 잠기지 않는 문이라 신문을 마당에 놓고 꼭 닫아 두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나는 계속 배달을 하며 골목 몇 개를 돌아 그 집 앞을 다시 지나칠 때였다. 백발이 가득한 한 어르신께서 그 집 대문을 열고 막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 어르신은 평소 작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동네 길가 등에 버려져 있는 빈 박스나 폐지 등을 줍고 다니는 분이었다. 길에서 나와 몇 번이고 마주칠 때마다 빙그시 웃으시며 “참 착하게 생겼네. 이름이 뭐야?” 하고는 물으셔서 똑같은 대답을 매번 반복해도 다음날이면 마치 처음 보는 사람 대하 듯 또 물으시는 이상한 어르신이었다.
대문을 나온 어르신은 품 안에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손수레에 막 싣고 있었다. 뭔가 수상했다. 왠지 내가 조금 전에 그 집 마당에 던져 놓은 신문일거란 짐작이 들었다. 언젠가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그 어르신께서 막 배달된 남의 집 신문을 가져가는 걸 봤다는 얘기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그 어르신께 다가가 손수레에 실린 종이뭉치를 확인하려 했다. “어르신, 잠깐만 그것 좀 볼게요!”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놀라 어르신은 순간 당황해 하며 “아니여! 아니여!” 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역시나 내 짐작대로 신문뭉치였다. 내가 배달한 새 신문도 그곳에 분명 섞여 있을 거란 생각에 이리저리 헤집어 보았다. 어르신이 더욱 허둥대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윽고 바닥에 신문이 모두 펼쳐졌다. 그런데.. 오늘자 신문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날짜가 지난 헌 신문들이었다. 당혹스러웠다. 내가 뭔가 해명할 겨를도 없이 어르신은 흩어진 신문을 챙겨 손수레에 싣고는 서둘러 가셨다. 나는 ‘아차’ 싶어 어르신의 등을 향해 “어르신, 죄송합니다!” 하고는 머리 숙여 사과 드렸다. 정말 난감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한 할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얘기해도 소용없어. 저 사람은 잘 못 알아들을 거야. 귀가 좋지 않거든. 기억도 왔다갔다 하고. 사람도 잘 못 알아봐. 아마 내일만 되도 아저씨 얼굴 기억 못할걸. 쯧쯧..”
섣부른 나의 짐작으로 어르신을 오해한 자책감에 얼굴이 뜨거웠다. 나의 무례가 그 분께 상처가 되면 어쩌나 조바심이 났다.
다음날 지국 직원의 얘기를 듣고 신문 불배 사고의 사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옆 동네에 살던 기존의 신문독자가 얼마 전 그 집 1층에 이사를 왔고, 마당에 있던 신문이 자기집 신문인줄 알고 가져갔다는 것이다. 보통 독자들은 이사를 하면서 신문지국에 이전 신고를 하는데 경리 직원이 실수로 깜박 사무처리를 빠뜨려 배달원인 나에게 제때에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다.
며칠 뒤, 박스와 폐지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끌고 가시는 백발 어르신과 배달 중에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여전히 죄송스런 마음이 들어 잠시 고민하다 재차 사과드릴 요량으로 그 앞에 다가갔다. 혹시라도 불쾌한 기분이 남아 버럭 화를 내시지는 않을까, 내심 불안해 망설여졌지만 내 실수였으므로 용기를 내어 어르신께 인사를 드렸다. 어르신께서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는 잔뜩 긴장했다. 어르신의 표정이 이내 눈 녹듯이 풀리더니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한 마디 하셨다. “참 착하게 생겼네. 이름이 뭐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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