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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있는자료]일제 '전시체제'하 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김현갑 |2008.09.14 01:51
조회 367 |추천 0

2. 일제 '전시체제'하 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한말·일제하의 기독교를 운동사적 측면에서 시대를 구분하여 성격짓는다면, 한말의 기독교는 (애국)계몽운동을 펴던 시기요, 1910년 일제 강점 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시기까지는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운동 내지 민족독립운동과 깊은 관련을 갖는 시기이며, 1920년대 이후 일제 말기까지는 일부에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을 펴기도 하지만, 대체로 문화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저항운동을 펴던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을 고비로 후기로 갈수록 기독교인들의 운동에서 민족성 내지 정치성이 희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일제의 기만적 회유·분열정책에 유도된 측면도 지나쳐볼 수 없지만, 민족독립운동 내지 3·1운동에서 큰 피해를 입은 교계가 이러한 운동에서 희망을 상실하고 다른 방면으로 활로를 찾았으며, 그런 가운데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들어 교계 지도자들이 친일화되어간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국내 민족주의자들을 전향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1937. 6)과 흥업구락부사건(1938. 5) 이후 이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전향하여 변절하였고, 기독교계의 친일행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각은 개인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 기독교로서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신사참배 문제에 굴복한 이후에는 교단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일제 경찰력의 강압 하에 1938년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는데, 이때 발표한 성명서는 그 내용상 소극적인 순응을 천명한 것만이 아니라,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한 전향성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그 성명서 후반부는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기함"으로 끝맺고 있다. 일단 개인의 생존이나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 일제에 굴복한 이후에는 그들의 전쟁협력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민족과 신앙 양심을 등지고서라도 일제에게 그들의 충성을 입증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이 마련된 1938년 이후의 공식적인 기독교 단체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부일적 성격을 띠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단체는 일제가 그 존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YMCA, YWCA 등 국제기구에 가입되어 있던 기독교기관은 국제기구에서 탈퇴하여 일본 산하기구에 가입하게 하고, 교단도 이미 어용화되어 있는 일본 교단 산하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장로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개편하게 하고, 이것도 부족하여 1945년 7월에는 전 기독교 교단을 통폐합시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단의 강제 통폐합 이외에도 각 교단 내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나 국민총력연맹의 교단 차원의 하부기구들과 각개 교회에까지 애국반을 조직하도록 하여 부일협력을 강요하였다. 당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고 가장 반일적이었다고 하는 장로교도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장로회연맹'을 조직하고, 이듬해 총회에서는 이 연맹 이사장 윤하영, 총간사 정인과 목사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사업 실적 보고를 하고 있다.

"우리 장로교 교우들이 다른 종교단체보다 먼저 시국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성의껏 각자의 역량을 다하여 전승, 무운장구 기도, 전사병 위문금, 휼병금 국방헌금, 전상자 위문, 유족 위문 등을 사적으로 공동 단체적으로 활동한 성적은 이하에 숫자로 표시되었습니다. 애국반원들의 활동의 소식을 들을 때 ……이만하면'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9회 회록》, 1940, 87-94쪽)

이는 타교파나 타종교와 경쟁적으로 부일협력을 하면서 그 성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이다. 이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는 교회종까지 떼어 바쳤으며, 말기에는 교회도 통폐합하여 폐지된 교회 건물과 부지도 처분하여 바쳤던 것이다. 즉 교회의 존립을 위한 '순응'이란 한갖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사참배 문제에서 장로교보다 먼저 일제에 '순응'하였던 감리교의 경우도 이에 못지않는 부일협력을 하였다. 1940년 10월 감리교 총리원 이사회에서 소위 '혁신안'을 마련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우리 국체의 진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우리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회는 좌기 신안을 솔선결의 실행을 기함"(〈매일신보〉1940년 10월 4일자, "사상선도에 주력 군사원호에 진충, 감리교혁신안 발표")

여기에 이어서 서구적 민주주의·자유주의 배격,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감리교와의 합동, 일본적 복음의 천명 등을 열거하고, 심지어는 개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와 "교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하게 할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4일에는 국민총력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 주최로 시국대응신도대회를 열어 혁신요강의 실천과 고도국방국가 완성에 매진할 것을 선언하였다. 1942년 2월 13일에는 통리자 정춘수 목사의 명의로 각 교구장에게 '황군 위문 및 철물 헌납의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교회의 철문·철책은 물론 "교회종도 헌납하야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밖에도 정춘수 통리는 1944년 3월 3일 교단 상임위원회에서 '애국기 헌납 및 교회 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교회를 통폐합하여 전쟁물자를 낼 것을 결의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교단본부에서 지금 새로나백화점에 있는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교역자들을 일본정신으로 재교육시키기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부일적 행각은 군소교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0년 일제의 탄압을 받은 후 소위 '순일본적인 지도이념'으로 새출발을 다짐한 구세단(구세군), 성공회를 비롯한 안식교, 성결교, 천주교 등도 위에서 언급한 장로교, 감리교와 비슷한 부일행동을 하여 일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한편 이러한 교단적 차원의 부일행각 이외에도 일제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시국강연회 연사와 각종 어용단체 조직원으로 동원하여 이용하는가 하면, 그들의 이름으로 친일논설을 언론에 게재하게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937년 9월에 실시한 시국순회강연에는 신흥우, 유형기, 윤치호, 박희도, 차재명 등 쟁쟁한 기독교계 인사들이 동원되었고, 이듬해 10월에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전쟁협력 강도(講道)에도 정춘수, 차재명, 박연서, 이동욱, 홍병선 목사 등이 연사로 참여하고 있다.

친일논설은 친일잡지인 〈동양지광〉과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나 어용지 등에 많이 게재되고 있는데, 그 중 〈동양지광〉1939년 2월호에 실린 신흥우의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이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망언을 하고 있다.

"……조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 가능한 일이다. 금일의 우리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조선인이기 전에 우선 첫째로 일본인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적자로 오직 일본을 사랑하라! 그리고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국의 국책에 충실히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 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하는 바이다." 이런 사람이 해방 후에는 애국자인 척하고 대통령 후보로까지 출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김활란, 유각경, 박마리아, 박인덕 등 여성 기독교인들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지지 논설 및 강연에 동원되었고, 전쟁협력과 황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임전보국단의 간부로는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구자옥, 오긍선, 양주삼, 정인과, 정춘수, 박인덕, 황신덕, 채필근, 박희도 등 적잖은 기독교인들이 동원되고 있다.

그들은 민족의 지도자로서 더욱이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옳지 못한 처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대표적인 여성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이화여전의 교장으로 있던 김활란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1944년 여름, 나는 그들에게 끌려서 징병유세를 다녀야 했다. 내가 일본 정부에 의해서 고통을 받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이때만큼 나의 심신을 그르쳐 놓은 사건은 없었다. 숨을 턱턱 막는 폭양과 그보다 더 기세 등등한 감시와 강요하에 나는 살이 떨리고 양심이 질식할 징병유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영혼을 새까맣게 물들이 듯 나를 어둡게 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 때까지 그렇게나 이화를 지켜보겠다고 바둥거리며 남아있다가 이러한 일마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의 처사를 거의 후회하기까지 했다. 그 해 겨울, 나는 심한 안질을 얻고야 말았다.……광명을 가리우는 나의 병은 당연한 형벌처럼 느껴졌다. '내가 남의 귀한 아들들을 죽는 길에 나가라고 권고했으니 나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남의 밝던 마음 어둡혀주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선고나 하듯이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당연한 형벌이니 장님 되어두 할 말 없지……' 나는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고(告)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각오하면서 더듬거리는 손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어루만졌다."(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生命》,여원사, 1965, 225-227쪽).

이와 같이 일제는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억압, 회유하여 그들의 침략정책 수행에 이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지도적 위치에 있던 기독교인들까지도 민족적 양심과 신앙적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자의건 타의건 간에 이러한 부일적 행위에 내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그들 자신에게도 역사에 지우지 못할 오점을 남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민족에게도 심각한 충격과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이러한 기독교계의 부일적 행위 때문에 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잃고 교인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일반인 들의 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물론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적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투쟁한 기독교인들도 상당수에 달했으며, 순교자만 하여도 5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저항은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종교적 저항운동 내지 신앙운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극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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