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혐오스럽고 가슴 아픈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심장이 약한 분이나 임산부, 노약자들은 패스해 주세요.
이것은 한겨레 1998년 10월 22일 229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그 실태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북한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취재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더욱이 남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정씨는 그때 피살된 여성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한사람씩 짚어나갔다. 중도에서 헛갈리면 다시 처음부터 세어나갔는데 아무리 해도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몹시 서운해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은 ‘니시하라’, 중대장은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이었다고 했다.
매독감염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너무나 지독한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질문도 못하고 한숨만 내뿜었다.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廣東)에 도착, 이듬해 6월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주마”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되풀이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위를 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의 입 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다. 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글·사진/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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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일본에서도 그나마 양심있는 소수 일본인 중 하나인
이토 다카시 기자가 취재한 글 중 일부입니다.
그러나 이 기사가 나간 뒤 이토 다카시 씨는 일본 우익 단체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순히 우익 단체만이 아닙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 매춘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만들어진 위안부 소녀상을 보고
그걸 몹쓸 모양으로 바꾼 그림을 만든 것도
평범한 일본 시민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한국이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오버하고 있으며, 위안부 피해자들을 일본 정부가 보상할 필요는 없다고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올해에만 벌써 7명이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한국에 남은 생존자는 48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