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가 동네에서 약국 하시는데 규모도 평범하고 바쁜 일도 없어서 혼자 슬슬 운영하신다.
자식이 고추만 셋인지라 막내인 내가 재롱꾼을 맡고 있기 때문에 종종 들려서 어린이용 비타민제 까먹으면서 아부지랑 수다떨다 오는데,
오늘도 약국 들려서 아부지랑 시사토론에 한창 열 올리고 있다가 아부지가 갑자기 "니 엄마... 니 엄마 도시락... 아까...아까 먹은거.. 도시락.." 이러면서 중얼거리시더니
나보고 가게 좀 보고 있어라 하고는 리얼로 다급하게 밖에 있는 화장실로 나가셨다.
심심해서 캔디크러쉬 하다가 다시 문소리 나길래 봤더니 왠 여자가 들어오더라.
혼자 가게 지킨 적은 종종 있었는데 손님이 온 적은 처음이라 어버버 하면서 일단 인사했음.
근데 여자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임테기 하나 주세요..." 이러는거라.
처음에는 긴장해서 뭐 망테기 같은거 달라는 줄 알고 "네? 네?" 이러면서 주변에 망테기나 자루 비슷한거 빠르게 스캔했는데 여자가
""그...임테기...그.. 임신테스트기요..." 이러면서 너무 풀죽은 목소리로 다시 말해주는거야.
그래서 나는 죄송하다고 지금 약사선생님 나가셨는데 잠시 앉아 계시면 금방 오실거라고 하고 아부지한테 다급하게 콜때렸다.
근데 아부지.. 핸드폰도 안들고 가심.
암튼 여자는 앉아 있고, 나는 괜히 미안해져서 뒤편 제조실 쪽에서 박스 옮기는 척, 바쁜 척 하면서 여자 힐끔힐끔 봤는데,
어디로 계속 전화걸고(안받아서 계속 거는것 처럼 보였다) 핸드폰 자꾸 확인하고, 나중에는 넋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아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사연은 모르지만 나이대도 내 또래 같고 (나 23짤), 딱 여자들 울기 직전 모습으로 허공 보고 있는데 걍 진짜 뭐라도 해줘야 될 거 같았다.
근데 내가 딱히 뭐가 있겠어. 그냥 어린이용 비타민제 한움큼 쥐어서 그 여자한테 쑥 내밀면서 드세요 했다.
여자는 당황하다가 감사합니다 하고 한 개 까서 먹고는 그 뒤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더라.
그렇게 있다가 아부지 들어오시고 그 여자 계산하고 나가는데 뒷모습도 힘없어 보였음
나 또 감성충만이라 울컥해지는 마음 안고, 아부지한테 사람들이 임테기 많이 사러오냐고 여쭸다.
그랬더니 아부지가 중고딩부터해서 성인여자들까지 많이 사러오는데 거의 8~90퍼는 죄인마냥 풀죽어서 온대.
그러면서 니 미래에 여친이랑은 이런거 사러갈 때 같이 가주라고 하시더라.
그 여자는 절때로 임신을 원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던데 ,얼굴이 예쁘고 안예쁘고를 떠나서 다 포기한 거 같은 그 표정이 자꾸 생각나서... 혹시라도 임신했을까봐 괜히 내가 불안하고 걱정된다.
아 아줌마 마음같네 이거
나 솔직히 디씨같은 커뮤니티 하면서 성이나 섹1스, 여자에 대해서 굉장히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한 사람의 인생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원치 않는 임신 시에 더 많은 손해를 보는 게 거의 대부분 여자쪽이니까.
산부인과 기록도 그렇고... 신체적으로도 그렇고...
그냥 오늘은 마음이 좀 찝찝하다. 형님들 우리 꼬추관리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