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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횡성에서 찾아야 할 것들

뿌찌빠찌뽀찌 |2015.10.27 19:39
조회 158 |추천 0

1화 등심을 굽는 등신

 

 

 

“봐, 상추에 마늘이랑 살짝 익힌 등심을…….”

 

고소한 냄새로 가득한 식당은 정육점과 식당이 합쳐진 구조다.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주말이 아닌 데다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서 손님은 많지 않았다.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가 식욕을 자극했고 여자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고기를 구웠다. 그녀의 눈빛은 도자기 굽는 도공을 생각나게 했다.

 

꽤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왠지 모르게 신경질적이고 초췌해 보였다. 살이 땅길 정도로 말아 올린 일명 ‘똥머리’때문에 그녀의 눈은 치켜뜬 것처럼 보였다.

 

“냄새 죽이네.”

 

솔로의 적은 커플이라고 한다. 온갖 닭살 돋는 애정표현을 하며 식사를 할 때, 게임을 할 때, 물건을 고를 때도 자웅동체처럼 붙어 다니는 그들.

 

“어떻게 먹는지 알겠지? 이제 네가 직접 먹어 봐.”

 

여자는 모성애가 묻은 목소리로 고기를 먹는 방법을 알려준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면 애 엄마로 보일지도…….

 

“기다란 거 말고 포크 없어요?”

 

“젓가락질도 못 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젓가락을 몰라?”

 

그녀는 남자를 딱한 눈으로 바라봤다.

 

“알긴 알아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는 남자라고 말하기보단 소년처럼 앳돼 보였다. 밀가루 포대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하얀 피부, 아무렇게나 길러 목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여자는 손에 있는 집게를 봤다.

 

“이거라면 되겠지?”

 

“우와! 얼른 주세요.”

 

남자는 상추 위에 고기를 올렸다.

 

“정말로 먹어 본 적 없니?”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젓고 상추쌈을 한입에 먹었다. 우적거리며 고기를 씹는 모습이 개다래나무에 비벼대는 고양이 같았다.

 

“식판에 든 소고기는 먹어봤지만, 숯불에 구워서 풀에 싸먹는 건 난생처음이에요. 듣던 대로 여기 한우가 맛있네요.”

“에이, 다른 데하고 큰 차이는 없어. 마케팅을 잘한 것뿐이지. 구매자한테 우리 상품이 명품이라고 최면을…….”

 

남자는 여자가 얘기하거나 말거나 등심을 구워댔다. 그는 고기를 씹는 와중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주시했다.

 

“그래, 내가 여기까지 와서 사업 얘기를 할 이유가 없지. 더군다나 너한테.”

 

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올렸다.

 

“이모, 여기 동네 뒷동산 한 병 주세요.”

 

 

불판 위엔 말라비틀어진 새송이버섯과 검게 탄 등심이 나뒹굴었다. 열기를 잃어가는 숯불 옆으로 빈 병이 보였다.

 

소주잔은 하나만 있었고 남자는 못내 아쉬운지 불판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야, 더 먹고 싶어?”

 

“더 먹어도 돼요?”

 

“그러든가, 돈 벌어서 엄한 놈한테 뜯기는 것보다 불우이웃한테 고기나 사주는 게 낫지.”

 

“원하면 더 먹을 수 있다니……. 여기가 천국이란 곳이구나.”

 

“천국? 너 대체 어떤 곳에서 있다가 온 거야?”

 

“집…….”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답답하네, 사연이 있는 거 같은데…….”

 

“이거 정말 먹고 싶었어요. 방송에서만 들어보고.”

 

“맛집이라……. 그 개자식하고 자주 찾으러 다녔지.”

 

남자가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린 것도 모른 체 여자는 종업원을 불렀다.

 

“이모, 소주 한 병이랑 곰탕하고 육회 주세요.”

 

“잘 드시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

 

“감사합니다.”

 

여자는 턱을 괴고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민망하게 하려는 듯이 말이다.

 

“조금만 마셔요. 많이 마시면 소리 지르고 화만 내던데.”

 

“누가 그러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 웬만한 남자보다 술 세거든. 게다가 자동차도 없으니까.”

 

그 사이 육회와 소주, 곰탕이 나왔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두 사람의 식욕을 돋웠다.

 

이번에도 남자는 집게를 들었다. 여자는 배가 부른지 소주잔을 채웠다.

 

“이것도 못 먹어 봤지?”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끄떡였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도 익히지 않은 소고기야. 먹을 수 있겠어?”

 

“먹어볼래요.”

 

“잠깐, 달걀노른자는 터트려야지.”

 

젓가락을 양손에 하나씩 잡아 뒤적뒤적 비비는 것이 한두 번 먹어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에이, 노른자 튀었네.”

 

그녀는 황급히 물티슈를 뜯고 옅은 핑크 셔츠를 닦으려다가 멈추었다.

 

“내버려두자. 당분간 이런 옷은 입지도 않을 거니까.”

 

여자의 옷차림은 무척 세련됐다. 적당한 길이의 스커트는 통통하고 매력적인 허벅지를 돋보이게 했다. 옆자리에 벗어둔 회색 카디건은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패션감각이 있었다.

 

그에 비해 남자의 옷차림은 정반대였다. 스물 살 정도 된 남자가 검은 줄무늬 양복바지에 파란 바람막이라니……. 그의 나잇대에 전혀 어울리진 않았다. 중년의 졸부라면 어울릴 수 있겠지만, 그는 아직 활기 넘치는 나이였다.

 

게다가 옷들은 자신의 몸보다 훨씬 컸다. 유일하게 사이즈가 맞는 건 까만 무좀 양말뿐.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몇 시간 전 여자가 남자를 처음 봤을 때 구걸하는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여자보다 어린 남자는 멀끔한 얼굴과 달리 뭔가 부족했다.

 

둘은 돈과 사랑을 거래하는 관계인 걸까?

 

“자, 먹어봐.”

 

여자는 젓가락에 묻은 노른자와 참기름을 빨아먹고 잔에 소주를 채웠다.

 

“이야,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오늘따라 술도 잘 넘어가네.”

 

“그거 맛있어요?”

 

“소주? 글쎄다……. 꿀처럼 달달할 때도, 에스프레소처럼 쓸 때도 있지.”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소주병을 이리저리 살폈다. 여자는 콜라병을 이리저리 살피는 부시맨1)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신기하니?”

 

“네, 처음 보거든요.”

 

“소주를 처음 보다니, 외계인 아니야?”

 

“그 음료수 맛있어요?”

 

남자는 보기완 달리 영악한 구석도 있었다.

 

“확인해줄래? 쓴지 단지 알아보게. 내가 처음 소주를 마셨을 때 쓴맛인지, 단맛이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그녀는 잔에 남은 소주를 불판에 털어냈다. ‘치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생겼다.

 

“마시고 나한테 말해줘. 자, 잔부터 받고.”

 

술에 취한 것인지 박력 있게 잔을 내민 여자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쓰읍! 두 손으로 받아야지. 나보다 어린놈이…….”

 

“두 손으로 받아야 해요?”

 

“그럼, 이제 음미하면서 쭉 들이켜 봐.”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소주를 입안에 털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멀쩡했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소금을 한주먹 삼킨 것 같은 얼굴로.

 

“켁, 켁! 맛이 왜 이래요?”

 

여자는 식당 안이 울릴 정도로 웃어댔다. 고기를 굽고 있던 중년 부부와 진열대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남자와 젊은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킥킥, 어떤 맛인지 알겠다. 오랜만에 실컷 웃어보네.”

 

여자는 연거푸 기침을 해대는 남자가 안쓰러웠는지 웃음을 멈췄다.

 

“한 수저 떠 마셔봐.”

 

아직 김이 가시지 않은 곰탕은 우유처럼 뽀얗다.

 

“이게 곰탕이란 거죠?”

 

여자는 대답 대신 밥을 말고 깍두기를 얹어 주었다. ‘일단 한번 잡숴봐.’라고 하는 걸까? 남자는 망설이다가 여자의 눈치를 살피고 밥과 국물, 깍두기를 한번에 먹었다.

 

“이야.”

 

탄성을 내지른 남자는 게걸스럽게 곰탕을 비워냈다. 여자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건 소주하고 다르지?”

 

“네,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세 번째로 맛있어요.”

 

“그것도 쓸 거 같아서 망설였니?”

 

“그랬던 거 같아요.”

 

“된통 당하고 겁먹은 건가? 등신같이…….”

 

“네?”

 

“아니야, 아무것도. 예쁜 누님한테도 한잔 따라봐.”

 

오른손엔 숟가락을 집고 있던 남자는 남은 왼손으로 소주병을 들었다.

 

“이게 버릇없이!”

 

여자는 젓가락으로 남자의 손등을 쳤다. 당황한 남자는 손등을 매만졌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술을 따라 줄 때도 두 손으로 해야지.”

 

“죄, 죄송해요.”

 

“죄송하긴, 다시 해봐.”

 

어느새 술병은 늘어갔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고 남자는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안주빨만 세울 거야? 술도 마시지 않고.”

 

“그건 너무 써요.”

 

“입맛이 생긴 거 하고 똑같네. 그나저나 엄청나게 잘 먹는구나?”

 

호리호리한 체격과 다른 그의 엄청난 식욕은 탄성을 자아냈다. 놀라운 건 남자는 아직도 배고픈지 남은 밑반찬을 열심히 먹고 있다는 거였다.

 

‘오빠는 지금 몸 관리 때문에 많이 먹으면 안 돼. 알았지?’

 

조용히 술잔을 비워가던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바람 피려고 음식 앞에서 깨작거린 거야?’

 

“졸려요?”

 

남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괴로움을 잊는 마법에 걸린 거야.”

 

이 여자는 취해버렸다. 언뜻 눈물이 보이는 건 남자의 착각이 아니었다. 소리 내지 않고 있지만, 그녀는 확실히 울고 있었다.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남의 눈물을 본 적 없던 그는 당황스럽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나쁜 새끼,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여자는 곧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말투가 거칠고 털털하더라도 가녀린 여자인 걸까? 어깨를 들썩이며 두 눈을 가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내가 등신이지, 미련하게 전부 퍼다 주었으니.”

 

‘그만 울어요. 그러고 있으면 당신만 손해에요.’

 

남자는 창살 밖에서 들리던 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다. 그에게 오락거리란 밖에서 들리던 티비 소리밖에 없었다.

 

그가 매일매일 느끼는 감정은 ‘밖으로 나가고 싶다.’였다. 나간다면 운전이란 것도 해보고 동물원에도 가고 등 많은 것을 하고 싶었다.

 

그중 가장 보고 싶은 건 드라마였다. 두 눈으로 배우의 표정을 보고 몸짓을 보고 싶었다.

‘안아 줄 것도 아니면 위로도 하지 마요.’

 

여주인공의 대사를 듣고 남자는 알게 되었다. 여자가 울고 있다면 안아주어야 한다는 걸.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포옹이요. 이게 여자를 위로하는 방법이잖아요.”

 

그녀는 그를 밀쳐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어깨의 단단함을 느끼고 긴 머리칼의 부드러움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냄새도 마음에 들었다.

 

“너도 선수니?”

 

“선수? 저는 운동 못 해요.”

 

“바보, 운동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남자의 어깨를 밀어낸 그녀는 핀잔을 주려다가 맑은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좋게 말하면 순수한 눈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기당하기 좋은 눈이었다.

 

“그놈하고 눈빛은 틀리네.”

 

여자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회사의 대표가 있는 방은 깔끔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게 보통이다. 투명하거나 자개로 장식된 명패, 잘 정리된 갈색 액자와 서적들은 그녀의 대표실엔 먼 나라 얘기였다.

 

대표실은 아이돌에 빠져버린 소녀의 방 같았다. 노란 가죽 소파 밑에 있는 토끼 모양 실내화는 근엄함과 거리가 멀었다. 직접 주문 제작한 베이지색 명패는 신입사원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민트색 장식장엔 그동안 회사에서 출시된 액세서리가 자리를 차지했다. 중년 여성을 겨냥해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고가제품부터 젊은 층이 좋아할 만한 다양한 제품이 눈길을 끌었다.

 

비즈를 이용한 목걸이부터 금반지까지, 이곳은 회사라기보단 액세서리샵에 가까웠다.

“대표님, 홈쇼핑 업체에서 온 업무협의서 가져왔어요.”

 

“나중에 주셔도 되는데, 급한 거 아니면 다음 주에 도장 찍어도 되죠?”

 

횡성에서 그를 만나기 하루 전, 그녀는 여행은커녕 놀이공원에도 가보지 못했다. 맘 편하게 밥을 먹은 적도 별로 없고 고향친구의 얼굴은 가물가물해져 갔다.

 

“네, 그리고 밖에서 남자친구 분이 기다리던데.”

 

“그 오빠도 참, 알았어요. 얼른 퇴근부터 하세요.”

 

그녀가 팍팍한 일상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후끈한 사랑 덕분이었다. 직원이 나가자마자 그녀는 전신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여자는 남색 스커트에 뭔가 묻은 게 없는지 확인하고 괜스레 옆구리를 꼬집었다.

 

“어렸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머리핀으로 잘 고정했지만, 시간이 지나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예전에는 극세사 같던 머리카락이 갈수록 뻣뻣해지는 현실도 말이다.

 

“젠장, 다시 해야 하잖아.”

 

입에 핀을 물고 머리를 정리하는 뒷모습이 꽤 매혹적이다. 창문 밖에서 비치는 도시의 불빛 때문일까? 아니면 어깨를 감싼 찰랑찰랑한 머릿결 때문일까?

“립글로스, 립글로스.”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말고 핀을 꼽으려는 순간 하얗게 튼 입술이 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핸드백을 뒤져 옅은 핑크 계열의 립글로스를 발랐다.

 

목덜미가 땀으로 젖어서, 눈가에 다크서클이 져서, 피부가 푸석푸석해서, 여러 이유로 그녀의 외출은 늦어졌다.

 

‘똑똑.’

 

하이힐로 갈아 신으려던 그녀는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자기, 괜찮아?”

 

훤칠한 키에 강인한 인상의 남자는 그녀를 부축했다. 여자는 부끄러운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미안, 밀린 서류가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된 여자는 미안함을 느꼈다. 만약 남자가 회사생활을 조금만 했더라면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직원이 문을 열어주더라고.”

 

“아, 촬영은 잘 끝났어?”

 

“그럭저럭.”

 

“맞다, 이번에 자기가 나온 잡지 샀어. 잘했지?”

 

그녀의 말대로 책상에 펼쳐진 패션잡지엔 그의 사진이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넓은 어깨와 탄탄한 복근은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만했다.

 

사실 그녀도 디자인 초안을 만드는 내내 사진에 정신이 팔려버렸다. 덕분에 그녀는 하루를 망치고 말았다.

 

“고맙긴 한데, 언제까지 잡지에서 활동할 건 아니잖아.”

 

“미, 미안…….”

 

“우리 주미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오빠가 능력이 없는 거지.”

 

“조금만 있으면 잘 될 거야. 이번에 우리가 협찬한 드라마 알지? 거기 피디한테 오빠 얘기했더니, 비중 있는 단역으로 생각해본다고 했어.”

 

“정말 고마워. 하여튼 내가 이주미 덕분에 웃는다.”

 

여자의 이름은 이주미. 대학교 수업까지 제치고 쇼핑몰 사업에 뛰어든 그녀는 당찬 여대생이었다. 회사원이었던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더라도 프랑스에서 런칭을 한다는 건 대단했다.

 

그녀의 회사는 꾸미는 걸 좋아하는 여자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커졌다. 백화점마다 매장이 열렸고 연예인이라면 그녀가 디자인한 액세서리를 한 번쯤 협찬받을 정도였다.

 

기자들이 젊은 창업자를 인터뷰할 땐 주미는 언제나 1순위였다.

 

“밥 안 먹었지? 이번에 아는 형님이 개업한 태국음식점에 가자.”

 

“잘됐네, 안 그래도 매콤한 걸 먹고 싶었는데.”

 

 

그들은 차를 타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신사동에서 이태원은 가까운 거리지만, 도로가 막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차 안에서 주미는 회사의 일을 재잘거렸고 남자는 고개를 끄떡이며 경청했다. 은은한 음악은 피로를 날려주었고 남자는 이따금 미소를 지었다. 선이 굵직한 인상에 자상한 미소가 깃들자 오묘한 분위기를 냈다.

 

“아, 그랬어?”

 

단순한 말이지만, 그녀에겐 ‘사랑해.’만큼이나 감미로웠다.

 

남자가 운전하는 차도 주미의 선물이다. 허구한 날 망가지는 고물차를 보다 못한 주미는 당장 자동차를 계약했다. 남자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오빠가 다치면 어떡해?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성공하면 갚아.’

 

주미는 발가벗은 남자아이가 쏜 화살에 맞은 지 오래다.

 

“이번에 출시한 목걸이가 중국에서 반응이 좋더라고.”

 

“잘됐네.”

 

남자는 차 안이 더웠는지 검은색 재킷을 벗어 주미의 다리 위에 올렸다.

 

‘따뜻해.’

 

주미는 홀린 듯이 그의 재킷에 볼을 비볐다. 진한 가죽 냄새와 함께 남자의 체온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옆에서는 남자의 향수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시트러스 향2)은 상쾌했고 주미의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한참이 지나 그들은 이태원에 도착했다. 이국적인 곳으로 소문난 이태원은 밤이 되자 더욱 활기가 넘쳤다. 남자의 지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은 경리단길에 있었다.

 

“여긴 오랜만에 온다.”

 

“가끔은 이런 곳도 놀러 와야지. 저기 있는 가게네, 괜찮아 보이지?”

 

남자가 가리킨 곳엔 체리나무간판이 있었다. 테라스는 아직 공사 중인지 나무판자가 이리저리 널렸다.

 

“응, 빨리 먹고 싶다.”

 

사실 주미는 뜨끈한 꼬리곰탕을 먹고 싶었다. 그녀는 줄곧 기운이 없을 땐 국물을 먹곤 했다. 아저씨 같은 입맛은 어렸을 때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탓일까? 나중에 알겠지만, 고향친구들도 주미와 입맛이 비슷했다.

 

다이어트 때문에 국물을 꺼리는 여직원을 보면 속으로 ‘망할 년이 꼴값 떠네, 내 나이 대봐라.’라고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자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고 기력이 달리기 시작했다. 기지개를 피고 하품하는 횟수가 늘어가는 게 어쩐지 서글펐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이라이터를 바르지 않아도 그녀는 생기 있어 보였었다.

 

“형님, 오랜만이에요.”

 

“이 녀석, 연락이 뜸하더니.”

 

요란한 무늬의 남색 두건을 동여맨 남자가 반갑게 인사했다. 온갖 소스가 튄 흰색 앞치마가 부지런한 인상을 주었다. 가게 안엔 손님이 별로 없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바빠서요. 손님은 많이 와요?”

 

“아직 일주일도 안 돼서 그런지 시원찮아……. 그나저나 차희 넌, 몸이 더 좋아졌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밥도 조금밖에 못 먹겠네? 아이고, 난 그냥 이대로 살련다.”

 

웃으면서 뱃살을 만지던 남자는 주미를 슬쩍 보았다.

 

“누구?”

 

“예전에 말했던 애인이에요. 이쪽은 성욱이 형이라고, 고등학교 선배야.”

 

성욱은 쭈뼛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털털한 외모와는 달리 성격은 정반대였다.

 

“안녕하세요. 이주미에요.”

 

바짓가랑이가 터진 거처럼 불편해 보이는 그와 달리 주미는 여유로웠다. 차희는 그 모습이 재밌는지 가볍게 웃었다.

 

“잠시만요.”

 

주미는 가볍게 악수하고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냈다.

 

“진짜로 여기 대표님이셨네! 장난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아, 네.”

 

“작년에 여자친구한테 선물한 팔찌가 그쪽 회사였어요.”

 

“감사합니다. 직원들 데리고 밥 먹으러 자주 올게요.”

 

성욱은 연예인을 본 것처럼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계산대로 부리나케 달려가 명함을 꺼내고 주미에게 건넸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성욱이 차희에게 말했다.

 

“뭐하긴요, 밥 먹으러 왔죠.”

 

 

 

주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똠얌꿍과 파인애플 볶음밥을 시켰다.

 

‘이것도 나쁘지 않네?’

 

차희는 턱을 괴고 샐러드를 뒤적였다.

 

“오빠, 그거 가지고 되겠어? 국물도 마시고.”

 

“몸 관리해야 해서……. 걱정하지 말고 많이 먹어.”

 

“그래도…….”

 

그가 시무룩해진 주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 알람 음이 들렸다.

 

“내건가?”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냈지만,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주미는 그제야 차희의 스마트폰에서 난 소리라는 걸 알게 됐다.

 

“누가 메시지를 보냈데?”

 

“소속사 대표님이 단체로 보낸 걸어야.”

 

그녀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차희의 스마트폰을 보려고 했다.

 

“뭐하는 거야?”

 

“그냥, 어떤 메시지인가 해서.”

 

차희는 얼굴을 찌푸리고 덮개를 닫았다.

 

“내가 네 사생활 감시하디?”

 

“아, 아니.”

 

당황한 주미는 재빨리 의자에 앉았다. 분위기는 이미 얼어붙고 말았다.

 

“안 그래도 어린놈들이 치고 올라와서 골치가 아픈데 너까지 왜 이래?”

 

“난 그저 궁금해서, 정말 미안…….”

 

“너 때문에 숨이 막힌다.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날까 봐 그래?”

 

그는 주미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다그치는 걸 그만두었다.

 

“밥 먹는 중에 울지 말고, 오빠가 요즘 예민해졌나 보다.”

 

“으, 응.”

 

그녀는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 다행히 그들을 의식하는 손님은 없었다.

 

‘저 녀석은 능력도 좋아. 여자가 꿈쩍도 못 하네.’

 

둘을 눈여겨본 손님이 없을 뿐, 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여자 다루는 재주는 그대로구나.’

 

구경거리 덕분에 성욱은 웍3)을 다루면서 생긴 손목 통증도 잊어버렸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주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바보지, 바보!”

 

주미는 머리카락을 몽땅 뜯어버릴 기세였다.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녀는 혹시나 번졌을 마스카라 자국을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눈이 조금 부어오른 것 빼곤 모든 게 멀쩡했다.

 

‘어떻게 하면 오빠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까?’란 물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주미는 문득 찬바람을 쐬고 싶었다. 밖에서 심호흡을 하고 수정과 수다를 떨면 한결 가벼워 질 것 같았다.

 

‘밖에서 통화나 해야겠다.’

 

그녀는 수정과 통화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가 나오곤 했다. 그 순간만큼은 ‘깔깔’대며 놀러다니던 시골소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마침 화장실과 가게 뒷문이 연결되어 있었다.

 

“너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렸어? 저 여자도 참 불쌍하다.”

 

뒷골목으로 나가는 입구에 다가서는 순간 성욱의 말소리가 그녀를 잡았다.

 

 

1)부시맨: 1980년대 코미디 영화. 아프리카의 부족 ‘부시맨’이 콜라병을 발견해 생긴 사건을 그린다.

 

2)시트러스: 감귤류의 과일을 뜻함.

 

3)웍: 둥근 모양의 후라이팬으로 중국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동남아시아에서 두루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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